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김밥 3종 세트 (3)
보람찬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노곤노곤한 몸에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귓가에 차미란 원장의 말이 맴돈다.
그녀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이제 성인이 되면 나가야 하는 애들이 제일 걱정이죠. 언제까지고 돌봐 줄 수도 없고…… 혜승이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나가야 될 텐데.
그런 것까지는 생각 못 해 봤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순간 반강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스무 살.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다.
거기에 부모도 집도 없는 고아 출신이라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궁금해졌다.
전생에서 유혜승은 어떻게 톱 배우까지 된 걸까?
부모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도 연예인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세상에서.
집도 절도 없는 고아 출신의 그녀가.
어쨌든.
그들을 위한 나의 도움이라는 건 결국 따뜻한 밥 한 끼 해 주는 게 다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생각하면 또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김흥범 교수의 문자.
이 시간에 웬일인 걸까?
- 이선우 사장님,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다른 게 아니고…… 오늘 팔았던 김밥 있잖아요. 그걸 칼럼에 좀 다루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될까요?
음…… 왜 갑자기 이런 걸 묻지?
지금까지는 이런 걸 물어보고 쓰신 적이 없었는데.
- 아, 교수님. 물론입니다. 칼럼을 쓰시는 건 어디까지나 교수님 재량이니까요.
- 음…… 정말인가요? 혹시 걱정되시지는 않나요?
- 걱정이요? 어떤 걱정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 오늘의 김밥들…… 너무 새롭지 않나 싶었는데, 먹어 보니까 다 너무 훌륭하더군요. 제가 칼럼을 올리면…… 그걸 보고 따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생길 겁니다.
아.
김흥범이 걱정하는 게 이거였구나.
다른 김밥집 사장들이 그걸 보고 모방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새삼스레 김흥범 교수가 참 세심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전생에서부터 내가 보아 온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
그들은 권위를 만들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바빴다.
그들이 가장 되고 싶었던 게 바로 김흥범 교수와 같은 명성을 얻는 것.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그 권력의 지팡이를 여기저기 휘둘러 댔을 것이다.
컨설팅이라는 미명하에 엄청난 수수료를 받아 가면서.
나 같은 일개 백반집 사장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홍보를 해 준다는 명목하에 돈을 받아먹었으면 받아먹었지.
- 우선, 감사합니다.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 주셔서.
- 당연한 거죠. 그 메뉴들은 사장님이 직접 개발한 거니까요.
- 개발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요. 그냥 김밥에 새로운 재료 한두 가지를 추가한 것에 불과한데요.
- 그게 바로 개발입니다. 원래 있던 것에서 한 끗의 변화를 주는 것.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못 해서 다들 이상한 신메뉴를 개발하고 있는 거죠. 치킨에 마라 양념을 섞는 마라 치킨을 개발한다는지 하는.
- 네? 마라…… 치킨이요?
헉?
치킨에 마라 양념? 뭘 알고 하시는 말씀인가.
2020년 초 대한민국에 마라 열풍이 불었을 때, 선우 푸드의 치킨 브랜드인 ‘좋은 치킨’에서 내놓았던 메뉴였다.
지금 사람들은 ‘마라’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텐데?
- 신메뉴 개발 과제를 내주니, 한 학생이 아이디어를 내왔더라고요. 마라 치킨을. 중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참. 도대체 그런 걸 누가 먹겠습니까?
- 아…… 뭐, 그렇죠. 하하. 아, 참. 칼럼은 교수님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 타 업체에서 따라 하는 건 걱정 안 되십니까? 어쩌면 따라 하는 것 이상으로 더한 사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허를 낸다든지 하는…….
- 네.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써 주십시오. 이왕이면, 먹음직스럽게 잘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음…… 네. 알겠습니다. 저로서는 정말이지 이 김밥들을 안 다룰 수가 없네요. 이렇게 새로우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안 다루고 넘어가는 건 제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것 같아서요.
- 하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셔 주시고, 좋게 생각해 주셔서.
김흥범 교수에게 그냥 편하게 쓰라고 했던 건, 내가 외식업을, 요리라는 걸 만만히 보지 않기 때문이다.
김밥의 밥을 맛깔나게 만드는 법을 아는데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던 전생이었다.
김흥범이 올릴 글과 사진만 보고 어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진미채와 계란 지단만 섞으면 되네?
그냥 김밥에 돈가스만 잘라서 넣으면 되네?
이건 뭐야. 묵은지만 말면 되잖아?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음식을 만들다 보면, 백이면 백 다 실패할 거다.
진미채는 계란 지단만큼 부드럽게 만들어야 식감을 해치지 않는다.
돈가스 김밥에 찍어 먹는 소스의 비율?
수십 수백 번 여러 비율로 섞어 보고서 만들어 낸 조합이다.
그리고, 묵은지.
어설프게 따라 할 그들에게는 고종숙 여사표, 안순미 여사표 묵은지가 없다.
이건 결정적인 차이다.
김밥의 맛을 백팔십도 바꿀.
고로, 김흥범 교수는 그냥 맘대로 쓰셔도 된다.
어차피 그대로 못 따라 한다.
어설픈 사람들은 몇 번 따라 해 보고 또 포기할 거다.
그리고는 김흥범 교수 탓을 할지도.
이거 생각보다 맛이 없네, 하고.
물론, 그런 사람들은 내 안중에 있지도 않다.
* * *
[백반집의 김밥에 대하여…….
김밥을 내어놓는 백반집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반찬으로 나오는 경우를 봤을지 몰라도, 이곳처럼 김밥만을 ‘오늘의 메뉴’로 낸 집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김밥 3종 세트.
이것이 오늘 선우네 백반의 메뉴였다.
3종 세트라.
어떤 김밥들을 상상했는가?
참치 김밥? 치즈 김밥? 불고기 김밥?
놀랍게도 김밥 3종 세트에 위 메뉴들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래 나열할 김밥의 이름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일 테다.
당연하다.
필자도 처음 들어본 김밥이었으니까.
진미채 김밥, 돈가스 김밥, 묵은지말이 김밥.
어떤가?
이런 김밥을 드셔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이름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
.
.
.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아무도 김밥에 저 재료들을 넣을 생각을 못 했을까.
애초에 맛있는 김밥에 저 맛있는 재료들을 넣으면 더 맛있을 거라는 걸 왜 아무도 생각 못 했을까.
왜 그 생각을 김밥집 사장이 아닌, 백반집 사장이 한 것일까?
선우네 백반은 늘 필자에게 경이로움을 안겨 준다.
이선우 사장은 새롭고 능숙하며, 빠르면서도 여유롭다.
과연 이게 겨우 이십 대 중반의 나이의 사람이 풍겨 낼 수 있는 원숙함인가, 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많다.
언젠가부터 난 그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주에서 날아왔든, 먼 미래에서 날아왔든, 뭐든지 간에 그는 결코 보통 인간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가 보여 줄 맛의 향연을 경외심을 품고 지켜볼 생각이다.
아, 오늘 가장 아쉬웠던 점 하나.
이 칼럼을 보는 많은 분은 선우네 백반에 가도 김밥 3종 세트를 맛볼 수 없다는 것.
이 가게는 매일매일 메뉴가 바뀌는 가정식 백반집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하게도.]
김흥범 교수는 글을 꽤 잘 쓴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만족한 것 외에는 칼럼에 쓰지 않기 때문에 그 진정성이 드러나는 듯하다.
어쨌든 늘 감사하다.
근데…… 마지막 부분을 보고 조금 식겁했다.
미래에서 왔든지 간에?
진짜 뭘 알고 하시는 소리인가?
후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세상이니까.
내가 십오 년전으로 돌아온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 * *
선우네 백반 최고의 VVIP. 갓물주 윤복순 할머니.
가게에 손님이 많아지자 할머니의 발길도 뜸해졌다.
어쩌다가 오며 가며 할머니를 만나 물어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 가게도 바쁜데 내가 드나들면 괜히 신경 쓰일 거 아냐. 김치나 좀 줘. 그거만 있으면 우리 영감 밥 맛있게 잘 잡숴.
“할머니, 아욱 된장국 맛 어떠세요?”
“응, 아주 좋아. 깔끔하고 시원해.”
할머니는 아욱 된장국은 참을 수 없다며, 지나가던 길에 메뉴판을 보고 들어오신 참이었다.
아욱은 흔한 채소는 아니다.
젊은 층보다는 중장년 층에게 익숙한 채소이고, 즐겨 먹는 세대도 바로 그들이다.
아욱은 건새우와 특히 궁합이 좋아서 된장국을 끓일 때 보통 건새우와 아욱이 같이 들어간다.
그렇게 국을 끓이면, 쌉쌀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난다.
왠지 건강에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고.
실제로 아욱은 눈 건강에 매우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식이섬유, 비타민 등도 풍부한 채소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채소의 왕’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할머니는 국에 밥까지 말아서 맛있게 한 그릇 드셨다.
마침 손님이 적은 시간이라 구수한 둥굴레차를 끓여다가 할머니께 내드렸다.
“여기, 차 좀 드세요.”
“응, 고마워. 하여간, 언제 봐도 참 친절하다니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에휴-
차를 호로록 한 모금 들이켠 할머니가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얼굴에 살짝 근심이 보였다.
미간 사이가 찌푸려져 있었고, 눈동자에도 생기가 부족해 보인다.
이럴 때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갓물주님께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니까.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건 바로 웃으면서 살갑게 말을 걸어 드리는 거다.
“할머니-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으세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응? 뭐, 걱정은 무슨…… 에휴…….”
나름 간드러진(그랬다고 스스로 믿는) 내 목소리에도 표정이 안 풀리시는 걸 보니, 뭔가 단단한 걱정거리가 있으신 모양이다.
“에이- 나 걱정 많다고 얼굴에 써 붙이셨는데요? 뭔지 말씀이라도 해 보세요. 혹시 알아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일지.”
“아이고, 말만으로도 고맙네. 선우 엄마는 좋겠어. 선우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그냥 풍성할 것 같으니.”
“호호. 그럼요. 너무 좋죠. 우리 선우만 있으면 못 할 게 없거든요. 애가 저를 닮아서 좀 똑똑하고, 친절해야죠.”
“에헤이. 친절한 건 모르겠지만, 똑똑한 건 날 닮았다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우기실 건지?”
아버지는 언제 또 어머니 말을 들으셨는지.
하여간, 두 분 다 유전자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크다.
사실 나 스스로는 두 분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합쳐 놓았다고 생각하는데. 후훗.
“할머니. 진짜 한번 얘기해 보세요. 무슨 고민이신지. 여기 이선우 사장이 진짜 해결해 줄지도 모릅니다.”
진민호가 두꺼운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아이고, 새로 오신 분까지 완전 선우에게 반한 모양이로구먼. 이 집은 참 같이 일할 맛 나겠어. 이렇게 분위기가 좋으니.”
“다 할머니 덕분이죠. 할머니가 배려해 주신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장사하는 거니까요.”
“에이 뭘.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멋쩍어하시는 할머니.
아무리 봐도 진정한 갓물주시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태어나셨으면,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하시는 귀족이셨을 것 같다.
무려 보증금을 면제해 주시고서도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고 하시다니.
할머니.
오래오래 저희 건물주로 계셔 주세요.
라고 생각한 나의 기대는 할머니의 다음 말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