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부장님, 밥값은 내주시죠
장사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의 일과를 기록하는 시간.
이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메뉴 레시피, 장사에 대한 것, 매출, 수익, 서비스 등등.
이런 것들을 주로 기록하긴 하지만…… 이런 건 어쨌든 일이다.
조금 귀찮더라도 처리해야 하는 일.
그런 기록을 하면서 그날의 일과를 떠올리다 보면,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
혹은 기억에 남는 사소한 순간이라든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을 기록해 둔다.
이런 것도 하나의 작은 이야기니까.
선우네 백반이 유명해지면서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의 수도 늘어났다.
오늘 기억나는 손님은 조금 멀리서 온 듯한 회사원 무리였다.
“팀장님, 여기 백반이 그렇게 맛있답니다.”
“그렇다며. 그러니까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 아냐.”
“야, 김 대리. 맛만 없어 봐. 부장님 여기까지 모셔 와 놓고.”
“과장님. 그럴 리 없습니다. 여기 완전히 검증된 데라니까요. 하하하.”
일행은 총 네 명이었다.
각각 부장, 과장, 대리, 사원인 모양.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게 전형적인 사무직의 모습이었다.
보수적이고 딱딱한 조직의 느낌.
자리가 만석이 되어 메인 요리를 만들 일이 없던 나는 그들을 잠시 지켜보았다.
“민수야. 뭐 하냐?”
“예?”
“예에? 하 나 진짜. 수저 안 놔. 수저!”
“아, 맞다. 죄송합니다.”
민수라 불린, 그러니까 가장 막내인 듯한 사람이 헐레벌떡 수저통을 열어 수저를 놓았다.
김 대리는 각 자리에 수저를 받쳐 줄 휴지를 깔고.
그것도 부장부터 사원까지 순서대로.
과장은 물을 따랐다.
이런 것조차도 그들만의 룰이 있는 모양이었다.
훗.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났다.
직급이 뭐라고, 부장, 과장, 대리 이런 게 다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지.
하긴…… 나조차 저렇지 않았던가.
지난 생에서 회사를 운영할 때,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저 부장처럼 가만히 대접을 받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었을 거다.
어쨌든 ‘회장’이라는 직함까지 달고 있었으니.
여기서 포인트는 기억이 안 난다는 거다.
원래 대접을 받는 입장에서는 잘 기억을 못 한다.
저기 있는 막내 민수 씨만 속으로 씩씩거리고 있겠지.
안순미 아주머니가 김치찌개를 그 민수 씨에게 먼저 주었다.
안순미는 ‘어차피 제가 다 놓을 거니까 그냥 놔두세요.’라고 말했지만, 대리와 과장이 그 꼴을 보고 있을 리 없다.
얼른 민수 씨 앞에 놓인 뚝배기를 들어 부장의 앞에 가져다준다.
부장은 아니라고, 됐다고 하면서도 그걸 받는다.
대리는 사원을 한 번 힐끗 바라보며 눈치를 준다.
먹기 전부터 안 좋은 소리를 들어서인지 밥을 먹는 민수 씨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도 티를 낼 수는 없다.
사원이 어떻게 부장 앞에서 기분 나쁜 티를 내겠는가.
그렇게 그들의 식사가 끝나고.
잠시 테이블을 치우러 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카운터에 서 있었다.
예의 회사원 무리가 계산을 하러 다가온다.
부장이란 사람이 카드를 내미는데.
“육천 원 계산해 주세요.”
이런다.
흠.
언제나 고객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상황도 아니었을 텐데, 눈칫밥을 먹은 민수 씨가 괜히 마음에 걸린다.
“어라. 오늘 부장님께서 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나서서 너스레를 떤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슬쩍 눈치를 준다.
“부장님,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나머지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 주르르 나간다.
“허허. 자식들이…… 그걸로 다 긁어 주세요.”
“네. 이만 사천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밥값 육천 원.
이게 민수 씨한테 무슨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
다만, 눈치 보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민수 씨가 밥값을 내는 게 괜히 안타까웠다.
그리고…… 후배 직원들이랑 같이 먹을 거면 부장이 내야지.
원래 직급이 올라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소소한 일들을 기록해 두는 거다.
하나하나의 기록이 나중에는 소중한 추억이 될 테니까.
야생마처럼 달려왔던 지난 생의 삶이 생각난다.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달렸던 인생.
이번 생은 주변도 살피고, 뒤도 돌아보면서 천천히 나아가야지.
야생마보다는 꽃마차를 타고 가는 기분으로.
소소한 행복을 느껴 가면서.
기록을 끝내고, 하루 일과의 끝으로 게스트북을 둘러봤다.
#선우네백반
이초희, 그러니까 외식홀릭 말고는 거의 게시물이 없는데, 어떤 글 하나가 눈에 띈다.
[점심때 회사 사람들이랑 백반집에 갔다.
오늘도 숟가락 늦게 놨다고 김 대리님한테 한 소리 듣고, 먼저 나온 국이 내 자리로 먼저 와서 오 과장님한테 눈치를 받았다.
이놈의 센스는 언제나 좋아질는지.
눈치 보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김치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눈치 보는 척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계산할 때…… 젊은 사장님의 센스 때문에 기분 겁나 좋아졌다.
육천 원만 내고 튀려는 부장님한테 ‘부장님이 쏘는 거 아니냐?’ 말하면서 부장님이 다 계산하게 만들어 주셨다.
맛있는 음식을, 그것도 공짜로 먹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사장님! 맛도 센스도 최고!
#선우네백반 #영진시장 #신입사원회사적응기]
음…… 그래도 맛있게 먹었구나?
고개를 박고 밥을 먹던 게…… 의기소침해져서가 아니라, 눈치 보는 척하면서 맛있게 먹었던 거였구나.
괜히 피식- 웃음이 난다.
어쨌든, 잘됐다.
맛있게 먹은 거니까.
음식 만드는 사람은 다른 거 없다.
그냥 내가 만든 거 맛있게 먹어 주는 게 최고지.
* * *
두 시 삼십 분.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녁 장사 준비를 막 시작하려는 타이밍.
하루 중 가장 손님이 적고, 한가로운 그 시간.
이 시간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그는 오늘의 백반 메뉴가 뭐든지 간에 늘 김치찌개를 시켜 먹는다.
감자탕, 삼겹살 정식, 돈가스, 굴국밥…… 하나도 안 먹었다.
그에게 ‘7분 김치’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 나가는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서 딱 7분 만에 다 먹고 나가기 때문이다.
반찬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는다.
계란말이 한두 개 정도 집어먹고 마는 정도.
당연히 말은 한 마디도 없다.
7분 만에 그 뜨거운 김치찌개를 다 먹으려면 반찬 하나 집어먹을 시간도, 말 한 마디도 할 수 있는 시간도 없는 게 당연했다.
스윽-
오늘도 두 시 반에 어김없이 문이 열리고, 그 손님이 들어왔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 됐으려나.
수염이 덥수룩하고, 검은색 뿔테 안경이 인상적인 남자다.
그는 옷도 늘 입는 것만 입는다.
짧은 패딩 점퍼에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
이제 우리도 그에게 뭘 먹을지 묻지 않는다.
아니, 그냥 두 시 반에 맞춰서 김치찌개를 끓여 놓는다.
어차피 한가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바쁘면 7분 만에 김치찌개를 먹고 나가겠냐는 게, 우리의 판단이었기 때문.
오늘도 어김없이 7분 만에 찌개를 해치운 ‘7분 김치’ 님이 계산을 하고 나갔다.
그가 나간 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홍보대사 황종훈 아저씨.
“오늘은 늦으셨네요?”
“아…… 아침을 좀 늦게 먹어서.”
“오늘의 메뉴로 드릴까요?”
“오케이!”
황종훈에게 찌개를 내어 가면서, 가만히 물었다.
“아저씨 혹시…… 아까 아저씨 들어올 때 나갔던 사람 누군지 아세요?”
“아까? 아…… 찬호 말하는 거야?”
역시 아저씨는 모르는 게 없다.
이 시장에서만큼은 아저씨는 정보통 그 자체다.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 많이 퍼트리기도 하고.
“그분 이름이 찬호인가 보군요.”
“응, 이찬호. 이진택 씨네 둘째 아들.”
이진택이라……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만 같은 이름인데…… 아!
“대로변에 있는 이진택 내과의 그 이진택 원장님이요?”
“그래, 그 이진택.”
오…… 다소 의외였다.
의사라는 직업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
그런 의사의 아들이라면…… 왠지 지금의 이찬호와의 모습이랑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이것조차 내 편견에 불과하겠지만.
“찬호는 왜? 뭐 문제 있어?”
황종훈이 반찬으로 나온 진미채볶음을 질겅질겅 씹으며 묻는다.
“아뇨, 문제라기보다는…… 저희 단골손님이거든요. 매일 같은 시간에 오셔서 같은 메뉴를 같은 시간 동안 먹고 가는. 어쩌면 조금은 특이한 단골손님?”
“아…… 그래서 궁금해했구나. 특이해서.”
“뭐, 그렇다고 봐야죠.”
“그…… 걔가 걸린 병이 뭐라더라? 그…… 강, 뭐라고 했는데…… 강…… 강압증? 강요증?”
“설마 강박증?”
“오, 그래. 강박증! 걔가 그 병에 걸려서 그런 거래. 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고, 똑같은 밥만 먹고…… 요 앞 마트에도 만날 똑같은 시간에 등장해서 똑같은 음료수를 사간다잖아.”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강박증.
잘은 모르지만, 똑같은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그런 정신 질환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지.
“뭐, 심한 건 아닌데…… 암튼 그렇대. 걔가 공부도 무지하게 잘했었는데…… 대학 시험을 세 번인가 망쳤다나? 한 해는 설사병 나서 망치고, 한 해는 늦잠 자서 시험 못 보고, 한 해는 아침에 오다가 사고가 나서 못 보고……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지.”
“그럼 그때부터…….”
“그래. 그때부터 저 몹쓸병이 시작된 거지. 아버지는 의사, 엄마는 대학 교수. 형도 아버지 뒤를 이어 의대에 갔고, 일 년 차이 나는 여동생은 사법고시 합격. 그 부담감을…… 못 견뎌 버린 것이지.”
“아…….”
7분 김치, 그러니까 손님 이찬호의 비밀은 이런 거였구나.
사연을 알게 되니,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주변의 기대가 그에게 얼마나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을까?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좋은 환경이 사실은 그를 옭아매는 덫이었던 거다.
의대에 가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너져 버리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삼 년 연속으로 시험을 못 보는 불상사라니…… 아저씨 말대로 진짜 운도 지지리 없는 분이구나.
예상치 못한 행운은 자신을 뭘 해도 ‘되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반복되는 불운은 자신을 뭘 해도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생에서 나도 비슷한 감정을 겪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몇 달 후, 이 백반집 주방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하늘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걸까.
그냥 확…… 여기서 그만…….
해서는 안 될 최악의 생각도 했었다.
이찬호 씨의 마음도 비슷할 거다.
매일 김치찌개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일종의 피난처인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창을 연다.
‘강박증에 좋은 음식’
검색어를 집어넣었더니, 주르륵 링크가 달린다.
- 강박증에 좋은 음식 세 가지를 알아보자!
- 강박증 극복하려면…… 이것부터 챙겨 먹어라.
- 강박증에 추천하는 음식
몇 가지 링크를 열어 보니, 공통적으로 추천하는 음식이 몇 가지 있었다.
강박증에 좋은 ‘세로토닌’은 직접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쩌구저쩌구.
뭐, 이런 설명들은 잘 모르겠고.
멸치, 바나나, 견과류, 시금치.
그중 김치찌개에 적용할 만한 건?
내일은 7분 김치, 아니 이찬호 씨만을 위한 김치찌개를 만들어야겠다.
* * *
선우네 백반의 김치찌개는 먼저 돼지 앞다리살을 볶아서 기름을 내고, 그 기름에 김치를 볶아 만든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인 것.
참치냐, 돼지냐.
김치찌개 메인 재료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선우네는 돼지의 편에 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 앞으로 이찬호 씨에게 나갈 김치찌개는 참치 김치찌개가 될 것이다.
‘멸치’ 육수를 기본 베이스로 한.
나로서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매우 선호하긴 하지만,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멸치 육수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시간은 두 시.
점심 장사도 끝나가고…… 슬슬 준비를 시작해 볼까.
우선 참기름을 냄비에 두르고, 김치를 넣어 달달 볶는다.
설탕을 좀 넣어 주면 좋다.
단, 김치의 신맛에 따라 설탕량은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김치색이 투명해지면 양파를 넣고 역시 달달 볶는다.
김치와 양파가 어느 정도 익으면 미리 만들어 둔 멸치 육수를 붓는다.
국간장으로 1차 간을 하고, 마늘도 조금 넣어 준다.
기름을 뺀 참치를 넣어 주고, 다 끓을 때쯤 썰어 놓은 청양고추와 대파를 넣어 준다.
10분 정도 더 끓이면…… 이찬호 씨를 위한 특별한 김치찌개 완성.
물론, 그다지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돼지고기 대신 참치를 넣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거라고……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때 스윽- 문이 열리고, 7분 김치가 등장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두 시 반.
이렇게 딱 맞추기도 쉽지 않을 텐데…… 강박증이라는 것도 참 힘들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