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멘보샤에 얽힌 이야기
‘선우네 김치’는 날이 갈수록 잘 팔렸다.
이제는 김치를 만들어 포장해 놓는 족족 다 팔려 나가는 수준.
“이러다가 대한민국 배추 씨 다 말리는 거 아니야?”
“그러게.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누가 알았겠어? 다 재동 엄마 덕분이다.”
“무슨 소리…… 선우 엄마 김치야 워낙에 유명했잖아. 다들 깍두기 먹고 나가면서 이거 좀 팔면 안 되냐고 그랬었지.”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지. 호호호.”
“그렇게 생각한 건 선우 엄마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진짜 살 생각으로 말한 거라니까.”
“진짜 그랬나 봐. 호호. 아들 하나 잘 뒀더니 이런 날도 다 오네.”
“아이고. 선우가 그러더구먼. 엄마가 하도 걱정해서 김치 못 팔 뻔했다고. 겨우겨우 설득해서 가게 확장하고 김치 팔기로 한 거라고.”
고종숙이 민망한 듯 웃었다.
“맞아. 처음엔 사실 걱정 많이 했지.”
“그럼 선우 말이 다 맞았었네?”
“그게 그런가 보네?”
호호 하하.
김치를 담그는 내내 두 분은 쉴 새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즐거운 광경이었다.
가끔 무거운 걸 들던 진민호가 진지한 얼굴로 끼어드는 것도 꽤 재미있었고.
그런데, 선우네 김치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선우야. 다음 주에 주문한 배추랑 무가 좀 부족하겠는데?”
최덕호 아저씨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음…… 얼마나요?”
“그게…… 요 몇 달간 물량을 갑자기 늘려서 주문한 거거든. 근데, 이게 갑자기 너무 늘어나니까 거래처에서도 감당이 안 되나 봐.”
“그렇군요. 일단 최대한 가져다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 봐야죠.”
“그럼 고맙고. 일단, 나도 최대한 물량은 맞춰 볼게.”
“네, 감사합니다.”
김치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원재료의 안정적인 공급이다.
물론, 지금 정도의 규모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지만 규모가 커져서 공장화되었을 때는 원재료 수급 문제가 사실상 김치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선우네 김치’도 결국에는 점점 크기를 키워 가야 할 상황이 올 터.
이 문제는 초창기부터 잘 잡고 가야 할 사항이다.
“일단 시장 채소 가게에서라도 구매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아버지의 의견이다.
안순미의 생각은 좀 달랐다.
“편하긴 하겠지만, 배추의 질이 문제예요. 최 사장님이 가져다주는 배추가 정말 좋은데…… 배추 맛, 무 맛 달라지면 김치 맛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음…….
다들 공감하는 눈치이다.
나도 아주머니의 의견에 공감한다.
무슨 음식이든 재료가 가장 중요하다.
배추와 무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는 김치에 재료가 중요하다는 말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매일 농산물 시장에 가서 배추를 떼어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도매 시장에는 좋은 배추를 팔지 않을까요?”
진민호의 의견.
깜짝 놀랄 정도로…… 합리적인 의견이다.
이게 30년 직장 생활을 한 짬의 힘인가?
장사 경력이 없음에도 나름의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줬다.
아쉽게도 반쪽짜리지만.
“좋은 생각이긴 한데요. 문제는…… 좋은 배추를 꾸준히 공급해 줄 도매상을 어떻게 찾냐는 거죠. 최덕호 사장처럼 믿고 맡길 만한 거래처를요. 그거 찾는 데만 해도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 텐데…….”
와우.
어머니의 의견에 다시 한번 놀랐다.
역시 정확히 맥을 짚고 계셨으니까.
어머니의 말씀처럼 도매상도 저마다 다 다르다.
운이 좋아 한두 번 좋은 물건을 가져다 놓을 수는 있지만, 꾸준히 좋은 물건을 확보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결국 좋은 물건을 적절한 가격에 꾸준히 판매하는 게 상인들의 성공 비결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좋은 도매상을 찾기란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늘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이니까.
에헴.
어른들의 소꿉놀이를 재미있게 관찰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이다.
“농산물 공급은 저한테 맡기세요.”
“…….”
이들은 사실 알고 있다.
나에게 맡겨 두면 문제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을.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과거의 기억을 빠르게 잊는다.
“선우 네가?”
“음…… 시간이 많지 않은데. 당장 다음 주부터는 최덕호 사장이 평소의 반 정도밖에 못 가져다준다고 했어.”
“아이고. 손님들 난리나겠네. 김치만 사러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러다가 선우네 김치 명성이 확 떨어지는 거 아니야?”
흠흠.
나도 마흔 살까지 살아 봤지만…… 어른들은 참 걱정이 많다.
“일단, 이번 주까지는 저한테 맡겨 보세요. 자, 이제 장사 시작하셔야죠.”
김치에 대한 어른들의 걱정과 함께 오늘의 장사가 시작됐다.
배추가 없어서 김치를 못 만들어도, 장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도 따뜻한 밥 한 끼를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니까.
* * *
멘보샤.
중국의 새우 요리.
멘보는 빵, 샤는 새우를 뜻한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식빵 사이에 잘게 다진 새우를 듬뿍 넣어 기름에 튀겨서 만드는 요리.
이번 주 휴일에는 맛집 탐방은 물 건너갔다.
멘보샤를 튀겨 꼭 가 봐야 할 곳이 있으니까.
이초희의 실망한 듯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 아…… 이번 주 냉면 진짜 기대했는데.
- 다음 주에는 꼭 가죠. 대신 제가 쏠게요. 약속 한 번 어겼으니.
- 진짜요?! 오, 좋아요! 다음 주에는 절대 약속 깨기 없어요.
좋아하는 이초희의 목소리에 살짝 놀라긴 했다.
도대체 얼마나 먹으려고…….
햇살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니 생각나는 냉면은 다음 주로 미뤄 두고…… 멘보샤 요리를 시작한다.
식빵은 테두리를 잘라 낸 후, 4등분 해준다.
식빵 두 장을 겹쳐서 잘라 두면 나중에 사이즈가 잘 맞아서 좋다.
사소한 팁이다.
다음은 새우.
시중에 파는 새우살도 있지만, 이번에는 시장에서 질 좋고 큰 놈으로 잔뜩 준비했다.
무려 생새우로 만드는 멘보샤.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 새우를 잘게 다진다.
넓은 볼에 다진 새우, 계란 흰자, 전분 가루, 맛술, 소금, 후추를 넣어 섞어 준다.
식빵 사이사이에 들어갈 속이다.
잘 섞어 준 속을 식빵과 식빵 사이에 푸짐하게 얹어 준다.
단, 식빵 옆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주의한다.
맛도 맛이지만, 네모나고 조그마한 모양이 귀여운 멘보샤니까.
눈으로 먹는 즐거움도 지켜 주자.
깊은 팬을 꺼내고, 기름을 넉넉하게 넣는다.
기름 온도는 대략 60도 정도로 맞추면 좋다.
식빵이라는 게 원래 타기 쉬우니, 기름 온도가 너무 높으면 새우살이 다 익기도 전에 빵이 먼저 타 버릴 수 있다.
한 개씩 한 개씩 넣어 젓가락으로 살살 돌려 가며 익힌다.
새우살이 잘 익고, 빵이 노릇해질 때까지.
튀기는 시간은 대략 2분에서 3분 사이면 된다.
튀긴 멘보샤는 체망에 올려 기름기를 빼 주고, 키친타월에 마지막으로 올려 남은 기름기마저 제거해 준다.
이러면 완성.
넉넉하게 만들었으니, 하나 먹어 보기로 한다.
캬아.
누군가는 기름 냄새를 맡으며 음식을 만들면 음식을 잘 못 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 기름 냄새를 맡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완성된 멘보샤의 맛이.
그렇게 한 입 씹으려는 찰나.
무언가를 잊었다는 생각이 뒷머리를 때렸다.
소스!
멘보샤에는 생선 가스의 타르타르소스 같은 소스가 필요하다.
다행히…… 얼마 전 생선 가스를 만들면서 남았던 타르타르소스가 냉장고에 있었다.
또 만들어야 되는 줄 알고 식겁했다.
그럼 시식 시간이 5분이나 늦춰진다고.
소스가 준비됐지만, 우선 아무것도 찍지 않고 그대로 한 입 가져간다.
바사삭.
튀긴 식빵의 굉장한 식감이 느껴진다.
조금 더 입을 움직이자 느껴지는 새우살.
부드럽고, 고소하며 풍부한.
왕- 하고 배어 문 후 입속에서 그 풍부한 식감과 향을 느꼈다.
튀긴 식빵과 함께 씹히는 탱글한 새우살이 일품이다.
그대로 손에 남아 있는 나머지 절반도 입으로 가져갔다.
입속은 감칠맛의 향연이다.
가득한 기름의 맛마저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게 느껴진다.
입안에 가득 들어 있던 멘보샤를 다 삼켜 낸 후.
그러고 보니…… 소스의 맛을 못 봤네?
이 멘보샤는 중요한 사람에게 줄 요리다.
소스의 맛을 보지 않고, 그대로 가져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혹시 모르지 않나. 소스가 상해 버렸을 수도 있고.
멘보샤와 이 소스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니, 반드시.
맛을 봐야 한다.
푸짐하게 만들었으니,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여러 번 맛을 본 후, 도시락 통에 멘보샤를 챙겨 들고 나왔다.
* * *
가락시장.
가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도매시장이 바로 이곳이다.
농산물, 수산물, 축산물 할 것 없이 매일 엄청난 물량이 이곳으로 모였다가 전국 각지로 흩어진다.
“여전히 크구나.”
오랜만에 와 본 가락시장의 규모에 놀랐다.
지난 생에서 장사 초년생 시절.
좋은 재료를 값싸게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일매일 식재료를 사러 왔던 곳이다.
가락시장에는 내가 돌아오기 전 기준 약 1,700여 개의 중도매인이 있었다.
중도매인은 경매에 참여해 농산물을 낙찰받는 사람.
경매는 가락시장 내의 도매시장법인에서 주관한다.
도매시장법인이 경매를 통해 판매하는 농산물을 마트, 시장 등 소비자의 단계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이 중도매인이다.
통상적으로 산지 농민들과 거래를 하는 도매상과는 또 다르다.
오로지 도매시장법인의 경매를 통해서만 중도매인은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중도매인의 하루는 저녁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보통 오후 5시에 입고가 시작되면, 현지에서 실어 온 물건을 내리고, 경매자들은 그 물건의 품질을 확인하고, 경매가 시작되고, 낙찰된 물건을 중도매인에게 배송하는 풍경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이 끝나는 시간이 대략 새벽 다섯 시.
내가 새벽부터 가게로 나가 멘보샤를 튀긴 이유이다.
물론, 다섯 시 이후라도 시장 풍경이 한가해지는 건 아니다.
그 이후에는 중도매인으로부터 물건을 사러 온 수많은 상인과 배송원이 가락시장을 채우기 때문.
바쁘게 움직이는 지게차와 화물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움직였다.
조심해야 한다.
이곳은 농산물 유통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쟁터와 다름없다.
정신줄 놓고 다녔다가는 다치거나 험한 말을 듣기 십상이다.
‘어디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려니 쉽지 않다.
게다가 시장이 좀 넓어야지.
상호명은 확실히 기억난다.
유림농산.
파란색 천막이 쳐져 있었고, 건물 끝 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다가 순간 내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게 보였다.
<토스트 2,000원>
크아.
아직은 서늘한 새벽 공기에 이리저리 돌아다녔더니 아까 맛보기로 먹었던 멘보샤는 이미 다 배 속에서 사라졌다.
다 모르겠고, 일단 토스트 하나 먹고 하자.
“아주머니. 토스트 하나랑 우유 하나 주세요.”
잠시 후 받아든 토스트는 딱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길거리 토스트였다.
고소하게 구워 낸 얇고 네모난 식빵에 계란과 각종 야채를 버무려 구워 낸 속까지.
그 위에는 설탕을 쫘악 뿌리고, 케찹으로 마무리했겠지.
음…… 맛있다.
목이 퍽퍽할 때쯤 우유를 넣어 주니 이건 뭐, 끝도 없이 들어갈 것 같다.
오늘 뭔가 식빵이랑 인연이 있나?
그렇게 토스트를 다 먹어 갈 때쯤.
고개를 젖혀 마지막 남은 우유를 밀어 넣고 있는데…… 간판이 보였다.
<유림농산>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역시…… 사람은 먹어야 돼.
배가 부르면 이렇게 안 보이던 것도 보이는 법이다.
“잘 먹었습니다!”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