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꼬막비빔밥 (1)
생각에 잠겨 있는 이재동에게 선우가 다가갔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아, 아니야. 와…… 냄새 좋다.”
이재동이 생각에 잠긴 사이 선우가 완성된 요리를 들고 왔다.
“냄새 좋지? 강원도 최고의 황태 덕장에서 말린 최상급 황태채에 내 요리 실력을 더하니 냄새가 좋지 않을 리가 있겠냐?”
“아이고, 잘났다. 인마.”
“그래. 어서 맛이나 한번 봐 봐.”
“오케이.”
이재동은 먼저 국물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오우.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성.
다시 한번 더.
크으.
이번엔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의 소리.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황태해장국 특유의 국물 맛이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국물에 이어 황태채와 두부도 순서대로 맛을 보았다.
황태채에는 무슨 짓을 했는지 고소한 기름향이 잘 배어 있었고, 국물을 머금은 두부는 부드러움의 끝판왕이었다.
“아…… 너무 좋다.”
저절로 좋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맛있지?”
“응. 너무 좋은데?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 맞아?”
“참나, 사람이 두 눈 뜨고 보고도 안 믿네. 방금 내가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서 들고 나오는 거 못 봤어?”
“보긴 봤는데…….”
재동이의 표정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긴, 그럴 만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현실의 팍팍함을 잊고자 같이 게임을 하던 친구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제부터 바뀐 이 모습에 적응해야 할 거다.
내가 재동이 너를 그냥 이대로 무너지게 두진 않을 거니까.
“어머니. 아까 준비해 주신다는 거 다 됐죠?”
“응, 여기 다 챙겨 놨어.”
어머니는 양손에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다가오셨다.
“어라, 이게 뭐예요?”
“이거 가져가서 네 엄마랑 같이 먹어. 김치하고 반찬들이야. 밑반찬 위주로 담았으니까 냉장고에 두면 오래 먹을 수 있을 거야.”
“아, 아주머니…….”
“뭐, 그렇게 볼 필요는 없고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고마워할 것도 없어.”
“아니, 그래도…….”
“재동아, 그냥 가져가라. 그리고, 언제든지 술 한잔하고 싶으면 날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찾아와. 선우랑 같이 술 한잔하면서 얘기 나누다 보면 어려운 일도 풀리고, 마음도 좀 여유로워지고 그러지 않겠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얘 당분간 술은 안 돼요. 술은 안 되고, 재동이 너는 힘든 일 있으면 일단 여기 오기는 해. 술 대신 콜라라도 마시면서 대화하면 되니까.”
“야, 또. 뭐, 술이 안 된다는 건 또 뭐냐?”
“하여간, 안 돼! 자, 빨리 가서 복학 신청하고 와. 나한테 휴대폰으로 상황 보고 하고.”
나는 떠밀듯이 재동이를 내보냈다.
“야, 그래도 밥은 다 먹고 가야지.”
“거기에 다 싸 줬으니까 어머니랑 같이 가서 먹어. 그 맛있는 걸 너 혼자 먹으면 되냐?”
아버지와 재동이.
이 상태로 두었다간 오늘 선우네 백반 눈물바다가 된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눈 끝에 벌써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침부터 덩치 큰 두 남자가 우는 꼴을 손님들한테 보일 수는 없지.
그러다 오늘 손님 다 떨어진다.
* * *
이재동의 어머니 안순미는 빈 통을 챙겨서 선우네 백반으로 향했다.
지난번 반찬을 챙겨 준 데 대한 보답으로 홍삼 음료도 한 박스 챙겼다.
그렇게 선우네 문 앞에 도착한 안순미의 눈에 ‘일주일 휴점’이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어라, 가게 확장 때문에 휴점한다고?”
그제야 안순미의 눈에 공사가 한창인 듯 보이는 가게의 풍경이 들어왔다.
선우네 백반이 요새 장사가 잘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확장까지 하리라는 건 상상을 못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집 분위기가 우리 집 못지않았던 것 같은데…….
선우 아빠가 허리 디스크로 쓰러진 이후, 웃음기가 사라져 버린 선우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났다.
그렇게 잘 웃던 사람이…….
반찬 통을 든 채로 엉거주춤 서 있던 안순미의 눈에 가게 휴점 안내문 옆에 붙어 있는 다른 안내문이 들어왔다.
[직원 구합니다. 주 업무는 김치 제조이며, 김치를 만들어 본 경험이 많으신 주부님들 우대합니다!]
김치 제조?
이제 김치도 만들어서 파는 건가?
선우네 김치야 시장 내에서 맛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얼마 전에도 선우네 깍두기를 먹고 입맛이 돌아서 그때 이후로는 제법 밥을 잘 먹는 안순미니까.
예전부터 이 김치는 따로 팔아도 참 잘 팔리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 잘나가겠네?’
잘됐다고 축하해 주고 싶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동이 어머니?!”
고개를 돌린 안순미의 눈에 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어, 선우니?”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웃는 선우.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안순미도 선우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나야 잘 지냈지. 지난번에 황태해장국 너무 잘 먹었어. 참, 잘됐다. 이거 빈 통인데 어머니 갖다 드려. 너무 잘 먹었다고 꼭 전해 드리고.”
“아…… 이런 건 천천히 주셔도 되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꼭 전해 드릴게요.”
“그래, 선우야. 가게 확장하는 것도 축하한다고 꼭 전해 드리고. 그럼, 또 보자.”
“아주머니, 잠깐만요.”
“응?”
안순미가 가려던 몸을 다시 돌려세웠다.
“혹시 이 통에 직접 담근 김치 담아 주실 수 있나요?”
“응? 내가…… 담근 김치?”
“네, 어렸을 때 재동이네 놀러 가면 항상 김치가 참 맛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백반집 아들답게 어렸을 때부터 김치를 잘 먹었어요. 근데, 제 입에는 우리 집 김치보다 아주머니 김치가 더 맛있더라고요.”
“뭐? 얘가 무슨 소리니. 농담도 지나치면 결례가 되는 거야. 너희 어머니 깍두기는 이 시장 전체에서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는데. 호호호. 뭐, 그래도 기분은 좋다. 칭찬 들으니까.”
“농담 아닌데요. 진짜예요. 그러니까 이 빈 통에 아주머니 김치 좀 담아서 주세요.”
“음…… 이거 미안해서 어쩌니. 아줌마가 김치를 담가 본 지 좀 오래 됐거든. 바쁘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아…… 그러셨군요.”
그랬을 거라고는 대충 짐작을 했다.
내가 재동이 어머니에게 김치를 달라고 한 건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었으니까.
재동이가 미친 듯이 울던 밤.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건물 청소, 함바집 주방 할 것 없이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신다고 들었다.
재동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는 가정주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머릿속에 스치던 생각.
아니, 생각이라기보다는 추억 속에 남아 있던 어렴풋한 감각.
재동이네 집을 드나들 때 어머니가 차려 주신 밥상에서 맛보았던 겉절이 김치의 맛.
싱싱한 배추의 아삭함과 매콤하면서도 알싸한 양념의 맛이 잘 어울렸던 추억의 맛.
빈말이 아니라, 그때는 진짜 우리 집 김치보다 이게 더 맛있다고 생각했다.
뭐, 집에서 만든 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서글프게 울고 있던 녀석의 앞에서 별안간 김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웃기긴 했지만, 생각나는 걸 어쩌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재동이 어머니와 함께 김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안 그래도 빈 통을 가져가야 한다는 핑계로 집으로 가려 했는데, 가게 앞에서 만났으니 더 잘됐다.
“그럼 담가 주세요.”
“으, 응? 담가 달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당황해하는 아주머니를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김치…… 담가 주세요. 선우네 백반에서 우리와 같이.”
-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볼게.
재동이 어머니의 마지막 대답.
말은 생각해 본다고 했지만, 난 표정에서 이미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사실상 승낙한 거나 다름없었다.
집에 온 나는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렸다.
두 분 다 좋아하셨다.
재동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우리 가족과 재동이네 가족은 꽤 친하게 지냈었다.
나와 재동이가 제법 큰 이후에도 네 분은 곧잘 어울렸을 정도였으니까.
기뻐하시던 어머니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재동이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 전화 한 통이면 재동이 어머니의 확답을 어렵지 않게 받아 낼 수 있을 거다.
* * *
가게 확장 기념으로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겨울이면 빠질 수 없는 식재료 중 하나, 바로 꼬막이다.
<오늘의 ‘특별’ 메뉴>
- 꼬막비빔밥
- 꼬막된장찌개
- 꼬막찜
- 그리고, 기본 반찬들.
*가게 확장 기념 특별 메뉴입니다. 많이 드시러 오세요.
보드판에 메뉴를 적고, 본격적인 장사 준비에 돌입했다.
아직은 허리가 완전치 않은 아버지 대신 오늘은 새로 채용한 재동이 어머니, 안순미 씨가 새벽부터 함께했다.
안순미는 혹까지 하나 달고 왔다.
“야, 이재동.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니까.”
“우리가 남이냐? 오늘 많이 바쁠 거 아니야. 나도 도와야지.”
“오케이. 돕는 건 좋은데, 넌 무급이다. 아주머니. 동의하시죠?”
“아이구. 완전 사장 다 됐네, 선우. 물론이지. 재동이는 오늘 자원봉사자야.”
“오케이. 좋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채소 손질 등의 기초적인 일을 맡기고, 꼬막비빔밥 준비에 들어갔다.
꼬막은 삶기 전에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깨끗하게 세척한다.
조개류를 먹다가 씹히는 모래만큼 기분 찝찝한 것도 잘 없다.
그러니, 최대한 깨끗이 씻어야 한다.
청결 강박증에 걸렸다 싶을 정도로 깨끗이.
다음으로는 소금을 넣어서 해감까지 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어제 저녁에 미리 해 두었다.
끓는 물에 잘 해감한 꼬막을 넣어 준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
너무 팔팔 끓는 물에 넣어 주면 꼬막이 금세 질겨지니…… 끓고 난 후 조금은 온도를 낮춘 물에 꼬막을 넣어 준다.
촉촉하게 꼬막 살이 살아 있게 만들려면 말이다.
꼬막이 입을 벌리기 시작하면 건져 내 준다.
다음은 양념장.
간장, 고춧가루, 설탕, 맛술, 참기름, 식초, 다진 마늘 등을 넣고 잘 버무린다.
이 양념장은 비빔밥뿐만 아니라, 꼬막찜에도 얹어 줄 예정이다.
양념장까지 되었으면, 거의 끝난 셈이다.
손님에게 나가기 전 맛을 봐야 하니까.
네 개의 대접에 갓 지은 밥과 꼬막을 듬뿍 넣고, 양념장을 얹는다.
미리 썰어 둔 쪽파, 마늘, 청양고추를 적당량 집어넣으면 준비 끝.
“자, 꼬막비빔밥 시식하시죠.”
“오!”
“이렇게 시식도 하는 거니?”
“그럼요. 손님한테 나가기 전에 맛을 봐야 하니까.”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취향껏 참기름을 넣고, 밥을 비볐다.
나는 특히 마늘을 듬뿍 넣었다.
오늘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고 일하게 되더라도…… 꼬막비빔밥을 먹을 때는 마늘이 듬뿍 들어가야 맛있다.
최덕호 사장님으로부터 아린 맛은 적고, 단맛이 나는 좋은 마늘을 납품받았다.
그러니, 많이 먹어도 속 아플 일은 없을 거다.
뭐, 아파도 그만이다.
일단, 맛있게 먹는 게 우선이지.
그렇게 열심히 비빈 후 한입 크게 넣었다.
쫄깃쫄깃한 꼬막살과 채소, 양념장, 흰쌀밥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지금은 없지만, 여기에 꼬막된장찌개까지 곁들일 걸 생각하니…… 오늘 장사도 분명 대박날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다.
가게 확장 첫날.
시작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