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63화 (63/110)

#63화 오래된 이야기

후회.

사람이라면, 그것도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한 번뿐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인간은 후회를 하며 살아간다.

작게는 오늘 아침에 선택한 메뉴에 대한 후회.

크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

곰, 그러니까 전 이모부는 이렇게 말했다.

십오 년 동안 그 순간을 후회하며 살았다고.

내가 그날 정말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 같다고.

“치…… 이제 와서 그런 얘기하면 뭐해? 후회하면 뭐 할 거고. 쓰읍.”

고미숙이 쓴 담금주를 한 잔 들이켰다.

잊어가고 있던 일이다.

잊어야 했던 일이고.

그녀의 인생에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다.

생각하다 보니 고미숙은 화가 났다.

진짜 왜 이제 와서 저러는 거야?!

“갑자기 막 화 나려고 해. 당신 그냥 내려가라. 내려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절벽에 떨어지든, 곰한테 물리든 내가 알 바 아니니까 내려가. 조용히 말하는 것도 여기까지야. 휴우…….”

고미숙은 크게 숨을 골랐다.

“미안해. 하지만…… 너 화나게 하려고 그 얘기 꺼낸 거 아니야.”

“아니.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지금 너무 불편해. 이 깊은 산골에서 겨우겨우 쌓아왔던 내 작은 행복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만 같아.”

“…정말 미안해…… 진짜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야.”

조원중의 말은 진심이었다.

눈가에 살짝 맺혀 있는 눈물이 그의 진심을 대변했다.

그 눈물을 일견한 고미숙도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새 붉은 노을은 다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외딴 산골의 작은 집을 둘러쌌다.

그 어둠 가운데, 조그마한 백열등 하나만이 지상의 별빛처럼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상의 맛을 자랑했던 연어 스테이크도 딱딱하게 굳어 갈 때 즈음.

다시 고미숙의 입이 열렸다.

“그래. 후회한다고 쳐. 그 후회 때문에 지금까지 당신이 힘들다고 쳐.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고미숙이 정말 궁금했던 부분이다.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건가?

다시 도시로 내려가서 같이 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시어머니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은가?

“우리 다시 같이 살자.”

“뭐?! 진짜 그 얘기를 하려고 여기 찾아온 거야? 당신, 완전히 미쳤구나? 어머니랑 얘기는 해 봤어? 당신이 죽어도 거역 못 하는 어머니랑 상의는 해 봤냐고.”

조원중의 몸이 움찔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는 그도 잘 안다.

그가 소위, 마마보이였다는 걸.

그것 때문에 고미숙과의 결혼이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것도.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게.

좌절했다.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어머니라는 존재 때문에.

그래서 잊어 보려 했다.

고미숙이라는 이름을.

사랑했던 그녀의 미소와 목소리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이제 무르익어 가는 중년의 시간에도 고미숙이라는 사람은 그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 얼굴 못 뵌 지 오 년도 넘었어.”

“뭐라고?”

이어지는 조원중의 말은 고미숙에게 충격이었다.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머니를 못 봤다는 건, 연을 끊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고미숙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조원중이 말을 이어 갔다.

“연을 끊는다,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겠다, 뭐 이런 각오는 아니었어. 그런데…… 한 번쯤은 단호하게 끊어 내고 싶었어. 모든 걸 잃더라도,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어머니라는 그늘을 피해서 살아보고 싶었어.”

“…….”

고미숙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오래 전 그때 조원중에게 바라던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인 자신을 더 우선으로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조원중이 선택하고, 평생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바로 그녀니까.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였던 고미숙이니까.

“휴우…… 당신답지 않은 행동이네…… 내가 그렇게도 바라 왔던……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런 소용 없겠지만.”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나 진짜 너랑 다시 같이 살자는 말 하자고 온 거니까. 왜 소용이 없어.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나 너랑 헤어진 이후로 연애도 제대로 한 번 안 했어. 결혼은 물론이고.”

“…의외네? 어머니 등살에 못 이겨서 바로 재혼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닌…… 당신 집안이랑 잘 어울리는 어떤 사람이랑.”

“내게 어울리는 사람은 고미숙, 당신뿐이야.”

“됐어.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도 마.”

“진심이라고, 진심.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오 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한 거야. 어머니와 멀어지면서……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 아버지의 돈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어.”

“휴우…….”

진짜…… 여전히 곰 같은 사람이구나, 라고 고미숙은 생각했다.

곰처럼 우직하고, 한 곳만 바라보는.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누가 있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것인가.

이런 사람 또 없다.

그거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

상처로 인해 굳게 닫혀 있던 고미숙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모르겠다.

이 남자의 마음이 진심인지……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 있을지.

그런 걸 알 수 있다면, 그 오래전에 이미 실패할 결혼 같은 건 하지도 않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분이 꽤 괜찮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이런 감정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것인지.

“연어 더 먹을래?”

“또 스테이크 굽게?”

“아니…… 생연어. 연어는 뭐니 뭐니해도 생연어지. 기다려.”

두 사람은 그렇게 연어를 나눠 먹으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산골의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 이모. 그래서 그 사람…… 그러니까, 전 이모부. 그 아저씨는 지금 뭐 해요? 설마, 아직도 이모 집에 있어요?

- 흐흠…… 그러네. 가라니까…… 저렇게 안 가고 있다. 지금 장작 패고 있어. 닭백숙을 해 준다나 뭐라나…….

- 와…… 대단한 이모부네. 전 이모부.

- 야,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 내가 너밖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얘기하는 거야. 하도 당황스러워서 누군가한테는 털어놓고 싶었거든.

- 물론이죠. 내가 입 하나는 얼마나 무거운데…… 그나저나, 나 이제 여자친구 생겨도 놀러 못 가겠네?

- 응?

- 방 많다고 놀러 오라고 했잖아요. 근데, 이제 못 가잖아.

- 야, 왜 못 와. 저 사람 방 빼고도 남은 방 많아. 언제든지 놀러와. 아, 일단 여자친구부터 만들고.

- 후훗. 알겠어요, 이모.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 뭐? 좋은 시간은 무슨…… 암튼,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절대!

- 네! 걱정 마세요!

참……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쉽게 믿지 못할 만한 이야기고.

요즘 같은 세상에 순애보를 펼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라…… 드라마로 나와도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욕먹을 것 같다.

아무래도 요즘 세상은……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진 그런 세상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아주 가끔씩 그런 낭만이 살아 있기도 한가 보다.

내가 아는 그 이모부는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 같은 건 죽어도 못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 사이에서의 중재자 역할을 잘 못 한 거기도 하지만.

그냥 천상 곰이라서…… 눈치 있고, 센스 있게 인간관계를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도, 멋있다.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남자의 순애보.

이모부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어렵고 힘든 길을 가는 중인 거다.

연어가 산란을 위해 갖은 고난을 헤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이모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고난을 헤쳐 이모가 있는 산으로 올라왔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부디, 두 분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 되길 바란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엔 연어 스테이크나 구워 볼까?

* * *

5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장미 축제, 튤립 축제, 수국 축제, 철쭉 축제, 연등 축제, 빛 축제, 마임 축제, 빵 축제 등등 온갖 축제가 전국 각지에서 열린다.

5월은 축제를 열기에 날씨도 딱 좋을 뿐만 아니라, 봄꽃이 만발하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그런 축제 중에서 또 이 축제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바로 대학교 축제.

영훈대학교 학생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한창 축제를 즐기고 있는 중인가 보지.

그러다 보니, 가게도 조금은 한산했다.

그래 봐야 평소에 있던 웨이팅이 사라진 것뿐이지만.

어쨌든 브레이크타임이 되자, 꽤 여유있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너 대학교 축제 가 봤어?”

혜승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게 살아온 그녀에게 축제라는 건…… 조금은 먼 얘기겠지.

대학교에 진학할 일은 없으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고.

“어머니, 저 영훈대학교 좀 돌아보고 올게요.”

“영훈대학교?”

“네. 축제하는 중이래요. 구경도 좀 할 겸 갔다 올게요.”

“그래, 그래. 어차피 가는 김에 혜승이도 좀 데리고 가지 그래?”

“네, 그러려고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 오늘 좀 한가하니까 충분히 놀다 와. 오랜만에.”

고종숙이 두 사람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내보냈다.

그러고 보니, 아들 선우도 아직은 대학생일 나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게에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젊은 애인데…… 가끔씩 또래들이 모이는 그런 데 가서 스트레스도 좀 풀어야지.

고종숙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외쳤다.

“자, 오늘은 젊은 애들 보내고 우리 노장들끼리 잘해 봅시다!”

“좋아요, 그럽시다!”

“자, 파이팅!”

“갑시다! 우리끼리도 잘할 수 있다!”

선우네 백반의 노장들이 한마음을 다해 소리쳤다.

* * *

영훈대학교.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날씨도 학생들의 축제를 반기는 듯, 쨍한 햇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조금 더워도 축제 때는 이렇게 날씨가 맑은 게 좋다.

밝고, 활기차고, 신나는 느낌은 맑은 날씨와 더 잘 어울리까.

그런데, 오늘따라…… 왠지 좀 뒤가 간지럽다.

뒤뿐만이 아니다.

앞과 옆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는 게 느껴진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옆에서 걷던 혜승이에게 물었다.

“혜승아. 나 얼굴에 뭐 묻었니?”

“아니요. 뭐, 묻은 거 없는데요? 와…… 진짜 분위기 좋다. 이런 게 축제구나.”

혜승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제야 알았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던 시선의 정체를.

나야 매일 보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 혜승이라는 애.

예쁜 애였지.

나중에 배우까지 되는.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이 혜승이의 얼굴에서 멈추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괜히 날 보는 줄 알고 착각했잖아.

정작 유혜승 본인은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기한 얼굴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나름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