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33화 (33/110)

#33화 꿈이라는 것

토요일 밤.

손님들이 모두 나간 뒤, 식당 정리도 마무리되어 갈 무렵.

가게 문이 스윽- 열렸다.

“희선아. 오랜만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네 친구 희선이가 서 있었다.

영진순댓국 오영숙 아주머니의 딸, 윤희선.

소꿉친구는 사춘기가 지나면서 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자와 여자.

너무 다른 두 ‘종’으로 극명하게 나뉘어져 버리니까.

희선이와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예전처럼 소꿉놀이를 하면서 손을 잡고, 네가 엄마, 나는 아빠하면서 놀진 않았지만.

그래도 간혹 연락하면서, 가끔씩 만나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그렇게 편하게 지내 왔었다.

물론, 그것도 딱 대학생 때까지.

그러니까 나의 경우엔 희선이를 15년 만에 보는 게 되겠다.

“오랜만이네. 윤희선.”

“새삼스럽게 무슨 오랜만? 잘 지냈냐?”

“보다시피.”

“배고파. 맛있는 것 좀 해 줘.”

“그래. 뭘로 해 줄까?”

나와 희선이가 흔하디흔한 동네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른들이 슬슬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험험. 그럼 우리는 식당 영업도 끝났으니까 이제 집에 가 보는 게 맞는 거겠지. 그. 렇. 지. 여. 보?”

마치 AI 같은…… 놀라울 만큼 어색한 아빠의 연기.

“그. 렇. 지. 여. 보. 너무 힘들다. 빨리 가서 쉬도록 하자. 자, 다른 분들도 어서 가시죠.”

역시 만만치 않게 어색한 고종숙 여사의 연기.

하여간…… 젊은 남녀만 모이면 다들 그런 쪽으로 생각하신다.

뭐, 대충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다.

전생에 나도 사십 대가 되어 보니 아주 조금은 느꼈으니까.

나를 둘러싼 로맨스는 빠르게 사라져 가고, 그러면 그럴수록 혈기 넘치는 젊은 사람들의 연애담이 궁금해진다는 걸.

게다가 나는 아들 아닌가.

결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세대의 어른들이다.

우리 부모님들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빨리 보내드리자.

“네,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마지막 손님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AI를 따라하는 말투로 어른들을 내보냈다.

가게 밖에 ‘영업 종료’라는 표시를 해 두고 돌아와 희선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모르겠어. 그냥 좀 매콤하고…… 스트레스 풀리는 음식?”

“오케이. 뭐가 됐든 만들어 볼게. 소주도 한잔할 거지?”

“그래야지!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 * *

매콤하면서 기분 좋아지는 음식이라…… 거기에 소주와 어울리는 음식이라면.

냉장고를 열어 남아 있는 재료들을 확인했다.

이러저리 둘러보던 도중, 검은 봉지에 싸여 있는 재료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낙지.

어제의 메뉴였던 낙지볶음을 하고 남은 재료였다.

생물이었으니, 하루 정도는 두어도 충분히 신선했다.

힐끗-

휴대폰을 보고 있는 희선이를 바라봤다.

어딘가 모르게 지쳐 있는 표정.

매콤한 낙지볶음은 지금 그녀에게 최적의 메뉴인 듯싶었다.

매콤한 양념으로 스트레스를 날리고, 영양가 풍부한 낙지로 기력을 보충한다.

완벽하군.

먼저, 대파와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준다.

청양고추는 특히 많이 썰어 놓는다.

매콤한 맛을 위해 필수적인 식재료니까.

잘 손질해 놓은 낙지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물기를 빼 준다.

물기 빠진 낙지는 미리 먹기 좋게 썰어 주는 게 좋다.

그래야 볶을 때 양념이 잘 스며드니까.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른 후, 송송 썰은 파를 넣어 파기름을 내어준다.

파가 노릇노릇하게 익고, 파기름 특유의 고소한 향이 나면 그 팬에 그대로 양념을 투하한다.

다진 마늘, 고추장, 설탕, 간장, 고춧가루.

아, 고춧가루는 청양고춧가루를 쓰자.

오늘의 콘셉트는 스트레스를 해소해 줄 매콤한 낙지볶음이니까.

탈 듯 말 듯 양념이 볶아지면, 낙지를 넣을 타이밍이다.

미리 삶아 놓은 낙지와 썰어 놓은 청양고추를 넣고 센 불에 화악 볶는다.

중간중간 팬을 움직여 불맛을 입힌다.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낙지의 단백질이 불과 닿으면서 내는 향기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그렇게 완성된 낙지볶음을 들고, 희선이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향한다.

짠.

“냄새 죽이지?”

“어…… 기다리면서 완전 죽을 뻔했어. 와…… 너무 맛있겠다.”

“먹어 봐.”

“자, 아무리 배가 고프지만 건배는 하고 시작해야지.”

희선이는 소주병을 까서 술잔을 채웠다.

쿨렁쿨렁.

소주병을 타고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청아했다.

“짠.”

투명한 소주잔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화끈하게 한 잔을 마신 희선이의 젓가락이 빠르게 낙지볶음으로 향했다.

오동통한 낙지 다리 살이 희선이의 젓가락에 걸려들었다.

오물오물.

매콤한 낙지가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

내가 직접 씹는 게 아닌데도 잘 느껴졌다.

희선이의 눈이 확- 커졌다.

“와! 너무 좋은데!”

“괜찮지?”

“어. 적당히 매콤하고, 낙지는 정말 신선하고. 이선우. 안 본 사이에 요리 실력 많이 늘었다?”

“그래? 고맙다. 훗.”

당연하지.

15년 동안 내가 얼마나 X……고생을 해 가며 요리를 배우고, 식당을 해 왔는데.

안 늘었으면 이상한 거지.

소주 한 잔.

낙지 한 입.

다시 소주 한 잔.

그리고, 낙지 한 입.

단순한 패턴에도 희선이에게는 질린 기색이 없었다.

희선이는 그런 과였다.

한 가지 음식을 집중해서 먹는 그런 과.

지난번에 다녀간 우성진이 여러 가지 반찬을 놓고 먹는 걸 좋아한다면, 희선이는 맛있는 한 가지 반찬만으로 밥을 두 공기 먹는 그런 애였다.

그걸 아는 나는 다른 걸 만들 생각이 없이 그저 낙지볶음을 푸짐하게 만들었던 거고.

“공부는 할 만해?”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병째를 마실 때였다.

적당히 배가 찼다 싶어 내가 물었다.

“공부? 에휴…… 우울한 얘기 하지 말자.”

밝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지금 교육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영어교육과라고 했었나?

영문학과를 나온 그녀는 취직 대신 대학원 진학을 택했다.

중등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영 행복해 보이질 않는다.

“왜? 공부 재미없어?”

“너 같으면 재미있겠냐? 알면서 왜 그래. 내 꿈은 다른 거라는 거.”

“응?”

갑자기 벙찐 기분이 되었다.

아, 그랬었나?

희선이의 꿈은 교사가 아니었었나?

그러고 보니…… 지난 생에서의 희미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 희선이 얘기 들었어? 어렵게 들어간 교사 그만뒀대.

- 왜? 걔 공무원 되는 게 꿈이었던 거 아니었어?

- 사고가 있었나 봐. 학생들한테 매를 들었는데…… 그걸 또 다른 애가 영상으로 찍어서…… 하여간, 일이 커져서 그만뒀대.

- 아이고…… 어떡하냐. 공무원이 꿈이었던 애인데.

- 야, 기억 안 나? 걔는 OO 공무원이 꿈이었잖아. 교사가 아니고.

- 아…… 그랬었나?

어느 날 동창회에서의 추억이다.

그런데…… ‘OO’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때의 이선우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가끔씩 만나 서로의 고민을 털어 놓던 이때의 이선우라면, 그녀의 진짜 꿈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OO 공무원이라…….

젠장.

몸은 젊어졌는데, 기억력은 안 좋아진 건가?

‘소방’ 공무원인가?

“불을 끄는 일은 참 멋있는 일이지. 그렇고 말고.”

희선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사실 7급 공무원 정도 되어야지. 그래야 중요한 일도 좀 하고…… 아, 5급? 행정……고시?”

그녀의 표정이 더 우그러진다.

“흠흠. 아! 역시 가장 멋있는 공무원은 바로! 기술직 공무원이지! 요새는 공무원도 전문성이 있어야 되거든.”

휴…….

희선이가 커다란 한숨을 쉰다.

이것들이 아니면 뭐지?

아……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이럴 때는 그냥 이실직고하는 편이 좋다.

“희선아. 미안한데…… 내가 요새 너무 바빠서 기억력이 좀 별로다.”

“경찰! 경찰 공무원!”

빽- 하고 소리친 희선이가 가득 부은 소주를 한입에 때려 넣는다.

“아, 맞다! 경찰이었지!”

이제야 생각이 난다.

OO은 바로 경찰이었다!

기억이라는 게 참 웃기다.

생각나고 나서야 이게 맞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니까.

왜 생각나기 전에는 그렇게 머릿속이 깜깜한 건데?

기억나고 나니, 다른 생각들도 같이 달려온다.

경찰대학에 가겠다는 걸 희선이 부모님이 말렸던 일.

결국, 부모님을 이기지 못하고 영문학과에 갔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경찰이라는 꿈을 마음속에서 놓지 못했던 희선이의 모습.

사실…… 희선이의 이미지와 경찰이라는 직업이 잘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희선이는 X이슬 대신 진짜 이슬만 마시고 화장실도 안 갈 것처럼 생겼으니까.

확실히 순하고, 다소곳하게 생겼다.

전형적인 모범생의 느낌이 나는…… 미녀.

하지만, 실제 희선이는 달랐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화끈한 성격에 운동도 꽤 잘했다.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스타일이고.

“잔치국수…… 어때?”

분위기도 전환할 겸, 매콤한 속도 달랠 겸 잔치국수를 만들기로 한다.

멸치, 다시마 육수를 내는 동시에 국수를 삶는다.

육수와 국수가 끓는 동안, 고명으로 얹을 재료를 만든다.

그냥 단출한 시골 할머니식 잔치국수인지라, 고명도 김과 다진 김치만 들어갈 예정이다.

적당히 익은 김치를 잘게 다지고, 김은 투명 봉지에 넣어 부수어 준다.

예쁘게도 할 것 없이 그냥 투박하게.

잘 익은 국수를 찬물에 빡빡 씻은 후, 물기를 빼낸다.

그릇에 탱글탱글해진 국수를 담고, 잘 우러난 육수를 붓는다.

그 위에 김치와 김을 얹으면 완성.

“잔치국수 나왔습니다.”

김을 뿜어내는 국수를 보고도 희선이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삐졌나 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이십 년 지기 친구가 엊그제까지도 기억하고 있던 걸 까먹어 버렸으니.

“미안해. 요새 갑자기 너무 바빠져서 기억력이 진짜 예전 같지 않다. 자, 먹어 봐. 국수는 맛있어.”

“야. 다음에 또 까먹어 봐. 그땐 절교다.”

다행히 희선이는 꽁한 감정을 오래 갖고 있는 녀석이 아니다.

이 한마디로 그녀는 마음을 풀었을 거다.

문제는…… 다음에 진짜 또 까먹을 경우 농담이 아니라 진짜 절교를 할 거라는 거지만.

후룹.

캬.

희선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다소 차가웠던 분위기가 뜨거운 국물과 함께 쫙 풀리는 순간이다.

그렇게 먹다 보니, 문득 아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희선이 교사 관뒀대…… 사고가 있었나 봐…….

음…… 그게 그냥 사고였을까?

어쩌면 교사가 되고서도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한 희선이의 발악 같은 건 아니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쉽게 말할지도 모른다.

교사도 좋은 직업 아니냐고.

교사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그리고, 경찰과 교사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교사를 고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선택한다고 해서 그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인 건 아니다.

음식도 하나만 파는 게 윤희선이다.

꿈이라고 다르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꿔 온 그 꿈 하나만 계속 생각하는 게 내가 아는 윤희선이라는 사람이다.

“일반 경찰도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도전해 보는 게 어때?”

그러니까, 경찰 대학이 아니라도…… 경찰이 될 수 있는 길은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러고 싶지.”

오.

역시 윤희선이다.

그녀는 경찰대학을 나와 출세를 하고 싶다는 그런 개념으로 경찰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냥 ‘경찰’이 되고 싶은 거지.

“부모님이 걸려서?”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녀는 다시 소주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까지 들어간 등록금도 아깝고…… 부모님 설득할 자신도 없고.”

“음…….”

그 이후론 잠시 말이 끊겼다.

우리는 조용히 소주잔을 나눴고,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세 병째의 소주가 다 떨어졌을 때쯤.

술기운을 빌려 내가 말했다.

“후회는…… 오직 네 몫일 거야.”

“어?”

“네 선택에 대한 후회는…… 누구도 나눠지지 않는다고. 아니, 나눠질 수가 없지. 그런 건.”

“아…….”

“그러니까…… 그냥 네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 나중에 가 보지 못한 길을 후회하지 말고.”

희선이는 ‘제법 어른인 척한다.’는 말로 내 진지한 조언을 웃으며 넘겼다.

나 진짜 어른인데…… 심지어 미래의 네 모습을 알기까지 하는.

그러니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무조건, 네 꿈을 향해 가라.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하고 싶은 걸 해, 윤희선.

음식도 한 가지만 파는 네 성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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