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85화 (85/110)

#85화 가끔은 분위기도 따진다 (2)

살짝 거칠면서도 고소한 풍미를 내는 번이 먼저 씹힌다.

역시 빵은 맛있다.

이렇게 버터에 구우면 더 맛있고.

번의 맛을 느끼자마자 훅 들어오는 한우 패티의 짭짜름한 간.

그리고, 패티를 씹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육즙.

거기에 소고기 특유의 진한 풍미까지.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패티를 씹으면서 같이 씹히는 채소들의 맛도 훌륭하다.

고기는 역시 채소랑 곁들여 먹는 게 좋다.

그래야 더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치즈와 패티의 약간은 느끼한 맛을 치콘, 토마토, 양파의 채소 3종이 훌륭하게 보완해 주었다.

씹자마자 바로 다시 입을 열어 버거를 맞이할 수 있도록.

그렇게 버거와 충만한 시간을 보낸 후…… 지금은 잠시 입을 정화해야 할 시간이다.

“근데 왜 밀크쉐이크를 시키셨어요?”

이초희가 묻는다.

“아…… 이거 모르죠?”

난 득의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왠지 이초희의 기세에 잔뜩 눌린 기분이었는데, 이걸로 조금은 만회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희 씨. 밀크쉐이크에 감자튀김 안 찍어 먹어 봤죠?”

“으윽…… 그건 좀 조합이 이상해 보이는데요. 햄버거 안에 쌈장 소스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후후…… 과연 그럴까요?”

밀크쉐이크와 감자튀김.

몇 년 후에는 미국의 한 버거 전문점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 밀크쉐이크에 감자튀김을 먹는 문화를 대중화시킨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는 한국 사람들도 이 조합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거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말이다.

미국에서는 왜 이런 기이한 조합이 탄생한 걸까?

누가 봐도 음식인 감자튀김과 누가 봐도 간식인 밀크쉐이크를 같이 먹을 생각 말이다.

뭐, 이런 얘기가 있다.

미국의 쉐이크는 점도가 높은 편이데, 그걸 아무리 빨대로 빨아먹으려고 해도 나중에는 꼭 컵 안에 쉐이크가 남았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그게 아까웠던 사람들이 감자튀김으로 쉐이크를 떠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발우공양을 하듯이.

근데 말이다.

그 맛이 꽤 좋았던 거다.

밀크쉐이크의 단맛과 감자튀김의 짠맛의 조화.

일명 단짠단짠.

지구촌 어디에서도 단짠단짠은 진리다.

내 얘기를 들은 이초희가 길다란 감자튀김을 들고, 쉐이크로 향한다.

아직 그녀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가득하다.

이게 맛있다고?

조심스럽게 감자튀김에 쉐이크를 묻힌 그녀는 천천히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조용히 맛을 음미하던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으음…… 와…… 이거…… 맛있네요?! 와, 어떻게 이게 이런 맛이 나지?”

“맛있죠? 거봐요. 맛있다니까.”

“와…….”

이초희의 손이 다음 감자튀김을 향하려는 그때.

이 모든 걸 예상한 내가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밀크쉐이크는 제 겁니다.”

“에이, 치사하게…… 또 시키면 되잖아요.”

“시간이 걸리잖아요. 시간이.”

“흐응…… 이거 맛있는데…….”

“좋아요. 그럼 초희 씨. 내려가서 초코쉐이크 하나 주문하고 오세요.”

“초코쉐이크요?”

“네. 감자튀김에 초코쉐이크도 맛있거든요. 그거 시키고 와서 이거 같이 나눠 먹어요, 그럼.”

“오…… 그렇다면……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초희의 몸이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 * *

“와…… 진짜 잘 먹었다. 사장님, 오늘도 덕분에 정말 잘 먹었습니다.”

“덕분이라뇨. 제가 사 드린 것도 아닌데.”

“덕분이죠. 전 맛있는 걸 위해서라면 돈 쓰는 건 아깝지 않아요. 근데 사장님만큼 맛집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지 않아서 문제인 거죠.”

“해박하다기보다는…… 좀 다녀 보다 보니까…….”

“아, 맞다.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사장님은 도대체 언제 이런 맛집들을 다 다녀 보신 거예요?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으신 분이.”

“아…… 그게…… 음…….”

뭐라고 답할까 고민하는데 순간 곰 같은 사람, 다시 이모부가 된 그분이 생각났다.

“저희 이모부가 먹을 걸 좋아하시거든요. 맛집도 많이 아시고. 그러다 보니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 참 좋은 이모부를 두셨군요…… 그 이모부 저한테도 좀 소개를…….”

“아…… 하하하. 뭐, 기회가 된다면 그러죠.”

그 이모부…… 산골 마을에서 이제 못 나올 것 같은데.

“그나저나 여기 풍경 정말 좋죠?”

“…네. 오늘따라 사장님이 왜 조금 더 여기 있자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서울 시내 전경이 보이는 것도 아름다운데, 노을이 깔리니까 진짜 절경이네요.”

“맞아요. 진짜 헉헉대면서 올라오는 보람이 있는 곳이죠.”

음식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음식의 맛이다.

지하철역에서 멀어도, 한 시간을 기다려도, 심지어 가격이 비싸도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점을 찾는다.

그 맛있는 음식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고, 같이 온 사람과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안 되는 일도 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음식 맛이 떨어져도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곳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바닷가나 강가 근처의 식당이나 카페들.

그 곳에서는 바다를 보고, 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기꺼이 음식값과 커피값을 지불한다.

그런 걸 뷰(View)값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아름다운 뷰를 볼 수 있다면, 다소 떨어지는 음식 맛도 사람들은 견딜 수 있다.

그런 건 좋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이 식당에 가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분위기니까.

“가끔은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어질 때가 있죠. 아름다운 뷰도 보면서. 이렇게 맥주 한잔하면서.”

“저도 그래요.”

“정말이요?”

“네, 그렇다니까요.”

“진짜…… 그래요?”

“어라? 저도 여자거든요. 맛도 맛이지만 분위기도 따진다구요.”

음…… 맛보다는 양을 더 따지는 것 같은데…….

“그 눈빛 뭐예요?”

“아니요. 아니에요.”

“치…… 뻔하죠 뭐. 어차피 많이 먹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셨죠?”

“…….”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맞는데, 맞다고 할 수 없었던 거다.

“뭐…… 그런 게 중요한가요? 이렇게 아름다운 뷰가 눈앞에 있는데.”

“치…… 말도 돌릴 줄 아시네. 사장님…… 가끔 보면 선수 같아요. 맛집도 이모부가 아니라, 여자들이랑 다니신 거 아니에요?”

헉…… 오늘따라 얘가 왜 이렇게 날카롭지?

안 그래도 이 집은 전생의 전 부인과 가끔 다녔던 집이다.

전생의 전 부인이라고 하니까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딱히 유쾌한 기억은 아니어서 나도 여기는 안 오고 싶었는데…… 사람이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예쁜 풍경을 보면서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싶은 순간.

맛있는 걸 먹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분위기 좋은 데서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기분.

오늘은 왠지 그런 날이었던 거다.

이곳은 그런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고.

아무리 다른 대안을 생각하려고 해도, 오늘 같은 기분에 너무 딱이었던 그런 곳이었던 거다.

“제가 무슨 선수예요. 백반집 요리 선수라면 모를까. 여자들 맘은 몰라도 손님들 맘은 제가 좀 알죠. 오늘 같은 날은 뭘 먹고 싶을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입맛에 맞는지 안 맞는지.”

“역시 말을 잘 돌리시네…… 이게 딱 선수들이 잘하는 행동이죠. 곤란할 때 능구렁이처럼 쓰윽 빠져나가는 거.”

“뭐…… 그렇다고 해 두죠. 연애도 잘 못하는데 선수라고 해 주시니 제가 감사해야죠. 후후.”

맛있는 음식.

노을이 내린 아름다운 서울 시내 풍경.

별 의미는 없지만 그저 편안한 대화.

간간이 터지는 웃음.

저녁이 되자 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까지.

이런 걸 완벽한 식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우리만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흩어져 갔다.

오늘은 위장뿐만 아니라, 마음도 충만하게 채운 그런 하루였다.

* * *

한여름에는 다들 축축 처지기 마련이다.

시장에 장을 보러 온 사람들도 가게에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도 모두.

그리고…… 축축 처지는 건 사람뿐만이 아닌 것 같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액체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바닥에 붙이고 있는 고양이도 마찬가지로 축축 처지는 모양이다.

녀석이 집 근처에 등장한 건 한 달 전쯤부터였다.

고양이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아직 다 크지는 않은 듯한 녀석은,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를 관찰했다.

관찰?

그런 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나를 관찰한 게 아니라, 그저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들을 무심코 보고 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동물들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의 영역에 저들이 발을 들인 것이 아니라, 저들의 영역을 우리가 점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나는 어느 순간부터 녀석에게 사료를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쩍 경계하는 자세로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내 바로 앞에 사료 그릇을 놓아도 은근슬쩍 다가오는 녀석이다.

우걱우걱 사료를 먹고 있는 녀석의 뒤통수를 보자니 괜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녀석은 검정색, 황색, 흰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인데, 특이하게도 녀석의 뒤통수는 검정색과 황색이 절묘하게 반반씩 나뉘어 있다.

마치 누가 가운데에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그러니 그 뒤통수를 움직거리면서 사료를 먹고 있는 모습이 안 귀여울 수가 있겠는가.

“삼색이. 밥 다 먹어쪄?”

녀석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혀가 짧아진다.

“에옹.”

오오오.

드디어 대화까지?

아주 짧은 소리였지만, 이렇게 내 말에 응답을 해 준 건 한 달 만에 처음이다.

“맛있게 먹었다구?”

“에옹.”

“오…….”

내친 김에 손까지 슬쩍 뻗어 봤다.

하지만…… 이내 뒤로 물러서 안전 거리를 확보한 녀석.

그래도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아직 만지는 건 안 된다는 거지?”

“에옹.”

살짝 거리를 둔 상태에서도 내 말에 응답을 해 주는 녀석이 참 신기하고 귀여웠다.

“안 되겠다. 오늘은 말도 해 줬으니까 특별한 간식을 줘야겠다. 거기서 아까처럼 자고 있어. 금방 올게.”

* * *

삼색이를 위한 요리라…… 사실 고양이 요리는 처음이어서 마땅한 정보가 없었다.

괜히 주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혜승이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오빠. 뭐 해요? 브레이크 타임인데 쉬지도 않고.”

“아…… 그게…… 혹시 너 고양이 길러봤니?”

“고양이요? 음…… 꿈마을 마당에 자주 오는 애들이 있어서 거의 키우다시피 했죠. 근데 고양이는 갑자기 왜요?”

“오…… 잘됐다. 혹시 고양이는 뭐를 제일 좋아해?”

“고양이는……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좋아하고, 궁둥이 때려 주는 거 좋아해요.”

“아니, 그런 거 말고…… 먹을 거. 음식.”

“음식이요? 고양이하면 츄르죠. 츄르만 한 게 없어요.”

“아…… 그 짜 주는 거 말하는 거야?”

“네.”

“음…… 사 주는 거 말고…… 혹시 고양이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준다면 뭐가 좋을까? 고양이도 닭고기 같은 거 먹니?”

“닭고기요? 당연하죠. 아마 대부분의 고양이가 닭고기 좋아할걸요?”

“오! 잘됐다. 고마워!”

여름철이면 사람들은 삼계탕을 보양식으로 먹는다.

사람들도 기운 차리려고 먹는데 고양이도 닭고기 먹고 기운 차려야지.

이걸로 정했다.

삼색이를 위한 특별식.

바로, 고양이 닭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