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84화 (84/110)

#84화 가끔은 분위기도 따진다 (1)

해방촌.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인근에 위치한 이곳은, 19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월남한 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온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사격장으로 사용되었고, 육군형무소로 사용하다가 미군 관사로 사용되기도 했다는데…….

그런 건 뭐…… 몰라도 된다.

중요한 건…… 오늘날의 이곳 해방촌엔…… 맛집이 많다는 거다.

그것만 알면 된다.

해방촌의 맛집이라 하면, 특정한 음식을 꼽을 수는 없다.

카페, 고기집, 피자집, 전통 주점 등등…… 다양한 종류의 맛집이 즐비하다.

뭐 아무래도 용산이 미군과 연관된 지역이다 보니 미국 음식을 파는 곳도 많고.

오늘 맛집 투어의 목적지는 그런 미국 음식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을 파는 곳이다.

“안녕하세요.”

이초희가 지하철역 출구 아래에서 걸어 올라온다.

한 손에는 부채를, 한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이초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새 계절은 한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오늘 좀 덥죠?”

“네…… 언제 도착하셨어요?”

“방금요. 자, 갈까요?”

헉헉. 헉헉.

가뿐 숨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마에서부터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게 바로 해방촌 맛집들의 유일한 단점이다.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한다는 거.

길게 뻗어 있는 언덕길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 맛있는 걸 먹고 싶어? 그럼 노력을 해야지. 노오오오력을!

나야 팔각정을 오르며 단련이 된 몸이지만, 옆에서 걷고 있는 이초희가 슬쩍 걱정됐다.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웬걸.

숨을 조금 가쁘게 쉴 뿐, 꽤 편안해 보이는 표정의 이초희였다.

“오…… 안 힘들어요?”

“음…… 뭐, 이 정도는요. 부채도 있고, 여기 생수도 있고.”

“아…….”

근데…… 오늘 최고 기온이 36도다.

지금 시간은 오후 네 시로 완전히 뜨거운 햇볕은 좀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족히 30도는 훌쩍 넘을 거다.

이 정도가 괜찮다고?

“평소에 하루 세 시간씩 운동하거든요.”

“세 시간……이요?”

한두 시간 정도 매일 운동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데, 하루 세 시간?

이건 거의 운동선수 수준이잖아.

“혹시…… 운동선수 준비하는 건 아니죠? 느지막이…….”

말도 안 되게 먹어 대는 그녀의 식성과 하루 세 시간씩을 운동하는 습관.

완전히 운동선수의 그것 아닌가?

“푸흣. 운동선수라뇨. 이 나이에 무슨…… 뭐, 어렸을 때는 운동도 곧잘 하기는 했지만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렇게 운동해야…… 먹을 수 있거든요. 내가 먹고 싶은 만큼…… 운동 게을리하면 하루에도 몇 킬로씩 살이 쪄요.”

“아…….”

하긴, 당연하겠지.

그렇게 먹어 대는데…….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거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놀고 마음대로 자는 데도 저렇게 날씬한 몸을 유지할 수는 없는 거다.

선택과 집중.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는 대신, 다른 노는 건 포기한 이초희였던 거다.

달콤한 잠도, 쇼파 위에 누워서 TV를 보는 게으른 휴식도.

새삼 존경스러워지는데?

물론, 나도 평소에 이초희와 같은 생각이다.

맛있는 걸 죽을 때까지 먹으려면 그만큼 운동을 해서 몸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나보다 많이 먹고, 많이 운동하는 이초희가 몇 수 위인 것 같긴 하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버거집에 도착했다.

가게의 이름은 ‘이방인 수제 버거’.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뭔가 해방촌이라는 지명과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수제 버거와는 맞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확실한 건 뭔가 좀 있어 보이기는 한다는 거다.

전생에서도 브랜드를 내며 느꼈던 건, 뭔가 트렌디해 보이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들을 시도해야 한다는 거다.

이 해방촌은 그런 실험 정신 가득한 사장님들이 몰려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이 가게는 이삼 년 후쯤에는 훨씬 더 유명해진다.

지금은 덜 알려져서 그런지 일요일인데도 사람이 적지만.

날씨 탓도 있긴 할 거다.

이렇게 더운 한여름에는 사람들이 잘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니까.

우리같이 맛집에 진심인 사람들은 그런 건 개의치 않지만.

* * *

주문을 하는 순간은 언제나 머리가 복잡하다.

저 수많은 버거 중에 어떤 걸 골라야 하는가.

일반 버거인가, 더블 버거인가.

치즈 버거인가, 베이컨 버거인가, 둘 다인가.

세트를 시켜야 하는가, 감자튀김 대신 버거를 두 개 먹는 게 나은가.

이런 순간엔 나 아닌 누구라도 선택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는 거다.

인간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그런 면에서 이초희는 참 편하겠다.

적어도 이초희는 그런 선택 때문에 머리를 싸맬 걱정이 없다.

“안녕하세요, 손님. 주문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 저희 가게 패티랑 번(Bun)이 좀 많이 커요. 그러니 꼭 그거 감안해서 주문해 주세요. 여자분들에게는 특히 더블은 잘 권하지 않아요. 저희 사장님 장사 철학이 돈보다는 손님의 만족에 있거든요. 뭘로 하시겠어요?”

“…….”

밝은 미소의 점원의 말에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번이 크다고?

패티가 두껍다고?

감안해서 주문하라고?

오케이.

잘 감안해서 주문을 하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이초희가 먼저 나섰다.

“이방인 버거하고요.”

“네, 손님. 세트로 하시겠어요, 단품으로 하시겠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자분은 여기에 음료 하나만 추가하셔도…….”

“저 아직 주문 안 끝났는데요.”

이초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는 것.

오로지 먹기 위해 하루 세 시간씩 운동을 하는 그녀에게 메뉴를 주문하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근데 자꾸 저 점원이 훼방을 놓는 거다.

그것도 패티가 크다느니 번이 크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감히 누구 앞에서…… 하…….

“아메리칸 치즈 버거하고요. 아메리칸 치즈 버거 더블하고요. 베이컨 치즈 버거, 모짜렐라 치즈 버거, 멕시칸 버거. 세트는 하나만 해 주세요. 아, 그리고 사이드는 나쵸하고, 치킨 윙. 음료는 리필 되죠?”

“…네?”

“음료요. 탄산음료는 리필 되죠?”

“아, 아, 네, 네. 탄산음료는 리필 되죠. 근데…… 혹시 이거 포장이세요?”

이초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먹고 갈 겁니다.”

마치 말을 뱉어 내면서 씹어먹는 듯한 이초희의 발성.

더 이상의 질문은 생략한다……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

점원이 이초희의 기세에 확 눌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준비해 드릴게요. 위에 올라가셔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렇게 점원이 주문 전표를 들고 자리를 비우려는 순간.

“저는 아직 주문 안 했는데요.”

“네? 여자분이 다 하신 거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저건 저 여자분이 혼자 다 드실 거고요. 저는 따로 주문하겠습니다.”

점원이 눈이 버거 패티만큼 동그랗게 커졌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하고 속으로 생각하겠지.

앞으로 이 가게에서 이 멘트는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

저희 가게 햄버거가 번이 크고 패티가 커서……라는 멘트.

세상에는 규격 외 인간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이초희는 그 규격을 훌쩍 뛰어넘은 인간.

햄버거 먹기 대회에서 서른 개를 아무렇지 않게 먹은 인간이다.

초희가 아니라, 초인이다.

* * *

이곳의 시그니처 버거는 가게 이름을 단 이방인 버거이다.

어디를 가든지 처음 가 보는 집의 시작은 늘 시그니처 메뉴로 한다.

물론, 나야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그니처 버거 하나는 먹어 줘야 한다.

어차피 하나에서 끝낼 것도 아니니까.

수제 버거라고 하면 역시 좀 커야 한다.

패스트 푸드점의 버거들은 주문받아 나오는 순간 번을 꾹꾹 눌러서 최대한 얇게 만들어 먹는다.

패스트 푸드가 무엇인가.

빨리 나오고 빨리 먹는 음식 아니겠는가.

효율적으로 빨리 먹기 위해 버거를 눌러 주는 건 패스트 푸드와는 아주 어울리는 행위이다.

하지만, 수제 버거는 다르다.

한입에 먹기 버거울 정도로 커야 한다.

그 상태로 먹어야 한다.

입을 너무 크게 벌리다가 턱이 빠질 것 같은 두려움도 느껴야 하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는데도 겨우 끄트머리만 살짝 먹는 경험도 해야 한다.

너무 커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아까 점원의 말은 사실인 듯하다.

오랜만에 와서 나도 기억을 못 했었는데, 이 집 버거…… 진짜 크긴 크다.

다른 수제 버거집 버거들의 1.5배 정도?

크고 두껍고, 패티를 비롯한 내용물도 풍부하다.

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구워 낸 두터운 번 아래에는 먼저 홀그레인 머스터드 소스가 발려 있다.

살짝 찍어 먹어 보니 머스터드의 맛과 함께 단맛이 도는 것이 여러 재료들을 섞어서 이 집만의 소스로 만든 듯했다.

소스의 아래층에는 녹색 채소가 깔려 있다.

치콘이라는 채소인데, 이탈리아가 원산지다.

한국에서도 모듬 쌈밥집에서 흔히 애용되는 채소로써 잎에 살짝 장밋빛 색이 돌며 은은하게 쌉싸름한 맛이 난다.

색이 좋고, 양상추보다는 식감이 있으며 양배추보다는 연해서 샐러드용으로도 애용된다.

치콘의 아래에는 역시 두껍게 썰린 붉은 토마토와 살짝 구워 낸 양파가 깔려 있다.

그 아래에는 빛깔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하는 노란 치즈가 녹여져 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칸.

한우 소고기 패티.

이 집의 패티는 한우라서 그런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했다.

패티와 치즈만으로도 버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맛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패스트푸드 버거와 수제 버거의 질을 가르는 것은 바로 저 수제 패티이다.

“사장님,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 아니요. 뭐랄까.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제 버거가요?”

“네. 빵 모양은 동그스름하고 갈색빛이 도는 게 그냥 저 빵만 먹어도 맛있게 생겼고, 내용물들도 색이 참 조화로워요. 채소의 녹색, 토마토의 붉은색, 양파의 흰색, 치즈의 노란색, 패티의 갈색. 그렇지 않나요?”

“음…… 듣고 보니까 그렇긴 한데…… 그건 사장님이 버거를 커팅하셔서 보이는 거잖아요.”

“그렇죠. 너무 크니까. 커팅하면 먹기 편하잖아요.”

“에이…… 그건 진짜가 아니죠. 누가 수제 버거를 커팅을 해서 먹어요. 그리고…… 이 나이프랑 포크는 왜 주신대요? 누가 버거를 이런 도구를 써서 먹는다고.”

이 사람아…… 당신만 빼고는 다 나이프랑 포크 써서 먹어요.

수제 버거는 커서…… 당신만 빼고는 다 커팅해서 먹는다고요.

그리고…… 보통은 반씩 나눠 먹어요.

당신처럼 있는 버거 메뉴 하나씩 다 시키지 않고요.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마친 이초희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갑자기 공중에서 커다란 홀이 하나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홀로 이방인 버거가 빨려 들어간다.

커팅하지 않은 온전한 하나의 버거가.

덥썩.

다시 돌아온 버거는 커팅을 한 것처럼 이등분이 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초희의 입가엔 그 흔한 소스나 기름기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참 깨끗하게 잘 먹는다.

“자, 이거 봐요. 어차피 한입 먹으면 이렇게 이등분이 되는데, 뭐하러 귀찮게 그걸 잘라 달라고 해요. 일하는 분들도 힘들게.”

“흐흠…… 네, 네. 제가 잘못했군요. 흐흐흠.”

저 괴물과 햄버거의 크기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눠 봐야 뭐하겠는가.

애초에 체급이 다른걸, 체급이…….

이방인 버거를 벌써 해치우고, 아메리칸 치즈 버거에 손을 대고 있는 그녀는 그러라고 하고…… 나도 이제 맛을 봐야지.

와앙.

크게 입을 벌려 반으로 커팅된 버거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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