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83화 (83/110)

#83화 소울 푸드 묵사발 (2)

긴장 반, 설렘 반.

김흥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가 만든 요리도 아닌데, 이렇게 두근대는 이유는 뭘까?

이선우 사장이 만든 이 묵사발은 과연 어떤 맛일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예전의 그 도토리묵 맛이 날까?

에이, 그래도 기대하면 안 되겠지.

반면, 송은희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송은희는 묵사발에 담긴 묵을 숟가락으로 몇 점 떠서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호로록.

입을 움직여 삼킨 송은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 숟갈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송은희.

입에 있는 음식을 다 넘긴 송은희가 말했다.

“교수님, 이거 진짜 도토리묵은 아닌 것 같네요. 안타깝게도.”

“…….”

김흥범은 묵묵부답.

그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도토리묵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오물오물.

그의 입놀림은 매우 느리면서도 정성스러웠다.

마치 입속에 들어있는 도토리묵의 질감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음미하려는 것처럼.

입안에 있는 걸 넘긴 김흥범은 다시 숟가락을 그릇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다시 한 입.

또, 한 입.

김흥범의 말을 기다리던 송은희도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오직 후루룩, 오물오물 하는 묵사발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결국 말 한 마디 없이 한 그릇의 묵사발을 다 비워 낸 김흥범.

그의 얼굴에서는 만족인지 불만인지 모를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송 조교. 이게 진짜 도토리묵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

“음…… 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제가 알기로 진짜 도토리묵은 되게 쓰고, 텁텁하고, 떫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도토리 성분을 많이 쓸수록 말이죠. 도토리가 원래 쓰고 텁텁하잖아요.”

“후후. 맞아. 도토리는 원래 쓰고 텁텁하고 떫지. 그런데…… 이 도토리묵은 진짜 도토리묵이 맞아. 백 프로 도토리 전분으로 만든.”

“네? 진짜요?”

송은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흥범은 선우가 있는 주방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몇십 년 전이라면, 송 조교의 말이 맞아. 실제로 그때의 도토리묵은 쓰고, 텁텁하고, 떫었어. 그때는 도토리묵이 이런 별식이 아니라, 식량이었거든.”

“식량이요? 그러니까, 밥 대신 먹었다는 말씀이시죠?”

“맞아. 특히 내 고향 강원도 태백에서는 더 그랬어. 온통 산으로 가득하니 도토리가 맺히는 상수리 나무는 많았어. 대신 논과 밭이 없으니 쌀은 부족했고. 그래서 이 도토리로 떡도 만들어 먹고, 국수도 만들어 먹었지. 식사 대용이었으니까.”

“아…….”

“먹을 게 없어서 도토리로 음식을 만들다 보니, 속껍질 같은 건 벗겨 내지도 않았어. 먹을 게 부족하니 그런 것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던 거지. 도토리 속껍질에서 송 조교가 말한 텁텁하고, 떫은맛이 나는 거거든.”

“그렇군요. 그러니까…… 그 속껍질까지 같이 가루로 만들어 내면 텁텁한 맛이 나는 거군요. 그럼 이 도토리는…….”

“다 벗겨 낸 거야. 그리고, 가루를 내고 나서도 몇 차례 더 걸러 냈을 거야. 곱고 고운 가루를 만들기 위해.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탱글탱글하면서도 찰지고 부드러운 묵이 나오지 않거든.”

“오…… 그런 거였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송은희는 다시 한번 의문이 든 표정으로 김흥범을 바라봤다.

“근데, 교수님. 그러면 이건 교수님의 소울 푸드는 아니겠네요? 아무래도 교수님은 떫고, 텁텁하지만 예전의 그 껍질까지 같이 갈아 만든 도토리묵을 많이 드셨을 거 아니에요?”

“후후후. 아니. 이건 내 소울 푸드가 맞아. 아주 완벽할 정도로.”

“엥, 진짜요?”

“응. 송 조교. 사람이 잘 변하는 거 같아, 안 변하는 거 같아?”

“사람 잘 안 변하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걸 느껴요. 앗, 죄송합니다. 교수님 앞에서…….”

“아니야, 아니야. 맞는 말이지. 사람 잘 안 변해. 나도 마찬가지이고. 그럼 생각해 봐. 자칭 미식가에 입 까다로운 내가 어렸을 때는 어땠을 것 같아?”

“음…… 설마 엄마한테 반찬 투정하고, 맛없으면 안 먹고…… 뭐 그런 아이셨나요?”

“정답! 송 조교가 말한 그 텁텁하고 떫은 묵은 어머니가 주셔도 먹지를 않았지. 다른 먹을 건 없고…… 뭔가 먹이긴 해야겠는데, 방법이 없던 어머니는 내가 먹을 것만 따로 껍질을 다 까고, 곱고 고운 가루를 내서 묵을 만들어 주셨어. 딱 이 도토리묵처럼. 탱글탱글하고, 부드럽고, 찰지고 고소한 이 맛처럼.”

김흥범의 머릿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루 종일 할 일이 가득한 시골에서도 자식을 먹이겠다고 도토리 속껍질을 일일이 까던 어머니의 그 투박한 손이 떠오른다.

안 먹는다고, 입을 앙다문 채로 떼를 쓰던 그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어 주시던 어머니의 그 도토리묵이 떠오른다.

오물오물.

다른 묵과는 맛이 달랐던, 탱글탱글하고, 찰지고, 고소했던…… 오직 그를 위해 어머니가 만들었던 도토리묵의 그 맛이 떠오른다.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박물관의 유물처럼 그의 기억 속 저장고의 오래된 추억으로만 기억될 거라 생각했던.

바로 그 도토리묵의 맛을 지금 여기서 느낄 줄이야.

* * *

“맛있게 드셨어요?”

“…뭐라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네? 혹시 맛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아니요.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이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군요. 너무 맛있었습니다. 아니…… 맛있었다는 표현은 부족하군요. 오늘 음식으로 제 영혼이 풍성해졌습니다. 정말로…… 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김흥범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영혼이 풍성해졌다?

요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없는 칭찬이지만,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이유로 겨우 이 묵사발 하나가 김흥범의 영혼을 달래 줬을지.

“교수님, 혹시 어떤 점이 그렇게 교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건가요?”

“아…… 사실…… 제 소울 푸드가 바로 이 묵사발입니다. 아, 묵사발이라기보다 도토리묵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군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아…….”

“오늘 맛본 도토리묵에서 어머니가 해 주셨던 그 도토리묵과 똑같은 맛을 느꼈습니다. 사실 오늘 메뉴가 묵사발인 걸 보고,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내심 의심도 했죠. 아무리 선우네 백반이지만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도토리묵은 맛보지 못할 거다, 라고요.”

김흥범의 의심이 이해된다.

도토리 전분만으로 만든 도토리묵은 이런 백반집에서 낼 수 있는 메뉴가 아니다.

시간도 많이 들고, 정성도 많이 필요하며, 재료의 가격도 만만치 않다.

우리도 화천의 이모가 주워 놓은 도토리가 없었다면, 이런 도토리묵은 불가능했을 거다.

“정말 놀랐습니다. 이렇게 묵을 만들려면, 도토리를 주워서, 속껍질까지 정성스레 벗기는 건 물론이고, 가루를 내고 나서도 몇 번이고 곱게 걸러야 합니다. 떫은맛을 낼지도 모르는 굵은 입자들은 다 버려야 하고요. 이게 진짜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사장님은 정말…… 다시 한번 저를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사실…… 강원도 화천의 이모께서 주워 놓은 엄청난 양의 도토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도토리만 있으면 나머지는 제 몸만 쓰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이렇게 교수님의 영혼을 울렸다면 그 고되고 긴 과정이 전혀 아깝지가 않네요. 오히려 보람이 가득 찹니다.”

“이 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더 감동적이군요. 아, 그런데 혹시…… 포장을 좀 할 수 있을까요? 묵사발 말고, 도토리묵만 좀 포장을 하고 싶습니다.”

“아…… 물론이죠. 가능합니다. 금방 싸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도토리묵을 받아든 김흥범은 여러 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반복하고 가게를 나갔다.

소울 푸드.

영혼을 달래 주는 음식.

수없이 많은 음식을 먹어 본 그에게도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해 주셨던 그 음식만큼은 못한가 보다.

감동을 받아 눈가가 촉촉해져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나저나 포장해 간 도토리묵은 누굴 위한 음식이었을까?

아내? 자녀들?

아니면…… 어머니?

* * *

주말 새벽.

김흥범은 홀로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아직은 어둑어둑한 서울의 한강을 지나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두세 시간쯤 달렸을까?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다다른 곳은 작은 봉분 앞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봉분 근처에 난 잡초들을 정성스레 뽑던 김흥범은 가져온 도토리묵을 제단에 놓고 정성스레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묵례.

“어머니, 아들 왔습니다.”

당연하게도…… 어머니에게서는, 아니 오랜 시간 어머니의 몸을 덮고 있던 봉분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 저 어렸을 때 기억나시죠. 까탈스러운 저 때문에 고생 고생하시며 도토리묵을 쑤어 주셨던 그때. 그때는 몰랐는데…… 그때는 어머니가 저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을지 몰랐는데…….”

매번 귀찮고 힘들었을 텐데도 어머니는 힘들다는 티 한 번 안 내셨다.

까탈스러운 놈이라고 욕 한 번 안 하셨다.

그저 묵묵히 그를 위해 도토리 껍질을 까고, 가루를 내리고, 오랜 시간 도토리 전분물을 저어서 묵을 만드셨다.

“어떻게 그렇게 티 한 번 안 내셨어요. 저는 지금도 제 애들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저 버럭 화를 내는데…… 반찬 투정하면 배불러서 그런 거라며 먹던 밥도 뺏어 버리는데…… 어떻게 어머니는…… 그런 시절에도 한 번도 저에게 화를 안 내셨어요. 차라리 제 등짝이라도 한 번 때려 주시지. 그렇게 참지 마시고, 소리라도 한 번 지르시지. 그렇게 좀 표현하면서 사시지…….”

십 년 전, 어머니는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이제 김흥범도 슬슬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길 즈음이었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 싶지만, 바람이 가만히 두지를 않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제야 자리를 잡았는데, 이제야 효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딱 그때 어머니는 그의 곁을 떠나 버리셨다.

속병이 깊으셨을 거다.

그래서 암도 생기셨던 거고.

어머니는 좀처럼 누구에게 화도 내지 않고, 좀처럼 아픈 걸 내색하지도 않는 그런 분이셨으니까.

그런 게 다 속으로 곪은 거다.

그러니 그냥……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마음대로 하고 사시지…… 그렇게 사시지…….

“언젠가는 한 번 먹여 드리고 싶었어요. 사실은 직접 만들어 드리고 싶었는데…… 못난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를 못했네요. 대신에 저보다 훨씬 더 멋진 친구가 저 대신 이걸 만들어 줬네요. 자, 좀 드셔 보세요. 진짜 도토리 가루로 만든 진짜 도토리묵. 그 옛날 어머니가 제 입에 넣어 주셨던 그 도토리묵이요.”

김흥범은 접시에 담겨 있는 묵을 손가락으로 한 점 집어 올렸다.

봉분을 향해 도토리묵을 집어 든 손을 뻗었다.

마치 어린 시절, 안 먹겠다고 고집부리던 그의 입에 도토리묵을 밀어 넣어 주셨던 어머니의 그 투박한 손처럼.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잡고 있어도 도토리묵은 그대로였다.

그 마음만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해졌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도토리묵을 먹던 김흥범의 영혼이 울렸을 때, 그때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마음도 찡- 하고 울렸을 거다.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 아무리 멀리 있어도 전해진다고…… 그렇게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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