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82화 (82/110)

#82화 소울 푸드 묵사발 (1)

김흥범은 고민에 빠졌다.

‘소울 푸드’를 주제로 한 칼럼을 의뢰 받았는데, 문제는 그 소울 푸드를 맛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거다.

기억과 추억만으로 글을 쓰기에는 생동감이 너무 떨어질 듯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흥범에게 소울 푸드란 그 음식밖에 없다.

마침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그 요리.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셨던 그 음식.

김흥범은 포털 사이트를 열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 묵사발 맛집

여러 가게가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가 이미 김흥범이 한 번쯤 다녀왔던 곳이었다.

맛집이라고 이름나 있던 그 가게들은 전부 그의 기준에는 못 미쳤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해 주셨던 그 맛이 안 난다는 것뿐.

그렇게 스크롤을 내리던 김흥범은 게스트북 페이지 하나를 발견했다.

<오늘의 메뉴>

- 묵사발

- 메밀전

- 부추무침

- 김치

바로 선우네 백반의 공식 페이지.

“어라? 이런 우연이?”

오늘따라 선우네 백반의 메뉴가 묵사발인 건 우연인 걸까, 필연인 걸까.

다만…… 그리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이선우 사장이 늘 김흥범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긴 하지만, 소울 푸드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만들어 주셨던…… 도토리 가루만으로 만든 그 쌉싸름한 도토리묵.

그걸 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

일단, 도토리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가정집에서 한 번 먹으려면 상관없겠지만, 여기는 하루에도 엄청난 손님이 왔다 가는 백반집이다.

장사나 안 되면 모를까.

요새는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웨이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김흥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가능하지. 그 도토리묵 같은 맛을 내기에는…….”

잠깐 생겨났던 기대를 접는 김흥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은 한 번쯤 보고 싶었다.

어차피 다른 도토리묵을 파는 데도 마땅한 데가 없고.

어머니의 도토리묵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선우네 백반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다 보면 비슷한 영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교수님, 혹시 식사 안 하세요?”

“어, 송 조교. 안 그래도 가려던 참인데 우리 같이…… 아, 아니다.”

말을 얼버무리는 김흥범.

사실 오늘은 오랜만에 켄터키 총장님을 벗어나 식사를 하는 날이다.

비서로부터 총장님이 회의가 있다는 얘기를 전달받고 어찌나 마음이 홀가분하던지…….

그러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송은희 조교의 마음이 이랬었구나.

나와 같이 밥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소 서글프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졌다.

웬만하면 조교들이랑 같이 밥을 먹지 말자고.

후배 교수도 아니고, 조교들이면 학과장인 내가 또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한편, 송은희 조교는 요새 내심 불안해졌다.

일주일에 최소 한두 번은 김흥범과 식사를 했는데, 요새는 통 학과장님이 부르지 않는 거였다.

총장님이랑 식사를 하지 않는 날에도 약속이 있다면서 혼자 나가시곤 했다.

같이 밥을 먹을 땐 너무 부담스러웠는데, 그게 뚝 끊기니까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괜히 찍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사실 학과장님과의 식사는 조금 즐겁기도 했다.

언제나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시니 늘 맛있는 밥을 먹었고, 음식을 대하는 자세나 관련 지식도 많이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늘 용기내서 학과장님 방문을 두드리게 된 송은희였다.

“방금 같이 식사하자고 하신 거 아니셨어요?”

“아, 그게…….”

“같이 가요, 교수님. 오늘 선우네 백반 어떠세요?”

“음…… 그럼 그럴까? 오케이. 갑시다.”

어차피 선우네 백반에 갈 생각이었던 김흥범.

뭐, 나도 가는 길, 송 조교도 가는 길이었으니까.

오랜만에 한 끼쯤 같이 먹는 건 괜찮겠지.

대신 최대한 편하게 대해 주면 될 거야.

* * *

도토리묵을 쑤는 일은 그 자체로 수행이다.

왕도 따위는 없다.

그저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 천천히 저어 주는 것.

그게 도토리묵을 쑤는 가장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

선우네 백반의 전 직원들은 다들 불 앞에 서서 도토리묵을 젓고 있었다.

“선우야. 이거 언제까지 저어야 해?”

“왜요? 팔 아프세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끄응.”

“팔 아프신가 보네요. 가만 있어 보자. 오. 지금이에요, 지금!”

“진짜? 이제 그만 저어도 되는 거야?”

“아니죠. 이제 불을 중불로 줄여 주세요. 거기 옆에 있는 소금도 넣어 주시고요. 손은 계속 저어 주시고요.”

“아…….”

확 펴졌던 아버지의 인상이 다시 구겨졌다.

소금을 넣고도 한참을 더 저어야 했다.

묵의 색깔이 진한 갈색을 띨 때까지.

한눈에 보기에도 도토리묵의 색이라고 느껴지는 순간까지.

그렇게 색이 변하면 들기름을 살짝 넣어 준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며 고소한 냄새가 확 풍긴다.

묵을 젓던 주걱을 들어 적당한 점도가 생긴 걸 확인하면 불을 끈다.

뚜껑을 덮어 3분 정도 뜸을 들여 주고, 넓은 쟁반에 묵을 옮겨 담아 식혀 준다.

묵을 붓기 전에 참기름을 골고루 발라 주면 나중에 떼어 낼 때 수월하다.

넓은 쟁반 위에서 한 시간 정도 식혀 준 묵은 탱글탱글한 탄력이 살아 있다.

도토리묵 외에 다른 가루를 첨가했을 때는 잘 느끼기 어려운 그런 탄력이다.

식은 도토리묵은 묵사발용과 반찬용을 따로 나눈다.

묵사발용은 굵게 채를 썰어 주고, 반찬용은 두부 모양으로 네모나게 썰어 준다.

그렇게 서너 개의 쟁반의 묵을 다 썰어 주면 진짜 도토리묵 완성.

묵만 만들어 놓으면 묵사발은 사실 간단한 음식에 속한다.

다시마를 우려 낸 육수를 냉장고에 차갑게 식혀 둔다.

오이는 묵과 함께 채를 썰어 준비해 준다.

마찬가지로 채를 썬 김치는 설탕과 들기름으로 밑간을 해 조물조물 무쳐 준다.

이때 김치는 신 김치를 써 주는 게 좋다.

차갑게 식힌 육수에 간장, 소금, 설탕, 식초를 넣어 간을 해 준다.

미리 준비해 둔 묵, 오이, 무친 김치를 육수에 부어 주고, 얼음을 몇 개 띄워 주면 간단한 묵사발 완성.

여기에 밥을 넣어 함께 먹으면 바로 묵밥이 된다.

“민호 삼촌! 메밀가루 좀 물에 풀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묵사발과 함께 곁들일 메뉴는 바로 메밀 전병.

어쩌다 보니 강원도 요리 특집이 되어 버렸다.

뭐, 음식이라는 게 하나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음식들이 있다.

묵사발과 메밀전병은 그런 관계였다.

삼겹살과 소주, 떡볶이와 김밥처럼.

팬에 잘 풀어 낸 메밀가루를 두르고 얇게 부쳐 낸다.

메밀전의 크기는 작은 것보다 큰 게 좋다.

그래야 안에 들어갈 소를 넣고 말기가 편하니까.

그렇게 부쳐 낸 메밀전에 당면, 김치, 부추, 두부 등의 재료를 양념에 무친 소를 넣고 둘둘 만다.

김밥처럼 만 전병을 역시 김밥 크기로 잘라 두면 메밀전병 완성.

자, 오늘은 또 어떤 손님들이 가게를 찾아올까?

아무래도 메뉴의 특성상 시장의 어르신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을 것 같은 오늘이다.

* * *

역시나 오늘 손님들의 대다수는 어르신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니…… 어디서 이렇게 쌉싸름하고, 탱글탱글한 묵을 쑤어 왔어? 아주 별미네, 별미!”

“으아…… 이건 완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쑤어 주셨던 그 묵 맛인데? 이건 시중에서 파는 묵이 아니야, 절대.”

“아니…… 이 집은 도대체 만날 무슨 요술을 부리는겨? 이건 완전 도토리묵 전문집에 가서도 못 먹는 맛인디?”

황종훈 아저씨는 요즘 흥분했다 하면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서울 와서 사투리를 고치려고 그렇게 애를 쓰셨다는데…… 개인적으로는 계속 사투리를 쓰시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괜히 더 정겹게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의 동양학 박사 정인태 형이 묵사발 같은 메뉴를 놓칠 리가 없다.

“선우 동생. 혹시 설사하는가?”

“네? 밥집에서 무슨 설사 얘기를…….”

“다 이유가 있네. 동의보감에 말이야. 도토리는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쓰며 떫고 독이 없다고 했어. 설사와 이질을 낫게 하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살을 오르게 한다고 했지. 예전에는 이 도토리 가루를 설사병이 날 때 쓰려고 상비약으로 구비해 놓기도 했어.”

“아…….”

역시 오늘도 동의보감에 나온 귀한 얘기들을 형 덕분에 알게 되었다.

다소 뜻밖의 손님도 있었다.

바로 정은이와 그 동생들.

어린이날에 짜장면을 먹고 갔던 그 아이들이 다시 가게를 방문해 준 거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아저씨 잠깐만 귀 좀 빌려주세요.”

“귀?”

허리를 숙여 귀를 갖다 대자, 정은이가 귓속말을 했다.

- 원장님이 배고프면 여기 와서 밥 먹어도 된다고 해서요……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아이답지 않은 정은이의 말에 순간 울컥할 뻔했다.

- 죄송하다는 말 하지마. 그리고, 언제든지 여기 와서 밥 먹고 가. 매일 와도 돼.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먹어. 알았지?

정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정은이가 온 건 반가운데…… 메뉴가…… 안습이다.

아이들에게 도토리묵사발?

일단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혜승아. 어제 반찬으로 나갔던 돈까스 남았어?”

“아…… 네, 그거 몇 개 있을 거예요.”

“휴……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나는 고갯짓으로 정은이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혜승이는 단번에 눈치를 챘다.

“바로 튀길게요.”

“그래. 콘옥수수도 잔뜩 담아 줘. 애들 좋아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이들이 나가고, 이번에도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김흥범 교수와 송은희 조교.

“두 분이 같이 오신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아…… 그렇죠. 계속 켄터키…… 아니, 총장님…… 송 조교. 우리 총장님 성함이 뭐였지?”

“아…… 그게…… 켄……터키는 아니고…… 죄송합니다. 다들 켄터키라고 불러서…….”

역시, 나만 켄터키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하긴…… 그 외모에서 켄터키 할아버지를 떠올리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이름 같은 게 뭐 중요한가요! 어서 자리에 앉으시죠. 묵사발 금방 시원하게 내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김흥범은 시원한 보리차를 홀짝거리며 송은희에게 물었다.

“송 조교. 그때 소울 푸드가 쭈꾸미라고 했지?”

“네. 맞아요. 아…… 쭈꾸미 철이 지나서 너무 아쉬워요.”

“그렇겠네. 이제 알이 가득 벤 쭈꾸미를 먹을 수 있는 철은 지났으니…….”

“네…… 참, 교수님 소울 푸드는 어떤 거예요?”

“나? 이게 참 우연의 일치인데, 바로 묵사발이야. 도토리묵으로 만든 묵사발.”

“오…… 그럼 오늘 소울 푸드를 드시는 날이군요!”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어머니가 어린 시절 만들어 주신 그 묵사발 맛을 오늘 볼 수 있을지…….”

“아…… 그런 묵사발이라면 아무래도…….”

“쉽지는 않겠지?”

송은희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김흥범의 소울 푸드, 묵사발이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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