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평양냉면의 세계
맛집 탐방의 날.
오늘은 이초희에게 ‘평양냉면’의 세계를 알려 주려 한다.
냉면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이 있다.
그 유래나 변천사 등을 따지면 뭐…… 복잡다단하다.
난 그냥 간단히 생각하는 편이다.
슴슴한 고기 육수 맛과 부드러운 면발의 평양냉면.
새콤달콤한 맛과 쫄깃한 면발의 함흥냉면.
대개 이렇게 생각하면 맞다고 본다.
가게에 따라, 지역에 따라 들어가는 부재료와 양념과 면의 스타일이 다 다르지만.
오늘 찾아갈 곳은 경기도 북쪽에 위치한 한 평양냉면집이다.
지하철역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사장님!”
맛집 탐방의 베스트 파트너, 이초희다.
봄을 맞아 산뜻한 색의 옷을 입은 오늘의 이초희는 ‘싱그럽다’는 느낌이 잘 어울렸다.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만 같은.
그런 ‘싱그러움’은 식사를 하는 순간, 와장창 깨져 버리겠지만.
그건 또 나름대로 좋았다.
그런 이중적인 느낌이 바로 이초희가 갖고 있는 매력 포인트니까.
“이 지역은 원래 부대찌개가 유명하지 않아요?”
“맞아요. 원래 부대찌개 맛집이 몰려 있는 걸로 유명하죠.”
“부대찌개도 맛있는데…… 사실 저 평양냉면은 한 번도 안 먹어 봤거든요.”
“아, 그래요?”
음…… 조금, 아주 조금은 걱정이 된다.
아무리 음식을 가리지 않는 이초희라지만, 평양냉면은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음식 중 하나이다.
현재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매니아도 처음 접했을 때는 대부분 그 슴슴한 맛에 당황하곤 한다.
혹자는 평양냉면 국물을 걸레 빤 물을 먹는 것 같다는 둥, 맛없는 숭늉을 먹는 것 같다는 둥 말하곤 하니까.
일반적으로 고깃집에서 먹는 냉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법도 하다.
나조차도 그랬다.
한 다섯 번 정도 어쩔 수 없이 평양냉면을 접하고 난 후, 개안을 한 케이스이다.
갑자기 각성을 하듯, 평양냉면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심한 것 같으면서도 진한 육수에서 깊고 그윽한 맛이 느껴졌다.
실로 한순간의 깨달음 같은 거였다.
그 깨달음을 얻은 가게가 바로 오늘 찾아가는 평양냉면집이고.
“초희 씨라면…… 괜찮을 거예요. 초희 씨라면.”
세어 본 건 아니지만, 백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첫 경험에 평양냉면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거의 천재적인 미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음식 쪽에서는 타고난 거지.
과연 이초희에게 그런 재능이 있을까?
지금까지로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녀는 어떤 음식에서도 고유의 맛을 느끼는 것 같으니까.
혹시 아니라고 해도 대안은 있다.
이초희의 말대로 이 지역은 부대찌개로 유명하니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방향을 바꾸면 된다.
* * *
가게에 들어서자 이런저런 안내문들이 붙어 있는 게 보인다.
- 신발을 꼭 확인해 주세요. 분실 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 매주 화요일은 쉽니다.
그리고…… 오전부터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손님들.
역시 평양냉면으로는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집답다.
간신히 자리를 잡은 우리는 먼저 메뉴판부터 확인했다.
- 물냉면
- 비빔냉면
- 온면
- 사리
이렇게 면 종류가 있고.
- 제육
- 수육
이렇게 고기 종류가 있다.
물론, 주류와 음료수도 당연히 있다.
아쉬운 건…… 판매가 중단된 접시만두.
손으로 빚은 만두피에 삼삼하게 들어 있는 속이 참 담백한 그런 만두인데.
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일단 먹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지.
“골랐어요?”
“고를 게 따로 없네요.”
“아…… 그렇죠?”
“네. 그냥 다 시키면 될 것 같아요.”
“그럼요. 그래야죠.”
“그중에 맛있는 건 또 시켜 먹으면 되니까.”
싱그러운 이초희가 밝게 웃는다.
지극히 그녀다운 발상이다.
뭐, 나도 동의한다.
애초에 그녀가 최고의 파트너인 이유.
그건 그녀와 함께라면 모든 메뉴를 다 먹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뉴 주문할 때 직원분이 쓰윽- 하고 우리를 쳐다봤지만, 뭐 남의 눈치 같은 건 신경 안 쓰는 우리다.
게다가, 더 시킬 수도 있으니 벌써부터 놀라지 마시라.
조금 후에 반찬이 세팅되었다.
사실 이 집은 반찬이랄 게 따로 없다.
길게 잘라 담근 무절임과 고기에 찍어 먹는 양념장 정도가 전부다.
같이 시킨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무절임을 입에 넣어 본다.
이 집 무절임은 평양냉면 같다.
딱 보기에도 고춧가루를 셀 수 있을 만큼 양념이 적다.
시원하면서 약간의 새콤달콤한 맛이 날 뿐.
어쩌면, 평양냉면의 반찬으로는 참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루룩 음식들이 세팅되었다.
일단, ‘외식홀릭’ 이초희가 사진을 찍는 걸 기다려 준다.
첫 공략 대상은 온면이다.
메밀면은 뜨거운 곳에 오래 두면 툭툭 끊어져 버리니 먼저 먹어야 한다.
각자의 그릇에 면과 고명으로 얹어 있는 고기를 나눠 담고, 맛을 본다.
후루룩.
따뜻한 면이 부드럽게 넘어온다.
심심한 육수가 면과 함께 딸려 들어온다.
음…… 좋다.
다음은 고명으로 나온 고기에 무절임을 하나 얹어 먹는다.
잘 삶아져서 부드러운 사태살의 맛과 무절임의 조화가 훌륭하다.
역시…… 좋다.
이 집 음식을 먹을 땐, 맛있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 미묘한 차이는…… 뭐랄까?
왠지 이 음식은 맛도 있지만, 몸에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여하튼, 그렇다.
물론, 이 스물다섯 살의 껍데기 안에 마흔 살의 아재가 살아 숨쉬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맛있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니까.
한 차례 온면의 맛을 즐긴 후, 이초희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러 번 맛을 봤다.
그냥 한 번.
무절임에 한 번.
다음에 국물을 후루룩 한 번.
고기 고명을 얹어서 한 번.
그리고, 다시 그냥 한 번.
이윽고 그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음…… 맛있어요. 한 다섯 젓가락쯤 먹으니까 맛이 확 다가오네요.”
“오…… 그런가요?”
“네. 확실히 좀 진입 장벽이 있는 음식이네요.”
진입 장벽이라.
보통 사람의 진입 장벽이라면, 적어도 다섯 번 정도 서로 다른 가게를 다니며, 평양냉면의 맛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확 맛있어지는 거고.
그게 그녀에게는 다섯 번의 방문이 아니라, 다섯 번의 젓가락질이었다.
그것도 냉면보다 더 맛들이기 어렵다는 온면으로.
온면은 특유의 툭툭 끊어지는 면의 식감이 초심자들로 하여금 더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니까.
새삼 참 대단한 이초희였다.
온면으로 진입 장벽을 뚫었으니, 냉면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평양냉면을 먹을 때는 소소하지만, 나만의 법칙이 있다.
바로 면을 풀기 전에 대접을 들어 육수를 먼저 맛보는 것.
면이 국물에 섞이게 되면, 아무래도 국물 맛은 바뀔 수밖에 없다.
메밀에서 나오는 전분이 섞이기 때문이다.
그 원칙에 따라 오늘도 먼저 대접을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맛본다.
“크으.”
“국물 맛있어요?”
“네. 초희 씨도 면 풀기 전에 국물부터 맛보세요.”
“음…….”
이초희도 나를 따라 먼저 국물을 마셔 본다.
“오…… 진한 고기국물 맛이네요.”
“네. 시원한 고기국물. 좀 독특하죠?”
“맞아요. 그러고 보니 시원한 고기국물은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다시 후루룩.
이초희가 국물을 맛본다.
국물을 맛봤으니, 이제 면을 섞을 시간이다.
잘 말려 있는 면을 휘휘 저어 풀어 준다.
그리고는 크게 한 젓가락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으음…….
쫄깃쫄깃하면서 탱탱한 면발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질기지 않다.
메밀 함량이 높은 메밀면이기 때문이다.
평양냉면의 면은 결국 밀가루와 메밀가루의 혼합 비율이 성패를 좌우한다.
메밀가루가 너무 많으면 면이 거칠고 투박해진다.
또 밀가루가 너무 많으면, 특유의 평양냉면 맛을 낼 수가 없다.
이 집의 비율은…… 좋다.
적절한 찰기와 적절한 끊어짐.
그 조화가 환상적이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이초희는 이미 그릇에 있는 면을 다 먹어 치운 후였다.
“빨리 드시죠. 비빔냉면 맛보게.”
“음…… 사리 추가는 어때요? 여기 사리 추가는 처음에 먹은 양 그대로 다시 주거든요. 비빔냉면은 양념 맛이 강하니까 물냉면을 다 먹고 먹는 게 좋기도 하고.”
“좋아요. 그럼 사리 추가!”
두 번 더 ‘사리 추가’를 외친 후에야 다음 메뉴인 비빔냉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비빔냉면은 평양냉면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사람들이 주로 떠올리는 이미지로는 말이다.
하지만, 메밀면이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에게는 이 비빔냉면도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비빔냉면은 ‘제육’과 함께 먹는 것을 추천하는데, 이건 마치 갈빗집에서 갈비를 남겨 놓았다가 후식 비냉과 함께 먹는 그런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장님. 근데 왜 여기는 이 돼지고기 수육을 제육이라고 부르죠?”
이초희가 제육 한 조각을 집어 올리며 묻는다.
음……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사실 이건 간단하다면 간단한 건데, 또 복잡한 유래를 설명하자면 길다.
이초희에게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일단, 수육은 삶아 먹는 고기라는 뜻이에요. 수라는 말이 삶다는 한자어 ‘숙’에서 유래했거든요.”
“아…… 근데 이 돼지고기도 삶은 거잖아요.”
“맞아요. 근데, 과거에는 사실 돼지라는 생물은 익숙한 고기가 아니었어요. 지금은 돼지고기가 가장 대중적인 고기가 되었지만.”
“그래요?”
“네. 그래서 수육이라고 하면 다 지금 나온 것처럼 소고기를 삶은 고기를 뜻했어요. 제육의 ‘제’는 돼지를 뜻하는 한자어인 ‘저’에서 유래한 거고요. 결국 제육도 삶는다는 의미에서는 수육인 건데, 애초에 소고기를 수육이라고 불렀으니,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 가게에서는 돼지고기는 제육, 소고기는 수육이라고 칭하게 된 거죠.”
“아……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으나, 젓가락은 연신 쉬지 않고 움직였다.
설마…… 나한테 말을 시키는 사이에, 고기를 더 먹으려는…… 수작?
애써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다.
후훗.
하지만, 무슨 걱정인가.
더 시키면 되는걸.
“여기 제육 한 접시 추가요.”
어차피 여기에 오는 순간 제육은 리필이 될 운명이었다.
내가 평양냉면보다 더 좋아하는 게 이 집 제육이니까.
돼지고기를 삶아서 식힌 후, 어슷하게 썰어서 나오는 이 집 제육의 맛은…… 상상을 초월한다.
식은 고기가 어찌 이렇게 담백하고 고소할 수 있는가.
잡내?
그런 건 애초에 이 집 클래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소고기로 만든 수육도 제육보다는 못하지만, 꽤 훌륭하다.
물론, 제육이 수육보다 낫다는 것도 내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사람에 따라서 수육을 더 선호하기도 하니까.
사태와 아롱사태를 섞어 놓은 소고기 수육 또한 이 집의 별미이다.
* * *
“진짜 좋네요.”
“좋죠?”
“네. 좋아요. 뭔가 맛있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을 하고 싶은 느낌이에요.”
“맞아요. 정확히 알고 있으시네요. 후훗”
“헤헤. 행복하네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날씨에 천천히 걷고 있으니.”
“그렇네요. 참 여러모로 좋은 하루네요.”
냉면집을 나와 조금 걸으니, 천변 길이 보였고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야말로 따뜻한 봄 햇살이 좋았고, 맛있는 걸 먹고 나와 기분도 좋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장님은 참 데이트하기 좋은 분이에요.”
“데이트요?”
“아, 뭐 별다른 뜻은 아니고요. 그냥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거 그것도 일종의 데이트니까.”
“아…… 저도 초희 씨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 초희 씨랑 함께라면 모든 메뉴를 먹을 수가 있거든요.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리듯 정처 없이 걸었다.
한참을 얘기하면서 웃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나보다.
“어머. 여기 서울인가 봐요?”
“그러게요. 서울 지하철역이네요.”
“먹은 거 다 소화됐겠네요.”
“네. 다이어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러게요. 너무 좋네요! 그럼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우리만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