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선우네 백반으로 갑시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진민호가 내뱉은 말은 이거였다.
미래를 아는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진민호는 지금으로부터 5년 후에 만나야 했다.
선우 푸드 아카데미의 수강생으로 말이다.
그리고, 선우 푸드 브랜드의 한 지점을 맡아 성실하고 우직하게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원래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멍해 있는 나와 어머니를 앞에 두고 진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저는 직장으로부터 해고당한 실업자 신세였습니다…….”
나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가족들에게 차마 알릴 수 없어 매일 출근하는 척 방황했던 이야기.
그렇게 집을 나오면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배가 고파서 아침마다 밥집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
그러다가 우연히 선우네 백반에 오게 되었고, 그 맛에 반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이 바로 식당 창업이 된 것이다.
어쨌든 회사에서 쫓겨난 이상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하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그의 인생 경로는 이게 아니었다.
진민호가 사업에 손을 대긴 하지만, 아직 외식업에 손을 대지는 않을 시점이다.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다가 다 망하고 나서야 선우 푸드 아카데미를 찾게 되는 게 원래 그의 인생이니까.
“그러던 도중 이곳 음식을 먹고 난 후, 용기를 내어 가족에게 말했고,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서 장사를 배우고 싶으시다고요? 제2의 인생으로?”
“네. 영업 일을 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음식점을 다녀봤습니다. 그날 제가 먹었던 음식과 두 분이 보여 주셨던 서비스는 그 수많은 음식점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였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장사를 배우겠다고요? 이 조그마한 가게에서. 하이고…… 참 대책도 없는 분이네.”
어머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지만…… 이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면 어머니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일 거다.
어머니 스스로가 아무런 준비 없이 식당을 하다가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뒤늦게 깨달았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식사 한 번 맛있게 먹었다고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는 진민호가 안쓰럽고 한심하게 보일 것도 당연한 이치.
“어이없게 생각하실 것도, 이런 요청이 무례인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받지 않고서라도 여기서…….”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돈을 받지 않고 일을 시킬 일은 없습니다. 일을 했으면 당연히 대가를 지불해야죠.”
“아, 아니. 아드님. 그런 게 아니라…….”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 무급으로라도 그렇게 일을 배우고 싶으시다는 의미시겠죠.”
진민호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걸 생각했다.
우선, 진민호를 딱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와 달리 나는 진민호가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인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네 백반에서 뭔가를 가르치기에는 여러모로 조건이 좋지 않다.
게다가 지금 선우네는 외부 인력이 필요치 않다.
곧 아버지도 복귀하실 테니까 더욱 그렇다.
진민호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사를 꼭 하고 싶다면…….’
일단, 기본이 되는 것부터 알려 줘야겠지.
어딜 가서 무슨 업종으로 장사를 해도 꼭 알아야 하는 것들.
나는 진민호에게 메모지와 볼펜을 건넸다.
“자, 받아 적으시죠.”
“네?”
의문이 가득한 진민호의 표정을 뒤로하고 말을 이어갔다.
“최고의 서비스, 식당 공부, 식당 창업 노하우, 장사의 기본, 외식 경영 이렇게 하라…….”
책 제목 10개를 읊었다.
내가 생각하는 기본 중의 기본인 책들이다.
외식업 장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들.
전생에서는 공부의 중요성을 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바쁘고 힘들수록, 장사가 되지 않고 길이 보이지 않을수록 사장들은 책을 봐야 한다.
책을 보고 길을 발견한 후 그것을 실행해 봐야 한다.
실행한 것을 자신의 식당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공부, 실행, 조정.
이 삼박자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자기만의 식당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다 적으셨나요?”
“아, 예, 거의 다 적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린 건 책 제목이에요. 외식업을 생각하신다면 꼭 읽어 봐야 할 책들이죠. 그 책들 다 읽어 보시고…… 그때도 식당을 하고 싶으시다면 다시 찾아오세요.”
잠시 고민하던 진민호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책 다 읽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책 제목을 적은 메모지를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은 진민호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진민호답게 덧붙이는 말 없이 그저 우직하게.
어머니는 진민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선우에게 물었다.
“그 책 제목들은 어떻게 안 거야?”
“인터넷이요. 사실 제가 공부하려고 알아 둔 책들인데, 마침 딱 써먹을 기회가 생겼네요.”
“아…… 인터넷…… 진짜 거기에는 없는 게 없나 보네.”
“맞아요. 없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내기 때 했던 약속 지키세요. 컴퓨터 구입. 그럼 제가 인터넷 사용법도 알려 드릴게요.”
“어, 그, 그래야지.”
“네. 그럼 내일 장사 준비 시작합시다!”
진민호가 정말 저 책을 다 읽고 다시 오게 될까?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우연에 불과할지 모를 인연으로 진민호를 5년 일찍 알게 되었다.
즉, 이미 전생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와 진민호의 관계가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뭐, 올 사람이면 오겠지.’
괜히 고민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나는 내 주사위를 던졌고, 진민호가 그 주사위의 숫자를 따라 움직일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판단에 달려 있는 거니까.
* * *
영훈대학교 외식경영학과 조교실.
띠리링- 띠리링-
송은희가 내선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 송은희 조교. 아직 식사 전인가요?
“네, 아직입니다.”
식사 전이냐고 물어보는 건, 같이 식사를 하고 싶다는 뜻.
학과장이 식사를 하자고 하는데, 먹었어도 안 먹었다고 해야지.
다행히 송은희도 슬슬 배가 고파지려던 참이다.
- 그럼 같이 식사합시다.
“네, 교수님. 자주 가시는 정스시 예약할까요?”
- 아니에요. 오늘은 선우네 백반으로 갑시다. 혹시 송 조교 그 집 알아요?
“선우네 백반이요?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선우네 백반을 모를 리가.
며칠 전 초희가 얘기했던 그 집이다.
갑자기 김 교수님이 가자고 해서 좀 의아하긴 하지만, 안 그래도 한 번쯤 다시 가 볼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다.
그나저나 김 교수님의 의도가 궁금하긴 했다.
초희한테 무슨 얘기를 들은 걸까?
외식경영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공부로 생각해야 한다는 김흥범 교수.
그래서 아무 집이나 찾지 않는다.
적어도 배울 점이 있고, 음식 맛이 훌륭한 곳을 골라 다닌다.
아니면, 새로 생긴 곳을 찾아가거나.
오래된 백반집, 그것도 평범하다고 알려진 집을 찾는 일은 김흥범 교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 같이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조교실을 나서자 이미 김흥범 교수가 옷을 입고 나와 있었다.
“자, 가죠.”
* * *
오늘의 메인 메뉴는 매생이 굴국밥.
한겨울이다 보니 연일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고, 이럴 때는 무조건 따뜻한 음식이 최고였다.
굴국밥은 추위도 영양도 맛도 잡을 수 있는 훌륭한 메뉴.
매생이는 호불호를 감안해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걸로 어머니와 합의했다.
“어머니, 매생이 씻으실래요, 굴 손질하실래요?”
“매생이!”
“알겠습니다. 냉장고에서 꺼내다 드릴게요.”
미리 사 놓은 매생이를 어머니에게 갖다드리고 굴 손질을 시작했다.
커다란 대야에 생굴을 모두 담고 굵은 소금을 친다.
굴을 부드럽게 조물조물하다 보면 검은 뻘 같은 불순물이 나온다.
굴은 너무 세게 씻으면 굴 향이 다 빠져 굴 특유의 맛을 내지 못한다.
아기 다루듯 섬세하게 만져 주며 설렁설렁 헹궈 낸다.
다 헹궈 낸 굴은 체에 받혀 물기를 빼 준다.
그러는 사이 고종숙 여사는 매생이를 손질했다.
사실 매생이는 크게 손질이라 할 만한 게 없다.
흐르는 물에 잘 씻어 물기를 꽉 짜서 준비하면 된다.
조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일 인분만큼의 양을 잘 뭉쳐서 준비해 놓는다.
“다음은 육수.”
매생이와 굴 모두 재료가 주는 특유의 맛과 향이 강하므로 육수는 특별히 신경 쓸 게 없다.
평범한 멸치, 다시마 육수로도 충분하다.
커다란 통에 물을 충분히 부어 육수를 끓여 놓는다.
장사 준비를 마치고,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나니 어느덧 일곱 시.
아침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문을 열자마자 근처의 작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선우, 안녕! 오늘은 매생이 굴국밥이네? 뜨끈하니 좋겠다.”
“네, 날씨도 계속 춥고 해서 따끈하게 드시라고 준비했어요. 여기 앉으세요. 여기 차 한 잔씩 드시고요.”
석유 난로 위에 있던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씩 담아 내민다.
“음…… 냄새 구수하네. 둥굴레차?”
“네. 둥굴레차에는 도라지나 홍삼에도 들어 있는 사포닌 성분이 들어 있거든요. 요즘같이 추운 날씨에 면역력을 높이는 데 최고죠. 물론, 맛도 있고요. 시중에 파는 티백이 아니라 기름 없이 덜어 낸 둥굴레차를 직접 넣어 끓인 거니까 더 좋을 겁니다.”
“오…… 선우 너는 진짜 모르는 게 없구나? 어디서 그런 건 다 배웠어?”
“인터넷이요. 거기에 없는 게 없거든요.”
“인터넷? 그 스마트폰인가 뭔가 하는 그거?”
“뭐,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하여간 요즘에는 그거 안 쓰면 세상 돌아가는 줄도 잘 모르겠더라니까. 아우, 뜨끈하고 구수하니 좋다. 한 잔 더 마셔야겠어.”
“거기 주전자에 있으니까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오케이!”
주방으로 돌아와 굴국밥 조리를 시작한다.
뚝배기에 손질해 둔 굴과 함께 다진 마늘, 참기름을 넣고 달달 볶아 준다.
굴에서 뽀얀 육즙이 나오기 시작하면, 만들어 둔 육수를 넣고 끓인다.
확 끓어오를 때 일 인분씩 소분해 둔 매생이를 넣고 1분 정도 짧게 끓여 준다.
국간장, 액젓으로 간을 하고 펄펄 끓는 뚝배기째 손님에게 대접한다.
“크으, 좋다!”
“이거 완전 해장국이네, 해장국. 어제 먹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아.”
“깍두기랑도 아주 환상 궁합이야. 진짜 한 끼 든든하게 먹는 기분.”
“내가 집에서 밥을 안 먹는 이유가 있다니까? 여기 오면 훨씬 더 집밥 같은 밥을 먹는데, 뭣하러 집에서 마누라가 해 준 눈칫밥을 먹겠어. 하하하.”
아침부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새벽에 나와 일을 한 후, 추운 몸을 녹이고 주린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밥 같은 따뜻한 한 끼는 밥 한 끼 이상의 큰 위로와 만족을 주는 법.
만족해하는 사람들을 보니, 어머니와 나의 얼굴에서도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른다.
“자, 이건 서비스입니다.”
매생이와 굴을 넣고, 한입 크기로 부쳐 낸 매생이 굴전을 내민다.
“와, 이거 매생이 굴전이네?”
“네. 하나씩 드셔 보세요.”
“와…… 보기만 해도 군침 도네.”
맛있는 본 메뉴에다가 예상치 못한 서비스를 곁들이면, 손님들의 만족도는 배가 된다.
이렇게 이들은 선우네 백반의 단골손님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