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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행복 식당-76화 (76/110)

#76화 김치말이 국수 (3)

이북식 녹두지짐은 피자처럼 두껍게 만드는 게 특징이다.

찹쌀가루를 섞지 않고, 오직 녹두만 갈아서 만드는 이북식 녹두지짐에는 간 돼지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두껍고, 고기가 들어가니 언뜻 느끼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묵은 김치, 숙주나물, 고사리 등의 부재료가 자칫 느끼할 수도 있는 지짐이의 맛을 깔끔하게 잡아 주니까.

녹두는 하루 정도 충분하게 불린 후 껍질을 벗겨 낸다.

껍질을 벗긴 녹두를 구해도 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할머니를 위한 내 정성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잘 불려서 껍질을 깐 녹두를 믹서에 넣고 곱게 간다.

김치는 속을 털어서 준비하고, 고사리와 숙주나물은 물에 한 번 데쳐 낸 후 물기를 잘 털어 낸다.

고명으로 쓸 대파, 고사리는 길쭉하게 썰어 놓는다.

간 녹두에 준비한 돼지고기와 숙주나물을 넣고 잘 섞어 준다.

이제 그야말로 지짐이를 기름에 지질 시간이다.

약불로 달군 프라이팬에 돼지기름을 넣어 녹인다.

식용유 대신 돼지기름을 쓰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식용유가 없던 할머니의 어린 시절에는 돼지기름을 써서 녹두지짐을 부쳤으니까.

최대한 그때의 느낌을 내보려고 하는 거다.

그리고…… 돼지기름이 식용유보다 더 맛있다.

건강에는 뭐…… 조금 더 안 좋을지 모르겠으나.

도긴개긴이지 뭐.

동물성 기름이나 식물성 기름이나 튀기면 다 똑같다.

팬에 반죽을 넣어 두툼하게 모양을 만들고, 천천히 익힌다.

녹두지짐은 너무 자주 뒤집지 말고 튀기듯이 부치는 게 좋다.

그래야 속에 있는 돼지고기까지 충분히 익는다.

아랫면이 익을 동안 윗면에 김치, 대파, 고사리를 모양을 잡아 얹어 준다.

아랫면이 지글지글 잘 익으면 그대로 뒤집어 준다.

고명이 얹어진 윗면까지 갈색으로 예쁘게 익으면…… 이북식 녹두지짐 완성.

* * *

선우네 백반 건물 옥상.

할머니를 이리로 모시고 올라왔다.

백반집에 있는 승냥이들에게 녹두지짐을 들켰다가는…… 남아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물론, 그들도 소중한 단골들이지만…… 그래도 이 녹두지짐은 할머니만을 위한 특별 메뉴이니까.

“할머니, 오래 기다리셨죠? 짠. 여기 할머니를 위한 특별 메뉴 나왔습니다.”

“오…… 이건 녹두지짐 아니니?”

“네, 맞아요. 할머니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받아드셨던 그 녹두지짐…… 은 아니겠지만, 최대한 흉내 내 봤어요.”

“아이고…… 이 귀한 걸…….”

“귀하긴요. 요새는 녹두 구하기가 얼마나 쉬운데…….”

“그렇지. 맞아. 요새는 녹두도 구하기 쉽고, 돼지고기도 구하기 쉽지. 하지만, 예전에는 전혀 아니었어. 이 지짐이는 잔칫날에만 어쩌다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는 그런 귀한 음식이었어.”

말을 마친 할머니가 젓가락을 움직였다.

바스락.

지짐에 젓가락이 닿는 소리부터 벌써 고소했다.

할머니는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여 정성스레 떼어 낸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셨다.

오물오물.

어느새 뜨거운 해도 산등성이 너머로 지고 있었다.

해가 지니 어디선가 살랑살랑 바람도 불어오고.

이 집에 오래 사셔서 그런가?

평상 위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

할머니의 실루엣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까지 그냥 그대로 할머니 같았다.

천천히 지짐을 씹던 할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천천히 떼어 낸 한 조각을 정성스럽게 드시는 할머니.

그렇게 녹두지짐 한 장을 다 드신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참…… 맛있구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남들 모르게 입에 한 조각 넣어 주셨던 그 맛이야. 따뜻한 채로 먹이려고 어찌나 달려오셨던지 숨을 헉헉 몰아쉬시면서 내 입에 넣어 주셨던 그 맛. 그 맛이 나는구나. 고맙다, 선우야. 다시 한번, 고마워.”

“아니에요, 할머니. 제가 영광이죠. 할머니의 어린 시절에 그 맛을 느끼셨다니.”

할머니가 지는 노을빛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참 착하구나. 착해. 어찌 이리 착하고 예쁠꼬.”

“에이…… 저 별로 안 착해요.”

진짜 그건 사실이다.

전생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악귀처럼 살았었으니까.

위에 있는 놈들 바짓가랑이 붙들어 내리고, 올라오는 놈들 머리를 짓밟아 가면서.

누가 다치는지, 누가 아픈지, 누가 죽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위만 보며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니 남는 건…… 화려한 성공 뒤에 빛바랜 공허함이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추억을 되새기며 고마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커다란 뿌듯함을 느낀다.

음식을 통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감동을 주는 일.

전생에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녹두지짐을 먹다 보니까 하나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는구나.”

“재미있는 일이요?”

“응. 지금 사는 영감하고 관련된 일. 호호호.”

한 번 크게 웃으신 할머니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영감을 만났는데…… 빈대떡집을 가자고 하는 거 아니겠니? 근데…… 북한에는 빈대떡이라는 말이 없거든. 빈대는 있지만.”

“아…… 그럼 빈대떡을…….”

“빈대로 만든 떡이라고 생각하지 뭐냐. 호호호. 그래서 웬 이상한 사람이다 싶어 집으로 가 버리려고 했었지.”

“아…….”

서로의 말이 다른 데서 왔던 오해였나보다.

할머니는 그때 생각이 났는지 한참을 더 웃으셨다.

“그래도 말이야…… 영감이 저리 거동을 잘 못 해도…… 영감 만나서 지금까지 잘 살았지. 남쪽에 가족이라고는 돌아가신 오빠밖에 없던 내가. 진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내가…….”

“음…… 여기에서 새로운 가족을 이루신 거네요.”

“그렇지. 그리운 가족들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나랑 영감이 일군 새로운 가족들도 그만큼 소중하니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고 했던가.

할머니는 북한에 있는 가족을 잃는 대신, 남쪽에서 새로운 가족을 일구어 평생을 사셨다.

어느 쪽이 더 소중한가.

사실 이런 문제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할머니는 그저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낯선 땅에서 살아오신 거다.

그 과정에서 이뤄 낸 가족도 소중하고……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저 너머 북한에 있을 가족도 소중한 거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추억이 없는 사람이다.

김치말이 국수와 녹두지짐에 얽힌 빛나는 추억을 갖고 계신 할머니는…… 돈이 없어도 부자인 거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갓물주셨던 할머니에게 돈이 없을 리는 없지만.

오물오물 녹두지짐을 드시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한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잃어버렸던 할머니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실 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언젠가는요.

* * *

헉헉. 헉헉.

오랜만에 팔각정에 뛰어오르는 길.

이런저런 핑계로 요새 운동을 소홀히 했다.

날씨가 덥다는 핑계.

밥을 너무 많이 먹었다는 핑계.

너무 피곤하다는 핑계.

그랬더니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십 대의 몸도 무거움을 느끼긴 하는구나.

갑작스런 느낌이 생소했다.

돌아오기 전에는 저녁만 되면 몸이 무겁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었는데.

물론, 그렇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후아…….”

팔각정까지 오르자 나도 모르게 커다란 숨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느껴지는 성취감과 뿌듯함.

운동은 이 맛에 하는 거지.

벤치에 앉아서 마저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웬 좀비 같은 사람이 몸을 휘청대면서 뛰어 올라오는 게…… 아니 기어 올라오는 게 보인다.

가서 좀 도와줘야 하나?

아니지…… 진짜 좀비 아니야, 저거?

나도 과거로 돌아온 마당에 영화에만 존재하던 좀비가 현실에 없으리란 법이 있는가.

저 비틀거리며 흐느적대는 폼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다.

가녀린 체형이 여성 좀비로 보이는 그 형체는 끝까지 몸을 휘청이면서 팔각정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대로 벤치에 누워 가쁜 숨을 헐떡였다.

아니다.

저건 헐떡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최대 심박수를 넘어 한계치에 도달한 것 같다.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하늘까지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좀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왠지 엮이고 싶지 않은 그 형체를 지나쳐 밑으로 내려가는데…….

“무…… 무울……!”

어라.

물을 달라는 건가?

피가 아니라 물을?

괜히 모골이 송연해져서 모른 체하고 가려는데…… 힐끗 보이는 옆눈으로 그 형체의 존재가 힐끗 보였다.

저, 저건…….

“어라. 윤희선 너 좀비였어?”

아니지.

그러니까……··.

“좀비 같았던 네가 윤희선이었어?”

이것도 좀 이상한데?

“야, 무슨 좀비 같은 소리 그만……하고…… 그거…… 그거 좀 내놔.”

“이거?”

내 왼손에 들려 있는 물병을 말하는 듯했다.

천천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병을 벤치 위에 얹어 두고 다시 빠르게 좀비의 공격 반경을 벗어났다.

윤좀비는 물병을 낚아채듯 집어 들더니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벌컥, 벌컥. 꾸울꺽.

거의 가득 찼던 물병이 순식간에 빈 병이 되었다.

피 대신…… 물을 들이켜는 걸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좀비, 아니 희선이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네가 웬일로 운동을 다 하냐?”

윤희선은 전형적으로 타고난 체력만 믿고 운동을 안 하는 그런 애였다.

그 타고난 체력이란 것도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다 써 버린 지 오래인 듯하고.

“다 이유가 있지, 인마. 헤헤.”

녹초가 되어 버린 몸과 다르게 희선이의 표정은 밝았다.

최근에는 이렇게 밝은 표정을 마주한 적이 없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

“왜? 나는 좋은 일 있으면 안 되냐?”

“아니…… 표정이 좋아 보이길래.”

“후후…… 나…… 부모님께 허락받았거든.”

“뭐?! 진짜?!”

“그래, 인마! 이 누나가 이제 드디어 경찰이 되는 거라고!”

“오…… 축하한다! 진심이야, 이건!”

“헤헤. 고마워. 너한테는 정식으로 따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밥 한 끼 하면서.”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까지. 그냥 이렇게 알았으면 된 거지. 그런 부담 느끼지 마라. 괜히 손발 오그라든다.”

“자식이 밥 사 준대도 싫다고 하네? 됐어, 인마.”

“야, 내가 언제 밥 사 주는 게 싫다고 했냐. 그런 부담 느끼지 말라고 했지.”

“그 말이 그 말이지.”

티격태격.

투닥투닥.

동네 소꿉친구 사이끼리만 할 수 있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악의 없는 투닥거림.

이런 게 바로 동네 친구를 사귀는 맛이지.

“그래서…… 체력 기르려고 운동 시작한 거야?”

“응. 필기시험은 임용고시 준비하듯이 하면 되니까 자신 있는데…… 체력 시험은 영 자신이 없어서. 아…… 나도 어렸을 때는 계주 반 대표도 나가고 했었는데.”

“몸도 안 쓰니까 녹스는 거지…… 그래도 지금부터 준비하면 문제없지 않을까?”

“문제는 없는데…… 아, 문제가 있지. 제한 시간이 일 년이거든.”

“일 년?”

“응. 일 년 안에 합격 못 하면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어.”

“아…….”

일 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희선이 어머님인 영숙 이모의 마음도 뭔지 알 것 같다.

혹여 딸이 경찰 시험에 떨어져도 원래 하고 있었던 임용고시를 다시 준비할 수 있도록 하려는 생각이셨을 거다.

나름 이모의 플랜 B인 거지.

일 년 안에 최대한 승부를 볼 수 있게끔 희선이를 채찍질하는 효과도 있을 거고.

“너 무지 바쁘겠구나.”

“바쁘지. 일 년 안에 합격하려면 진짜 엉덩이에 피날 정도로 공부해야 해. 체력 시험에서 안 떨어지려면 이렇게 꾸준히 체력도 길러야 하고.”

“그래.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내.”

“그래야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럼, 그럼. 참…… 공부는 어디서 해?”

“학원 다니는 시간 외에는 근처 도서실에서 하루 종일 있어.”

“밥은?”

“한 끼는 대충 씨리얼 같은 걸로 때우고, 한 끼는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고.”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때우기만 하네? 음…….”

“잘 챙겨 먹으려 해도 시간이 아까워서…….”

그럴 만도 하다.

밥 먹을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보고 싶을 테니까.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꼭 잡고 싶을 테니까.

그래도…… 밥은 잘 먹고 다녀야지.

“야, 내일 학원 가기 전에 가게 좀 잠깐 들러라.”

“가게? 야, 나 씻고 학원 가기도 바빠.”

“잔말 말고 들러. 그럼 내일 보자.”

윤좀비에게 손을 흔들며, 서둘러 팔각정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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