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73화 (73/110)

#73화 대파 제육볶음 (3)

“내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거든…….”

이후로 이어진 그의 이야기.

책을 좋아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수한 책을 읽어 왔다.

그의 왕성한 책 읽기는 학습 능력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또래의 친구들보다 문해력이 수배 이상 뛰어났으니까.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언어 감각도 좋아서 영어 같은 과목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뭐, 수학, 과학 같은 과목에서는 평범한 성적을 내는 데 그쳤지만.

대신 국어, 영어를 공부할 시간에 미친 듯이 수학, 과학을 공부하니 그가 동경했던 한국대 철학과에 진학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다들 취업을 고민할 때쯤.

정인태의 머릿속에 다른 길은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업에 가서 이익을 내는 데 온몸을 바칠 톱니바퀴가 되는 건, 그에게 맞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학원에 갔고, 석사, 박사를 취득했다.

대학원 내에서도 견디기 쉽지 않았던 불합리함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인태는 잘 버텨 냈다.

무엇보다 그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다른 것들을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학업을 마치면 이제 모든 게 잘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학업을 마치고 나니 그에게 남은 건 이 시간 강사라는 자리 하나뿐이었다.

언제 교수가 될지, 아니, 교수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를 불확실하고 허울 좋은 자리 하나만이 그에게 남은 거다.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후회라…… 아니, 아닌 것 같아. 난 누가 뭐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니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있지.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커녕 두 분에게 짐이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짐?

아니다.

그가 알고, 내가 아는 것처럼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왔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 자리까지.

그런 그가 스스로를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을 거다.

“아이고…… 술 취해서 별 얘기를 다 했네. 오늘 내가 얘기한 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줘.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오랜만에 마셨으면…… 분명히 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거다.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 그의 마음에는 한마디 위로밖에 더 건넬 게 없겠지만, 오랜만에 마신 술에 뒤집어진 그의 속에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속은 풀고 가셔야죠. 명색이 음식점 사장인데, 그냥은 못 보냅니다.”

내 권유에 정인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침…… 정인태를 위한 안성맞춤의 재료가 있다.

얼마 전 짜장면을 맛보고 갔던 황종훈 아저씨의 제부 장진호가 며칠 전 택배를 보내왔다.

택배와 함께 손글씨로 적혀 있던 그의 편지.

- 나 기억하요? 그날 형님이랑 짜장면 맛나게 먹고 간 광주 사는 장진호라고 혀요. 그 맛에 내가 허벌나게 감동해 부러가꼬 이렇게 보답 차원으로다가 선물 좀 보내요잉. 거 서울말로다가는 뭐시라고 하는지 모르겄는디 여그서는 이걸 걍다리라고 부른당께. 거 술 좀 거나하게 마셨다 싶을 때 푸짐하게 넣어서 끓여 잡수쇼잉. 속이 그냥 확 풀려 버릴 테니께. 그럼 이만 들어갑니다잉.

어쩜 편지에서도 이렇게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할 수 있는 걸까?

그의 구수한 목소리가 완벽하게 음성 지원되는 듯했다.

걍다리.

갱조개라고 불리는 이것은 바로 재첩이다.

크기로 따지면 다 자라 봐야 겨우 2~3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소형 조개.

하지만, 그 맛은 커다란 조개들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특히 국으로 끓이면, 광주의 장진호 사장 말처럼 숙취에는 최고이다.

오죽하면 이 재첩국을 마시면 술을 안 먹은 속도 풀어 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재첩국 끓이기는 실로 간단하다.

미리 해감을 해 둔 재첩을 박박 문질러서 한 번 더 씻어 준다.

냄비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팔팔 끓인 후 재첩을 푸짐하게 넣어 준다.

국자로 저어 주면서 위로 뜨는 재첩 알맹이로 체로 건져 낸다.

이걸 여러 번 반복하면 껍데기는 없어지고, 재첩 알맹이만 고스란히 체에 남게 된다.

이후 맑은 국물만 다른 냄비에 따르고, 건져 놓은 재첩과 부추, 송송 썬 청양고추를 넣고 한 번 끓여 주면 완성.

“자, 교수님. 이거 좀 시원하게 드셔 보세요.”

“어라…… 이건…… 걍다리 아니야?”

“아, 맞다. 교수님 고향이 여수라고 하셨죠? 그럼 재첩국 잘 아시겠네요.”

“암, 알다마다. 이 걍다리는 섬진강에서 나는 게 최고인데…….”

“네, 바로 그 섬진강에서 난 재첩으로 끓인 국입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오…… 자, 한번 먹어 볼까.”

정인태의 숟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후릅.

후릅.

여러 번 국물을 떠먹은 그의 숟가락에 이번에는 재첩이 푸짐하게 얹어져 있었다.

오물오물.

왠지 우울해져 있던 그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와…… 이거다. 이거!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 아, 동생. 그거 알아? 동의보감에는 이 걍다리가 열기를 내리고 소갈을 그치게 하며 특히 지방간, 황달, 간염, 담석증에 효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간에 좋은 거지. 간에 좋으니까 어디에 좋겠어?”

“간에 좋다는 건…… 숙취에 좋은 건가요?”

“딩동댕! 예로부터 최고의 숙취 해소 음식이었던 거지! 이 걍다리는!”

동의보감 얘기를 술술 하는 거 보니까 그의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그는 재첩국에 밥까지 말아 먹으며, 완벽한 해장을 완료한 후 돌아갔다.

들어올 때는 왠지 지쳐 보였던 그였는데, 돌아가는 뒷모습에는 제법 힘이 느껴졌다.

술김이었지만, 속엣말을 내게 털어놓아서였을까?

아니면, 고향에서 가져온 신선한 재첩국을 맛나게 먹어서일까?

어느 쪽이든…… 정말로 그의 속이 확 풀린 거였으면 좋겠다.

학자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그가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기가 쓸데없는 짐이라는 생각은 다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교수가 아니라도 그는 이미 훌륭하다.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노력하는 그의 모습 자체가 이미…… 아름답다.

정인태 교수님.

언제든 들러 주세요.

주머니가 가볍든, 무겁든.

차마 건네지 못한 말을 품고,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본다.

* * *

우리나라에는 유독 호칭이 많다.

그게 예전부터 이어 내려오던 가족 중심의 문화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칭이 많고 다양하다.

그리고 그 호칭을 기준으로 대개 ‘서열’이라는 게 구분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나이.

그 나이를 기준으로 형, 오빠, 언니, 누나, 동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순미 아주머니와 진민호 씨의 호칭에 대해 늘 고민을 한다.

어쨌든 백반집의 사장은 나인데, 그렇다고 부모뻘 되는 두 분에게 ‘씨’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그렇다.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호칭도 왠지 상대를 낮춰 부르는 것 같아 내키지 않는다.

“호칭?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아무리 우리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지만, 어쨌든 네 가게 종업원이잖아. 진민호 씨도 마찬가지이고.”

재동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자식. 성의 없네. 아무리 그래도 좀 더 좋은 호칭이 있을 수도 있잖아. 좀 생각해 봐. 앗 뜨거!”

순댓국 국물이 오늘따라 뜨거웠다.

이곳은 영진순댓국.

저녁이나 먹자는 재동이의 제안에 장사를 마치고 오게 됐다.

물론, 일하면서 대충 저녁은 해결했지만…… 순댓국은 참기 힘들지.

오드득오드득.

돼지 머릿고기를 씹던 재동이가 다시 입을 연다.

“음…… 호칭이라…… 어머니, 아버지는 어때?”

“인마. 그건 좀 그렇지. 게다가 구분이 안 되잖아. 어머니, 아버지도 같이 일하시는데.”

“음…… 그것도 그렇네? 생각보다 복잡하구나.”

호로록.

녀석은 말만 복잡하다고 할 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순댓국을 들이켰다.

하긴, 내 문제를 누구나 다 공감할 수는 없는 거지.

그나저나…… 오늘 오소리감투 죽이네?

오소리감투는 돼지의 위장이다.

옛날에 돼지를 잡으면, 자꾸 이 부위가 사라지고, 한 번 사라지면 도무지 흔적을 알 수 없다고 하여 오소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감투는 돼지를 잡는 날 서로 이 부위를 차지하려는 모습이 마치 감투를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덧붙여진 말이고.

근데 뭐, 이런 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이 녀석이 얼마나 맛있는지만 알면 되는 거지.

오소리감투의 특징은 그 쫄깃한 식감에 있다.

질기지도 또 너무 부드럽지도 않는 그 식감은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씹는 재미를 준다.

“이모! 여기 오소리감투 한 접시만 주세요.”

“오…… 선우 네가 역시 먹을 줄 아는구나? 오늘 오소리감투 진짜 좋거든. 조금만 기다려!”

영숙 이모가 특유의 환한 웃음을 띠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저게 영숙 이모지.

이모는 이제 완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희선이가 경찰 되는 건 허락하셨나?

쓸데없이 물어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잘됐으면 희선이가 연락이 왔을 테고, 그게 아니라 해도 괜히 내가 나서서 좋을 일은 없다.

“야, 이모라고 부르면 되겠네.”

“어?”

“이모. 삼촌. 우리 어머니는 이모라고 부르고, 진민호 씨는 삼촌이라고 불러. 그럼 되잖아.”

“아?”

오…… 좋은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순댓국 밥값은 하는구나, 이 녀석.

아니지.

내가 순댓국 한 그릇에는 비할 바 없이 커다란 미래 정보를 줬잖아.

자, 호칭은 이모, 삼촌으로 정리하고…… 정보 제공자이자, 기획자이자, 투자자이자, 컨설턴트로서 사업의 진행 상황을 좀 들어볼까?

“그나저나…… 네가 얘기한 그 사업 말이야.”

오.

내가 얘기를 하기도 전에 재동이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낸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니, 문제는 아니고…… 마땅한 어플리케이션 이름이 안 떠오르네?”

“아…… 이름. 중요하지.”

후에 유명해지는 업체 중 한 곳은 우리의 민족성을 강조한 이름으로 크게 성공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광고로 사람들의 뇌리에 콕 박혀 버렸으니까.

다른 한 곳도 여기인지 저기인지 모를, 괜히 요리가 떠오르는 어플리케이션 이름으로 성공했고.

결국 그 두 업체는 한 외국 회사 소속으로 대동단결하게 되었다.

이 두 회사가 결국에는 재동이가 만들게 될 회사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될 것이다.

잠깐이지만, 그 회사들이 뜨기 전에 먼저 그 이름을 써 버리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근데 왠지…… 뭔가 좀 찝찝하다.

배달 어플이 뜰 거라는 정보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비대칭적인 경쟁인데 이름까지 뺏어 버리면…… 재동이가 너무 날로 먹는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쟤도 좀 할 건 해야지.

머리도 좋은 놈이.

“배달의 동족 어때?”

푸우우웁.

국물을 잔뜩 머금은 밥알이 튀어 나갔다.

그 사이사이 씹던 고기까지 녀석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미안하다…… 근데, 너무 놀랐다.

이 자식 진짜 천재 맞구나?

그 이름을 어떻게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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