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냥 좀 기다리죠
“송 조교. 선우네 백반에 가 본 적 있어요?”
학과 건물을 나서며 김흥범이 물었다.
“예전에 한 번 가 본 적은 있어요. 몇 개월 전쯤이요.”
“그때 어땠어?”
“음…… 글쎄요. 호호. 제 느낌에는 아주 평범한 백반집 그 자체였어요. 그냥 아주 평범한 어머니가 해 주는 보통 집밥.”
“음…….”
김흥범의 표정이 살짝 어둡게 변했다.
그 표정을 보자 송은희의 마음에 슬쩍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한 끼 식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김흥범 교수 아니던가.
맛없는 점심을 먹으면 기분이 안 좋아질 테고, 기분이 안 좋으면 괜히 같이 간 나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다.
김흥범 교수가 인품이 좋다 좋다 하지만, 그래도 대학원생에게 학과장은 신적인 존재다.
약간의 불협화음도 송은희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초희는 완전 애들이잖아…….’
모름지기 애들 입맛과 어른 입맛은 다르다.
초희는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의 팔팔한 청춘.
그때 무슨 맛이라는 걸 아나?
그냥 양 많이 주고, 서비스 많이 주고, 사장님 친절하면 그냥 그 식당이 최고인 줄 알지.
아무리 외식경영학과 학생이라지만, 아직 걔들이 그런 걸 알아보는 눈이 있을 리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은희의 불안감은 절망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누구 말을 듣고 이렇게 바보 같은 선택을…….’
선우네 백반을 얘기했을 때 바로 말렸어야 했다.
몇 개월 전 자신이 느꼈던 그 입맛의 기억을 믿었어야 했다.
왜 오늘 하필이면 조교실에는 나 혼자뿐이었던가.
모든 게 원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교수님을 데려가자.
“교수님, 혹시…….”
이런, 빌어먹을.
혼자서 별별 생각을 다 하며 걷는 동안, 이미 앞서 가던 교수님이 선우네 백반의 문을 열고 있었다.
“마, 망했다.”
* * *
점심 장사가 한창인 오후 한 시.
가게 문을 열고, 한 일행이 도착했다.
그중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의 낯익은 얼굴.
‘김흥범 교수?’
영훈대학교 외식경영학과의 김흥범 교수.
업계 내에서 꽤 명망 있는 전문가로 통하는 인물.
맛 칼럼니스트로도 유명한데, 가게 홍보나 이미지는 개의치 않고 직설적이고 정확한 전달로 신뢰도가 높은 사람이다.
‘좀 젊어 보이긴 하지만, 그 사람 맞네.’
전생에서는 세미나나 모임 장소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큰 접점은 없었지만, 하는 행동이나 품새가 고상했고, 정직해 보였다.
한 번쯤 만나서 외식업에 대해 깊게 토론을 해 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조금 기다리셔야겠는데요.”
들어온 사람이 김흥범 교수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선우네 백반은 만석이었다.
조금 미안하긴 한데…… 어쩔 수 있나.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선우네 백반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은 손님이다.
한편, 선우의 말을 들은 송은희의 인상이 확 구겨진다.
‘웨이팅까지…….’
안 그래도 음식 맛이 걱정되는데 기다리기까지?
안 되겠다.
여기서는 무조건 움직여야 한다.
“교수님,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는 다음에 오시고 다른 곳으로…….”
“음…….”
잠시 생각하던 김흥범이 대답했다.
“그냥 좀 기다리죠.”
“…네…….”
실패다.
난롯가 근처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으며 김흥범은 생각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
매생이의 살짝 비릿하면서도 바다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자극하는 향.
기름에 볶아진 듯한 굴의 고소한 냄새.
거기에다가 다른 손님들의 테이블로 나가는 매생이 굴국밥의 담음새가 인상적이다.
뚝배기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매생이 위에 커다란 굴 여러 개가 얹혀 있다.
그 위에는 청고추, 홍고추 슬라이스와 적당한 크기로 썬 부추가 가미되어 있고.
참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원래 음식은 눈으로 한 번, 코로 두 번, 입으로 세 번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훌륭한 담음새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
이런 음식은 반드시 맛을 봐야 한다.
‘이초희 학생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가?’
오기 전에도 그랬고, 오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옆에 있는 송은희 조교의 평도 좋지 못했고.
하지만…….
이런 정도의 음식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면, 그 사장이 외식업의 전문가라고 해도 과히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음식을 먹어 봐야 더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여기 둥굴레차 좀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활짝 웃으며 차를 내미는 청년.
풍기는 인상이 선하다.
얼굴은 밝고 목소리 톤이 좋다.
외식업에 딱 어울리는 외모와 톤이다.
“흐음…….”
“교수님, 혹시 어디가 불편하세요? 그럼 지금이라도 다른 데로…….”
“둥굴레차 향이 아주 좋네. 송 조교도 차 한 모금 마셔 봐. 티백이 아니라, 진짜 둥굴레를 넣고 끓인 차 같네.”
“아, 네.”
송은희는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둥굴레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과는 다르게 둥굴레차에서는 깊고 구수한 맛이 났다.
‘좋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선우가 다가왔다.
“두 분 자리 났습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김흥범 교수는 매생이가 있는 굴국밥, 앞에 앉은 조교는 그냥 굴국밥을 주문했다.
뚝배기에 굴을 넣고 볶다가 생각한다.
굴 몇 개 더 집어넣을까?
아니면, 알이 큰 걸 따로 골라서?
아니면, 매생이라도 좀 더 푸짐하게?
사실 사람 맘이 다 똑같다고,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김흥범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
몰랐다면 모를까, 김흥범을 너무나도 잘 알지 않는가.
저 사람은 이미 업계 내에서는 유명했고, 앞으로는 업계를 벗어나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질 사람이다.
그런 그의 미래를 아는데, 마음이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 사람 말 한마디로 한순간에 선우네 백반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런 건 이선우의 방식이 아니니까.
누군가가 유명하고, 누군가가 권위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는 그런 얄팍한 수작.
그런 건 이선우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선우네 백반에 오는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대통령이 와도 국회의원이 와도 특별 대접은 있을 수 없다.
그냥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늘 가게를 찾아와 주는 다른 단골손님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테이블에 나갈 때와 똑같은 양의 굴을 똑같은 양념으로, 똑같은 마음으로 볶는다.
정확히 일 인분의 매생이를 넣고 똑같이 일 분 정도 확 끓여 낸다.
담음새를 정리하고, 부재료를 얹는다.
오늘의 손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공되는 그 매생이 굴국밥.
김흥범 교수에게 나갈 굴국밥이다.
“어머니, 국밥 나왔어요.”
“오케이! 3번이지?”
“네! 남자분이 매생이. 여자분이 그냥 굴국밥입니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김흥범 교수는 내가 만든 굴국밥을 어떻게 평가할까?
쟁반에 국밥을 얹어 나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 *
콜록콜록.
자리에 앉은 김흥범 교수가 마른기침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부터 계속 기침을 하던 교수님이었다.
‘컨디션까지 안 좋으신 모양이네.’
설상가상이다.
송은희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음식이라는 건 건강할 때 먹어야 더 맛있게 느껴진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맛없게 느껴지는 법.
감기에 걸렸을 때는 입맛까지 뚝 떨어지니까.
연신 기침을 해 대는 김흥범의 물잔에 둥굴레차를 채워 주며, 오늘의 사나운 일진을 탓하는 송은희였다.
‘완전 최악이다. 저 상태에서 식사를 하시면, 맛없다고 느낄 건 불 보듯 뻔해.’
하지만,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이다.
송은희는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막말로 음식을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선우네 백반에 가자고 했던 것도 김흥범 교수 본인이었고.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사이 아주머니가 펄펄 끓는 뚝배기 그릇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매생이 굴국밥이 남자분이죠?”
“네. 그쪽에 놔 주세요.”
“네. 아이고, 가만히 계세요. 제가 놔드릴게요. 뜨거워서 조심해야 해요.”
이 판국에 아주머니는 또 엄청 친절하다.
아까 아들의 표정도 몇 개월 전과는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이러면 적어도 불친절 때문에 김흥범 교수의 눈 밖에 날 일은 없겠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송은희가 불안함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그 시점.
김흥범은 미리 나온 반찬과 테이블 세팅에 집중했다.
‘딱 알맞은 크기로 담근 깍두기와 청양고추, 양파. 직접 담근 듯한 쌈장.’
자칫 비릿할 수 있는 메인 메뉴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적절한 찬 구성이다.
한 가지 정도 곁들여 먹을 만한 메인 반찬이 없는 게 아쉽지만, 가격표를 보니 이해가 됐다.
백반 육천 원.
어딜 가도 매생이 굴국밥을 먹기에는 부족한 가격이다.
이 가격에 이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성비에서 오는 만족도를 확보했다는 뜻.
거기에다가…… 덜어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작은 쇠 국자와 앞접시.
이 또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전문성이 느껴졌다.
앞접시야 반찬 접시를 활용하면 되지만, 저런 작은 쇠 국자는 백반집에서 상시 보유할 만한 집기가 아니다.
이 말인즉슨…….
‘오늘의 굴국밥을 위해 따로 준비했다는 거지.’
굴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매생이는 그 안에 뜨거운 열을 그대로 품고 있어서 뚝배기에 있던 상태에서 바로 먹었다가는 혀와 입천장이 남아나지 않는다.
이곳의 주인장이 이런 것까지 다 고려했다는 뜻이다.
‘어디 한번 맛을 볼까.’
김흥범은 새어 나오는 기침을 억지로 참아 가며 국물부터 한술 떴다.
느껴지는 진한 바다향.
아까 기다릴 때 코로 느꼈던 매생이와 굴의 향이 그대로 국물에 녹아들어 있었다.
시원하다.
별다른 조미료의 사용 없이 재료 본연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맛.
“음…….”
이번에는 매생이와 굴을 떠서 앞접시에 덜은 후 숟가락으로 살살 뒤적여 식혔다.
상대적으로 먼저 식는 굴부터 크게 한입 입으로 가져갔다.
알이 굵고 실해서 씹는 맛이 좋았다.
다음은 매생이.
적당히 식은 매생이를 숟가락에 얹어 호로록 넘긴다.
감기로 인해 살짝 불편했던 목에도 전혀 부담 없이 스르륵 넘어간다.
오히려, 매생이의 따뜻한 기운이 아픈 목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듯했다.
“음…….”
며칠째 앓고 있던 감기가 싹 낫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