#91화 백반은 백반답게 (1)
진민호의 눈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껏 그의 칼질은 대부분 속도를 요하는 것들이었다.
무 자르기, 배추 자르기, 대파 다듬기, 닭고기 반 가르기 등등.
그런 것들은 빠르고 강하게 해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 달랐다.
‘무려 문어 소시지 만들기 미션!’
문어 소시지.
자칫 서투르게 칼을 썼다가는 문어 다리가 완전 엉망이 될 수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정확히 썰지 않으면 그 모양 자체가 무너진다는 뜻.
진민호의 가슴은 묘한 흥분으로 일렁거렸다.
이번 미션을 잘 성공하면…….
그는 칼을 든 채로 선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번 것만 잘 성공하면 이선우 사장에게 더 인정받을 수 있다!’
처음 이 가게에서 일하고 싶었던 건 맛있는 음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저 젊은 이선우 사장이라고 했을 때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부여했던 미션들을 수행하고 돌아와 가게의 직원이 됐다.
직원이 된 후에는 더 놀랐다.
이선우 사장은 요리를 잘할 뿐만 아니라, 경영의 측면에서도 뛰어났고, 그 와중에 가게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인정을 베풀었다.
그러면서도 가게는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중년의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세상의 법칙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거였다.
재물을 얻으려 하면 돈은 벌지만 인심을 잃는다고.
인심을 얻으려 하면 사람은 얻지만 재물은 못 얻는다고.
하지만…… 자신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저 이선우는 달랐다.
돈과 행복,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를 얻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존경심 비슷한 감정으로 저 이선우를 바라보게 됐다.
닮아 가고 싶어졌다.
인정받고 싶어졌다.
오늘의 문어 소시지 미션은 이선우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진민호는 크게 호흡을 여러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시작되는 칼놀림.
소시지 하나를 도마에 올린 그는 손가락으로 소시지를 돌려 가며 정확히 네 번 칼집을 내었다.
네 번의 칼집에 여덟 가닥으로 촤락 나눠지는 소시지.
완성된 소시지를 한쪽으로 치운 그는 다른 소시지를 다시 도마 중앙으로 옮겼다.
다시 이어지는 칼놀림.
휙 휙 휙.
탁 탁 탁.
소시지를 돌리는 그의 손에서는 바람 소리가 났고, 그의 중식도는 도마와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민호 삼촌의 진지한 표정과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자세를 보니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자신의 나이, 경력, 자존심을 떠나서 늘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저렇게 겸손하기도 쉽지 않은데…….
민호 삼촌이 문어 소시지를 만드는 동안 소시지와 같이 볶아 줄 야채를 손질한다.
양파, 양송이 버섯, 파프리카, 당근, 마늘을 숭덩숭덩 썰어 준다.
이 친구들은 문어를 보좌해 줄 조연들이다 보니 예쁘게 모양을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소시지와 비슷한 크기로 대강 썰어서 준비해 주면 된다.
주변에 있는 야채들이 투박해 보일수록 아기자기한 문어 소시지가 더 예뻐 보일 거다.
다음은 소스를 만들 차례.
사실 소시지 야채 볶음의 소스는 매우 간단하다.
토마토 케첩, 간장, 설탕, 식초를 대접에 넣고 골고루 섞어 준다.
여기서 매운 맛을 원하면 고춧가루를 살짝 추가해 주면 된다.
오늘은 정통 소시지 야채 볶음을 만들 거라 고춧가루는 빼고 준비한다.
참, 고춧가루가 없다고 해서 고추장을 넣으면 안 된다.
여기에 고추장이 들어가면 그 고추장이 너무 큰 존재감을 발휘해서 다른 양념 맛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니까.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먼저 마늘을 넣어 준다.
다른 야채는 살짝 익혀도 맛이 나는 반면, 마늘은 확 익혀서 부드러워져야 어른도 아이도 고소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은 중불로 유지한 채로 마늘을 튀기듯이 볶아 준다.
양파는 먼저 넣어서 기름에 양파 맛을 배게 해도 좋고, 나중에 넣어서 식감과 모양을 살려도 좋다.
결국 볶음의 맛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모양을 살릴 것이냐의 문제이다.
오늘은 양파를 먼저 넣어 볶음의 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
양파의 모양이 약간 뭉개지더라도 기름에 볶아진 양파가 만들어 내는 맛을 살리는 거다.
마늘과 양파가 어느 정도 볶아진 후, 먼저 소시지를 넣는다.
불을 만난 소시지는 다리를 서서히 펼치며 문어가 된다.
소시지가 문어로 변하는 마법…… 정도는 아니고 어쨌든 꽤 문어 모양에 가까운 그런 느낌.
실제 문어보다는 문어 모양의 과자를 더 닮았다는 게 팩트이지만.
어쨌든 가녀린 다리 여덟 개를 쫙 펴는 소시지의 모습이 왠지 귀엽다.
“이야…… 이거 그냥 이 상태에서 먹어도 맛있겠는데?”
지나가던 아버지가 한마디 하신다.
“맞아요. 이 상태에서 소금 간만 살짝 하면 맥주 안주로 최고죠.”
“그러게 말이야. 쩝쩝. 오늘 저녁에 이걸로 야식 먹어야겠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저녁에 옥상에 올라가서 대접하겠습니다.”
“오, 좋다! 오늘 저녁엔 소시지 안주에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자.”
“좋습니다!”
“오늘밤 야식 생각하면서 힘내서 일해야겠다. 자, 파이팅!”
소시지가 노릇노릇 익었다 싶으면 파프리카, 양송이, 당근을 넣어 볶아 준다.
다시, 채소들이 열을 받아 숨이 죽었다 싶으면 아까 만들어 둔 소스를 부어 같이 볶아 준다.
아버지가 얘기한 대로 아까 그 상태에서 먹으면 어른용 안주가 되고, 이렇게 소스를 넣어 볶으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이 된다.
채소에서 나온 물과 소스가 어우러져 재료들이랑 잘 볶아지면 소시지 야채 볶음 완성.
어떻게 알고 몰려들었는지 눈앞에 하이에나들이 잔뜩 몰려왔다.
고종숙 하이에나와 안순미 하이에나, 오늘은 칼질로 큰 기여를 한 진민호 하이에나와 거의 맥주병을 딸 기세로 입맛을 다시고 있는 이철민 하이에나. 그리고…….
이 선우네 밀림의 아귀 유혜승 하이에나까지.
아니다.
유혜승을 하이에나로 표현하는 건 녀석에 대한 실례다.
녀석은 밀림의 여왕이니까.
적어도 먹는 것에 관해서는.
유혜승 사자 정도는 되려나? 아니면 코끼리?
“자, 시식 시간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곳곳에서 젓가락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아는 맛이 무서운 반찬들을 몇 개 더 만들어 오늘의 메뉴를 구성했다.
<오늘의 메뉴>
- 돼지고기 김치찌개
- 비엔나 소시지 볶음
- 진미채 볶음
- 달걀 장조림
- 왕 계란말이
- 그 외 김치 여러 종.
* * *
노포.
오래된 가게라는 뜻의 그 말은 지금에 와서는 ‘오래된 맛집’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영훈대학교 영화과 교수이자 영화감독인 박찬희는 지인들 사이에서 노포 마니아로 불린다.
노포를 선택하는 그의 기준은 사실 별거 없었다.
- 최소 15년 이상 된 오래된 집일 것.
- 체인점이 아닐 것.
- 맛있을 것.
이 세 가지 요건만 충족하면 그의 기준에 적합한 맛집이 되고 그 순간 그의 맛집 리스트에 포함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보다 더 기준이 까다로웠다고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준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그 까다로웠던 기준을 모두 맞추려다가는 더 이상 리스트에 포함될 만한 식당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요즘 음식을 주제로 한 영화 시나리오를 기획 중이었다.
그 스스로 먹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는 음식이야말로 사람들의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좋은 이야기의 소재라고 생각해 왔다.
언젠가는 한 번 음식 이야기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김 실장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요? 음…… 글쎄요. 감독님께서 정해 주시죠. 감독님이 데려가는 음식점이라면 어디라도 믿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김 실장이라 불린 사람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 메이저 영화제작사에서 캐스팅 디렉터를 맡고 있는 인물.
박찬희와 회의도 할 겸 얼굴도 볼 겸 해서 오늘 영훈대학교를 방문한 터였다.
“음…… 그렇게 말하니까 더 어려운데요?”
박찬희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이미 여러 편의 상업영화를 제작한 중견 감독이지만, 영화제작사와는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이, 영화 산업이라는 게 혼자만 잘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늘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좋은 배우가 필요하다.
영화라는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감독이라면, 영화라는 상품이 극장에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제작사와 투자자이다.
그러니 영화감독과 제작사는 언제나 좋은 관계를 맺고 상호 협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희는 김 실장에게 뭔가 괜찮은 식사를 대접해 주고 싶었다.
마냥 비싸고, 마냥 유명한 곳이 아닌…… 이곳 영훈대학교 근처에서만 맛볼 수 있는 유니크하면서도 맛이 좋은 식당을…….
물론, 그런 식당이 흔할 리가 없다.
“김 실장님. 딱 집어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뭔가 먹고 싶은 음식의 종류라도 좀 말해 주세요. 그 안에서 골라 보게.”
“아…… 그렇다면…… 사실은 그냥 집밥 같은 게 먹고 싶어요. 요새 회식이다 미팅이다 해서 만날 기름진 거에, 날것에, 고기만 먹었더니 속이 늘 거북해서요.”
“음…… 집밥이라…….”
‘집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식당이 하나 있었다.
사실 그는 감독 일을 병행하기에 학교 근처 식당에는 매일 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어떤 학기는 통째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맛집 성애자이자 노포 마니아인 그도 학교 근처의 식당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의 동료 교수로부터 한 가게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 박 교수, 그거 알아? 학교 근처에 총장님이 만날 가는 식당이 생겼다는 거.
- 총장님? 아, 그 켄터키 할아버지 같이 생기신 분.
-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총장님한테 켄터키 할아버지라니…….
- 오 교수. 내숭 떨지 마. 솔직히 켄터키 할아버지 닮았잖아, 그분.
- 흐흠. 사실 좀 그렇긴 해. 헤헤. 암튼 그런데 말이야. 그분이 생긴 거랑은 다르게 입맛이 굉장히 까다롭거든
- 그래? 나야 뭐 학교를 잘 안 나오다 보니 그런 줄도 몰랐네.
- 응. 엄청난 미식가래. 그래서 총장님 전담으로 외식경영학과 김흥범 교수가 점심 담당으로 따라 붙었을 정도니까.
- 오…… 그런데 그런 정도의 미식가분이 매일 가는 밥집이 있다는 거지?
- 바로 그거지. 그런 미식가분의 입맛을 저격해 버린 식당이 있다는 거지.
- 그 가게 이름이 뭔데?
- 선우네 백반.
선우네 백반.
흔하디흔한 백반집 이름이다.
이름으로만 봐서는 어떤 특별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오 교수의 말을 한 번 믿어 보고 싶어진다.
오 교수 그 친구가 학내 정치에 빠삭한 게 좀 맘에 안 들기는 해도, 정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파악하는 친구니까.
“김 실장님, 그럼 백반집 어떻습니까?”
“오…… 아주 딱인데요. 백반집 생각하니까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 주신 반찬들이 떠오르면서 벌써 군침이 확 돕니다.”
“오,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가시죠!”
그렇게 해서 맛집 성애자이자 노포 마니아인 박찬희 감독과 김 실장이 선우네 백반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