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즐라탄을 닮은 사내
빅터 요한손.
22세의 이 스웨덴 청년은 선우네 백반의 단골손님이다.
스웨덴의 무슨 무슨 국립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이 친구는…… 한식을 무지 좋아한다.
“선. 우. 여기 김치…… 더 없어?”
“깍두기? 배추김치?”
“아니…… 그…… 굿김치…… 밧김치?”
“아…… 갓김치. 조금만 기다려.”
빅터가 활짝 웃는다.
그는 스웨덴의 유명 축구 선수를 닮았다.
얼굴이 길고, 코도 길고, 머리도 긴 그 선수는 슈팅력과 파워, 축구 센스를 골고루 갖춘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축구 매니아인 정육점 사장 호중이 형이 그를 처음 보고 한 말.
“즈…… 즐라…… 탄?”
“빅터입니다.”
“아…… 빅터…… 자네…… 축구 한번 해 볼 생각 없나?”
호중이 형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그는 영진시장 상인 조기 축구회의 회장.
누가 보기에도 축구를 잘할 것 같은 빅터를 영입한다면, 지역 조기 축구 대회 우승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단꿈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빅터는 생김새만 슈퍼스타였을 뿐, 공을 제대로 차지도 못했다.
이후로 조기 축구회가 그에게 쏟았던 엄청난 관심은 확 사그라들었다.
축구는 젬병일지 모르지만, 먹는 것 하나만큼은 정말 잘 먹는 빅터였다.
그래서 요즘엔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아이구, 잘 먹네. 눈깔 퍼런 놈이 저러코롬 야무지게 먹는 걸 보니까 왜 이렇게 나가 기분이 좋냐?”
“그러게 말이여. 아이구, 저거 보소. 손으로 김치 짝짝 찢어 먹는 것 보소! 하하하.”
“참말로 복스럽다. 복스러와…….”
빅터는 그런 아주머니들에게 늘 감사했다.
그냥 맛있어서 맛있게 먹을 뿐인데, 저렇게 좋아해 주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선. 우. 난 이 갓김치가 제일 맛있더라.”
“그래? 사실 이건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호불호가 나뉘는 김치인데.”
“호부로? 호부로가 뭐야?”
“음…… 그러니까…… 빅터처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야.”
“아…… 탄다는 거군.”
“탄다고?”
“취향 탄다고.”
저런 말은 또 언제 배운 걸까?
“선. 우. 이것 좀 더 주면 안 돼?”
빅터가 가리키는 건 어리굴젓.
와…… 어리굴젓도 대표적으로 취향을 타는 음식이다.
아예 생굴을 못 먹는 사람도 많고.
“그래. 갖다 줄게. 좀만 기다려.”
흐뭇한 마음으로 어리굴젓을 리필해 준다.
나도 아주머니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들이 맛있게 한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해지더라.
예뻐 보이고.
물론, 즐라탄을 닮은 빅터가 진짜로 예뻐 보인다는 건 아니고.
* * *
서울 시내의 고급 한정식집.
김흥범 교수는 세미나로 초청한 외국 교수들과 함께 식당에 와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는 음식들을 칭찬하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맛이 없어도 그냥 맛있게 먹어 주는지도 모른다.
자리를 만든 사람의 체면을 감안해서.
하지만…… 타인의 체면을 생각하더라도,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아 음식을 못 먹을 수도 있다.
브라질에서 온 산드라 교수.
그녀는 아까부터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젓가락만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김흥범은 그런 산드라가 마음에 걸렸다.
명색이 외식경영학과 교수인 그인데, 초청한 사람들이 음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는 대화를 나누는 도중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을 꺼낸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거기…… 선우네 백반이죠.”
- 네, 맞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영훈대학교 김흥범이라고 합니다.”
- 아, 교수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선우였다.
“혹시…… 지금 바쁘신가요?”
-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오늘 저녁에 제가 외국인 손님 한 분을 모시고 가려 합니다. 괜찮을까요?”
- 물론입니다. 지금 제 눈앞에도 한식에 미친 외국인 한 사람이 있거든요.
“아…… 근데, 그게…… 시간이 좀 늦을 것 같거든요. 스케줄에 맞추려면…… 영업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여덟 시 반쯤?”
- 아, 그러셨군요.
가만히 생각해 봤다.
김흥범이 이렇게 전화까지 할 정도라면…… 분명 평범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서울에 맛있는 한식집은 널려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 이름이 있는 그런 식당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는 건…… 데려간 식당에서 그 ‘외국인’이 만족을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겠다.
그러니 이렇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겠지.
외국인이라…… 근데 어느 나라 사람인 걸까.
- 그분이 어느 나라 사람이신가요?
“브라질 사람입니다. 맛있다는 한식집에는 다 데려갔는데, 어떻게 된 게 맛있게 먹는 걸 보지를 못했네요. 외식경영학과 교수로서 이대로 이분을 보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 아……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희 가게에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으신 거군요.
“네…… 저도 모르게 그냥 선우네 백반이 생각났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 아닙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럼 여덟 시 반에 오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례한 요청을 받아 주셔서.”
- 별말씀을…… 잘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휴-
전화를 끊은 김흥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선우라는 사람과 얘기하고 나면, 늘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이로 보면 자기가 가르치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수준인데, 어딘지 모르게 매우 깊은 구석이 있다.
그러다 보니, 왠지 까다로운 산드라 교수도 만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괜히 믿고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이선우라는 젊은 친구는.
* * *
장사를 하는 틈틈이 ‘브라질 교수님’을 위한 메뉴에 대해 생각했다.
김흥범의 요청을 덥석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로서도 걱정이 된다.
세미나에 초청한 교수라면…… 아마 맛집이란 맛집은 다 들렀을 텐데.
아침에는 호텔의 조식을 먹고, 점심과 저녁에는 유명한 식당에서 푸짐한 식사를 했을 거다.
더군다나 외식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는 교수들이니 더하면 더했지, 못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왜 만족하지 못한 걸까, 그 교수님은?
테이블에 나갈 제육을 볶으면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다.
만약 내가 그 브라질 교수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한 먼 나라에 초대받은 상황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을까.
화악-
볶던 고기에 불맛을 입힌다.
뜨거운 불길처럼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확 떠오른다.
‘그거였네!’
머릿속에서 브라질 교수를 위한 메뉴 구성이 완성됐다.
* * *
“산드라. 오늘 저녁은 교수님만 특별히 다른 곳으로 모시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오, 저만요?”
산드라가 큰 눈을 꿈벅이며 되묻는다.
“아, 데이트 신청 같은 건 아닙니다. 저도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라서.”
“호호.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냥 왜 저만 특별 대접을 받는지 궁금해서요.”
두 사람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세미나 기간 내내 산드라가 음식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아서요. 특히 한식을요.”
“아…… 그건…….”
산드라도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초청한 호스트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제가 아는 최고의 한식집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숙소가 있는 학교 근처이니, 부담 안 되실 거예요.”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여덟 시 반.
부모님을 비롯한 직원들은 이미 퇴근을 했다.
어머니가 끝까지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걸 말리느라 혼났다.
요새 김치를 만드느라 집에만 가면 파김치처럼 녹아내리시는 어머니다.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영업시간 외에는 푹 쉬셔야 한다.
오늘의 일은 내가 독단적으로 받아들인 일이기도 하고.
홀로 남아 있는 가게에 문이 스윽- 하고 열렸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쪽은 산드라. 브라질에서 온 교수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산드라예요.”
“안녕하세요, 이선우라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영어로 인사를 하고, 산드라와 악수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본 김흥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발음이 꽤 좋은데? 거기에다가 인사 매너가…… 너무 자연스러워.’
다소 놀란 듯한 김흥범의 반응이 느껴졌다.
제가 이래 봬도 해외에 꽤 많은 브랜드를 론칭했던 글로벌 외식 사업가…… 였습니다.
이 정도 영어쯤이야.
사실 내 영어는 비즈니스 회화 수준을 넘어섰다.
굳이 따지자면 상당히 유창한 수준이다.
외국 진출을 고려하여 틈틈이 공부를 하기도 했고, 실제 외국 출장과 단기간 거주 등으로 실전 영어 실력을 쌓았었다.
그러니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대화는 전혀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산드라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게 중요한 거지.
“자, 우선 앉으시죠.”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힌 후, 주방으로 들어왔다.
우선…… 보리차부터.
보리차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차이다.
차보다는 거의 물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지금처럼 생수가 보급화되지 않았을 어린 시절에는 커다란 스테인레스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는 게 어머니의 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뜨겁게 끓인 보리차는 식힌 후 주로 이 병에 담았다.
유리로 만든 주스병.
네모난 형태에 한쪽에는 손잡이 모양이 나 있는…… 주스를 사 마신 후 버리지 않고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는 용도로 썼던 그 병.
다행히도 그 오래된 병이 집에 하나 남아 있었다.
“먼저 보리차부터 한잔하세요.”
병을 들고, 테이블로 가자 김흥범이 흠칫 놀랐다.
“아니…… 이 병이 아직도 있어요?”
“네, 교수님도 이 병 아시죠?”
“그럼요. 와…… 오랜만에 보네. 산드라. 이 병이 뭐냐면요…….”
김흥범이 산드라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도중 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의 콘셉트는 ‘시골식 백반’이다.
백반에 무슨 시골식이 있고, 서울식이 있겠냐만…… 굳이 시골식이라 이름 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그만큼 투박하고, 투박하기에 한국의 정서가 잘 살아 있는 그런 상을 낼 계획이기 때문.
다행히 어제의 메뉴는 비빔밥이었고, 오늘의 메뉴는 제육볶음과 된장찌개였다.
내가 생각하는 시골식 백반의 주요 반찬들이 기본적으로 다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걸 운때가 맞았다고 하지.
커다란 쟁반에 가득 채운 반찬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반찬들을 본 김흥범 교수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흔하디흔한 시골 밥상 같은 반찬들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요청한 거긴 했지만…… 사실 김흥범은 나름 기대감도 있었다.
이선우가 뭔가 마법 같은 상을 차려 주지 않을까 하는.
그건 과한 기대였을 뿐이었다고…… 김흥범은 생각했다.
더불어 굳이 산드라를 만족시켜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어쩌면 쓸데없는 일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냥 ‘한식’을 안 좋아하는 거일 테니까.
반면, 차려진 상을 보는 산드라의 마음은 달랐다.
‘이건…… 내가 한국에 왔을 때 기대하던…… 그런 상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한정식이다.’
그녀의 첫 젓가락이 향한 곳은 바로 ‘갓김치’였다.
그녀는 기다란 갓김치를 자르지도 않고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 아삭, 후루룩.
긴 갓을 몇 번 씹더니 국수처럼 그대로 넘겨 버리는 산드라.
그 광경에 가장 놀란 건 바로 김흥범이었다.
그의 놀란 눈을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