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행복 식당-29화 (29/110)

#29화 추억의 봄동 겉절이

“호오.”

가게로 들어온 정인태가 놀란다.

생각보다 가게가 크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다.

문은 한쪽에 있지만…… 가게를 확장한 거구나.

두 번째로 놀란 이유는 생각보다 많은 손님.

사실상 빈자리가 없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높은 솔 톤으로 인사하는 주인 아주머니.

“저…… 혼자인데요.”

왠지 이렇게 손님이 많고 바쁜 가게에는 혼자 들어가는 게 좀 민망하다.

괜히 혼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한 번 시도해 보고 자리가 없으면 나갈 마음을 먹는 정인태.

“저 자리 괜찮으세요? 넓은 자리 드리면 좋은데 보시다시피 지금 좀 손님이 많아서.”

“아, 괜찮습니다. 저기 앉겠습니다.”

주방 바로 옆 2인용 테이블 자리.

정인태로서는 오히려 좋았다.

저 자리라면 자리 차지한다고 눈치 볼 일은 없겠다.

어차피 정인태가 앉은 반대편은 주방 동선 때문에 앉기 쉽지 않을 듯하니, 사실상 1인석이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음식이 나왔다.

봄동 겉절이가 비빔밥용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계란프라이가 노란 해처럼 떠 있었다.

공기밥은 따로 나왔고, 그 옆에서는 된장국이 김을 뿜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찬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깍두기부터 시작해서 비엔나 소시지, 감자볶음, 파래 김과 몇 가지 나물.

눈으로 보기에도 꽤 훌륭한 구성이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정인태는 우선 공기밥을 대접에 옮겼다.

따로 제공된 참기름을 한 숟갈 넣고 쓱쓱 비비기 시작했다.

계란프라이, 밥, 봄동 겉절이가 어우러지면서 합쳐졌다.

비빔밥의 매력이라면 바로 이런 거다.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들이 합쳐지면서 생겨나는 또 다른 맛.

혹자는 비벼 놓으면 맛이 다 똑같아진다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얘기다.

어떤 재료끼리 만나느냐에 따라 비빔밥은 더 맛있어지기도 하고, 그냥 온갖 것들을 때려 넣은 잡스러운 밥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단순한 구성이 참 좋네.’

이 집 봄동 겉절이 비빔밥은 시골 어머니의 밥상이 떠오를 정도로 단출했다.

메인 재료인 봄동 겉절이의 맛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디 한번 맛을 볼까.

숟가락에 비빔밥을 가득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아삭아삭.

제철의 봄동 겉절이는 신선했고, 어우러진 양념은 완벽했다.

거기에 갓 지은 것 같이 고슬고슬한 밥.

참기름과 계란프라이가 같이 만들어 내는 고소함의 하모니.

‘와…….’

이건 진짜다.

정인태는 이 한 입을 먹어 보고 알았다.

이 시장 골목의 백반집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그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아들이 대학교수인 줄 알고 있다.

매 학기 매 학기가 평가 대상이며, 아르바이트 시급도 안 되는 박봉에 시달리는 시간강사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계신다.

거짓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 그냥 대학교수인 줄 아셨던 거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설명드렸지만…… 제대로 이해를 못 하신 듯했다.

어쩌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간 아들이 그렇게 될 거라 믿으면서 그 ‘언젠가’의 아들의 모습을 지금의 모습이라고 믿고 계신 걸지도.

스윽.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다.

혼자 와서 밥 먹는 것도 그런데, 누가 봐도 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이 비빔밥을 먹으면서 운다?

남들 눈에까지 처량해 보이는 건 싫다.

애써 안 좋은 감정들을 억누르며, 밥을 욱여넣는다.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욱여넣는 족족 신나게 씹어 넘긴다.

민망해서 밥을 욱여넣는 건지, 너무 맛있어서 빨리 먹게 되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 * *

“맛있게 드셨어요?”

카운터에는 선우가 서 있었다.

정인태가 카드를 꺼내 내민다.

“네, 너무 맛있었습니다. 봄동은…… 어디서 가져오시는 건가요?”

“음…… 글쎄요. 저희도 식자재 유통하시는 분께 받아오는 거라서. 그건 왜 물으시죠?”

“아…… 별건 아니고요. 제 고향이 여수인데, 여수에서 먹던…… 그러니까 어머니가 해 주시던 그 봄동 겉절이의 맛이랑 너무 닮아서요.”

“아…… 그러셨군요.”

“네…… 여하튼 너무 잘 먹었습니다. 참, 혹시 동의보감 아시죠?”

“동의……보감이요? 네, 알고는 있습니다.”

동의보감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그 책을 읽어 본 사람도 거의 없을 테지만.

이 남자는 왜 갑자기 동의보감 얘기를 꺼내는 걸까.

말을 받아주면서 슬쩍 남자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책을 본다.

- 사서삼경의 현대적 이해.

사서삼경.

그러니까, 중국 고전 말하는 건가?

남자의 이야기는 계속 됐다.

“동의보감에 보면 봄동이 찬 성질을 갖고 있어서 몸에 열이 많은 사람에게는 참 잘 맞는다고 나와 있거든요.”

“아…….”

“특히 겉절이로 무쳐 먹으면 입맛을 돋우는 데 아주 좋지요. 게다가 겨우내 얼어 있던 땅에서 자라 올라오는 게 봄동 아니겠습니까? 크흐…… 그 생명력.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몸에는 그렇게 좋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하하.”

동양학을 공부하신 학자이신가?

그러고 보니, 길게 기른 머리와 두꺼운 안경이 인상적이다.

입은 옷 또한 범상치 않다.

이런 걸 개량 한복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너무 잘 먹었습니다.”

동양학 학자는 말이 너무 길었다 싶었던지, 이 말을 끝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동의보감이니 생명력이니 말을 하고 갔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이것 아닌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손님 한 분 한 분 받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그거면 됐다.

잘 드셨으면, 맛있게 드셨으면 된 거다.

개량 한복을 입었어도.

말씀이 좀 많으셔도.

맛있게 먹었으면…… 그거면 된 거다.

* * *

지난 생에서 참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

- 처음에 왜 외식 사업을 하게 되신 겁니까?

음…… 딱히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대학교 전공은 적성과 맞지 않았고, 마침 부모님이 식당을 하고 계셨다는 게 계기라면 계기일까.

그러다가 어느 날 수도 없이 받은 그 질문을 다시 받았는데…… 무슨 계시처럼 답이 떠올랐다.

- 제가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이 말이야말로 ‘왜 외식 사업이냐’라는 질문에 가장 나다운 답이 될 것이다.

먹는 걸 좋아했고, 음식을 주제로 얘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힘겨운 과정 속에서도 덜 지쳤고,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만드는 이 음식…… 이게 좋으니까.

그건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좋아진다.

이제는 확실하게 알게 됐거든.

내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물론, 맛있게 먹기 위한 운동은 필수이다.

백조가 수면의 바닥에서 열심히 갈퀴질을 하는 것처럼.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도 건강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휴일에는 맛집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두고, 먹으러 다니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으니까.

지난 생에서도 수도 없이 많은 맛집을 다녔다.

하지만, 그때의 맛집 투어는 사실상 전투에 가까웠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도 이건 무슨 재료를 썼을까, 이 소스는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이 가격에 이 퀄리티를 어떻게 낸 것일까.

이런 생각들만 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아쉬웠지.

그치만, 이번 생은 좀 다르다.

순전히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한 그런 맛집 투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투어를 위한 파트너 한 사람을 낙점했다.

맛집 투어는 혼자 다니는 게 좋을 때가 많다.

같이 가는 사람의 성향을 고려할 필요도 없고, 내가 원하는 음식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혼자 움직일 때는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맛있는 메뉴를 전부 먹어 볼 수 없다는 거.

위장에는 한계가 있고, 그걸 다 시켜서 포장해 올 수도 없다.

어차피 포장한 음식은 맛도 떨어지고.

그래서 최적의 파트너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첫째, 음식을 좋아해야 한다.

둘째, 많이 먹어야 한다.

셋째, 가리는 게 없어야 한다.

넷째, 밥을 먹을 때는 앞에 있는 사람보다도 음식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는데…… 있더라.

아주 가까운 곳에.

서울 동대문 근처에 위치한 한 지하철역 앞.

먼저 나와 출구 앞에서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기요.”

살짝 손을 흔들어 표시했더니, 달려오는 사람.

“안녕하세요, 사장님.”

바로 이초희였다.

게스트북 ‘외식홀릭’의 운영자이자, 선우네 백반의 비공식 온라인 홍보대사이자, 선우네 백반 최초로 무한리필 자격을 부여받은 그 사람.

차라리 마케팅 업체에게 홍보를 맡기지 왜 저 사람한테 홍보를 맡겨서 가게 살림 다 거덜 내냐고 아버지에게 핀잔을 듣게 했던 그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홍보 덕분에 멀리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줘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는 그 사람.

무엇보다 맛집 투어의 파트너로서 더 나은 사람도 찾기 힘든 바로 그 사람, 이초희다.

“바로 갈까요?”

“네.”

가타부타 말이 필요 없다.

우리는 조금 걸어가서 오늘의 목적지로 입성했다.

[원조 할머니 떡볶이]

커다란 간판에 할머니 사진이 박혀 있는…… 떡볶이 마니아라면 결코 안 가봤을 수 없는 그 즉석 떡볶이집이다.

오픈 시간에 맞춰 오니, 별 기다림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 탐색부터.

“일단 세트로 갈까요?”

“4인.”

“4인.”

풉.

우리는 동시에 ‘4인’을 외쳤다.

<떡 4, 오뎅 1, 라면 2, 쫄면 2, 만두 4>

4인 세트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사리는요?”

“음…… 하나씩 말해 볼까요?”

“오뎅 하나.”

“계란 하나.”

“저도 계란 하나.”

“하나에 두 알입니다.”

“그러니까요.”

“아…….”

“치즈떡 하나.”

“…….”

“없으시면 계속 제가. 치즈 하나.”

“…….”

“주먹밥…… 음…… 볶음밥으로 하죠. 전 여기까지.”

여기까지라…… 그런 말은 뭔가 절제하고 있을 때 쓰는 말 아닌가?

둘이 와서 4인 세트를 시키고, 온갖 사리를 다 추가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콜라 하나.

이초희는 환타 하나.

원조 맛집답게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들어왔고, 손님들을 감당하기 위해 음식은 빠른 속도로 나왔다.

보글보글.

맛나 보이는 떡볶이가 냄비 위에서 잘 끓고 있었다.

“쌀떡, 밀떡?”

“둘 다요.”

“음…… 저도 둘 다 좋은데, 떡볶이에는 그래도 밀떡이죠.”

“그런 건 편견이에요, 사장님. 모든 떡은 다 자기만의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호오, 존재 가치라.

떡볶이 떡에 대고 그렇게까지?

아무리 봐도 파트너 선택 잘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 먹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는 사이 떡볶이는 거의 다 익어 갔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라면 사리를 듬뿍 건져서 그릇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담았다.

꼬들꼬들한 면발이 떡볶이 국물과 만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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