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감자탕, 왜 이제야 한 거야? (4)
이후에도 슬러쉬 소주 두어 병이 더 나갔다.
학생들은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빠르게 냄비를 비워 갔다.
슬슬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자, 테이블로 가서 말했다.
“다들 볶음밥 드실 배는 따로 있으시죠?”
“오…… 볶음밥도 돼요?”
예의 ‘비주얼은 합격’이라며, 깐깐함을 자랑하던 여학생의 말.
그녀의 앞 그릇에는 등뼈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주황색으로 물든 입술과 입 주변은 보너스.
“원래는 안 되는데, 시험 끝난 기념으로 특별히 해 드립니다.”
“와……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뭘 좀 아시네! 마무리는 볶음밥이지!”
감자탕 냄비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김치, 들기름, 김가루 등 부재료를 꺼내고 화구에 불을 붙였다.
적당히 볶아 낸 후, 테이블로 가져가서 레인지 위에 올렸다.
“불 약하게 켜 놓았으니까 살짝 눌어붙게 기다렸다가 드세요.”
볶음밥을 서빙한 후, 다시 주방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열었다.
한쪽에 쟁여 두었던 그릇을 꺼내고, 새 프라이팬을 화구에 올렸다.
‘감동을 주려면 미친 듯이 줘야지. 아예 좋아서 날뛸 정도로…….’
후훗.
잠시 후 마주하게 될 학생들의 반응을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빠…… 이거 무슨 냄새야?”
“냄새?”
안대훈이 코를 킁킁거렸다.
사실 킁킁거릴 필요도 없었다.
선우네 백반의 작은 가게 안에 매콤한 불향이 가득했으니까.
“이거 설마…….”
“오빠, 이거 맞지?”
“응. 맞는 것 같아.”
“오빠, 나 눈물 날 것 같아.”
“울지마. 네가 울면 나도 울 것 같으니까.”
안대훈과 이수민.
두 학생은 무슨 멜로 드라마라도 찍는 것처럼 서로 마주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맞은편의 두 학생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수민이가 말한 그 제육볶음 냄새인가 보지?”
새침한 척하던 여학생은 냄비에 달라붙은 눌은 볶음밥을 긁으며 말했다.
얼마나 긁어 댔는지 이제 숟가락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제육볶음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게다가 난 이제 배불러서 아무것도 못 먹겠다.”
언행 불일치.
말은 못 먹겠다고 하면서도 가녀린 여학생의 숟가락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단 한 알의 밥풀도 남겨 두지 않을 기세였다.
“초희야. 너 배부른 거 맞지?”
여학생, 이초희의 옆에 앉은 남학생, 주강재가 귀를 막은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오빠, 나 몰라? 하루 한 끼도 잘 안 먹는 거?”
“음…… 흐흠…… 뭐. 잘 알지. 그래, 맞아. 하루 한 끼도 잘 안 먹지.”
남자의 시선은 이초희의 앞에 놓인 뼈다귀의 산과 이제 허허벌판이 되어 버린 널따란 냄비를 반복적으로 오갔다.
“강재 오빠. 눈빛이 좀 그렇다? 내가 늘 많이 먹는 게 아니잖아. 오늘은 시험이 끝난 날이잖아. 그러니까 그간의 스트레스가 심했고, 이 스트레스를 방치하다가는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있을 수 있잖아. 그래, 안 그래?”
주강재는 모든 걸 달관한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보니 으레 있는 일인 듯했다.
그러는 사이 선우가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와아아!”
이수민은 아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안대훈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접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직화 제육볶음.
두 사람을 선우네에 다시 찾아오게 만든 메뉴였다.
“우연찮게 어제 양념해 둔 고기가 조금 남아 있었네요. 두 분이 맛있었다고 얘기했던 게 기억이 나서 한번 볶아와 봤어요. 서비스니까 맛있게 드세요.”
우연이라고 했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양념해 놓은 고기를 어머니가 집으로 가져가려는 것도 말리고 남겨 두었다.
학생들이 다시 온다면 그건 분명히 제육볶음 때문일 거고, 당연히 그 맛을 다시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와…… 진짜 최고예요. 사장님.”
이수민은 양손 엄지를 치켜들고 엄지척을 날려댔다.
볶음밥 냄비를 긁던 이초희가 말했다.
“아, 이게 수민이 네가 말한 그 제육볶음인가 보네? 근데 나 너무 배불러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배부르긴 개뿔.
그녀는 이미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든 채 제육볶음 전투에 참전하기 위한 준비를 마쳐 놓고 있었다.
“오늘은 재료 다 떨어져서 장사 마감인 거 알죠? 마음 편하게 천천히 맛있게 드세요.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고요.”
* * *
선우네 집.
고종숙은 뚝배기에 끓여 온 감자탕을 이철민 앞에 내밀었다.
“음…… 냄새 좋다. 이거 웬 감자탕이야. 시장 골목에서 사 온 거야?”
순간 고종숙 여사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응. 시장에 감자탕집이 새로 생겼더라고. 그래서 한 번 사 와 봤어.”
“그래? 시장 어디에?”
“자꾸 묻지 말고, 일단 맛 한 번 봐 봐.”
고종숙은 이철민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줬다.
이철민은 먼저 감자탕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음…… 국물이 되게 진하네?”
“그치? 맛있지?”
“어, 일단 국물은 완전 합격인데? 어디 고기도 한번 먹어 볼까?”
이철민은 커다란 등뼈에 붙은 고기를 한 움큼 떼어 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와…… 고기도 부드럽네?”
“고기도 맛있지? 여기 우거지도 한번 먹어 봐.”
고종숙이 보는 앞에서 이철민은 천천히 감자탕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이철민을 보는 고종숙의 얼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이철민이 젓가락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휴우…….”
“왜 밥 먹다 말고 갑자기 한숨이야?”
“이 집 새로 생긴 가게라며?”
“응. 근데 그게 왜?”
“휴…… 이 정도 맛이면 당분간 시장 손님 다 뺏기겠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는 이철민.
“내가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휴우…… 이렇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데…… 이래서 우리 밥 벌어먹고 살겠어?”
“큭큭…….”
“뭐야, 당신 지금 웃는 거야? 지금 웃음이 나와? 아…… 당신 이거 안 먹어 봤구나? 한 번 먹어 봐. 그 웃음 싹 사라질 거야.”
“하이고, 하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던 고종숙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하아…… 이 사람이 도대체 왜 그래? 이제 그냥 다 놓아 버린 거야? 시장에 이런 경쟁자가 생긴 게 웃겨? 아주 좋아 죽겠어?”
이제 바닥에 뒹굴거리며 웃는 고종숙을 보던 이철민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뒹굴거리던 고종숙이 잠깐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사실 그거…… 선우가 만든 거야.”
“뭐,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감자탕! 선우가 만든 거라고!”
“뭐? 이걸 선우가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나름 오랫동안 선우네를 운영하면서 한식 쪽은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하는 이철민이다.
선우네는 맛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의 음식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잘 알고 있다.
감자탕이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그리 쉬운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잡내가 없는 깔끔하고 진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연구해 온 레시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한번 국물을 맛봤다.
맛있다.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국물이다.
고기와 우거지, 감자의 맛도 마찬가지.
심지어 고기에 찍어 먹는 겨자 소스까지…… 이건 아무리 먹어 봐도 유명한 감자탕 맛집에서 먹는 바로 그 감자탕 맛이다.
“선우 엄마.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아이고,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내가 무슨 덕을 보려고 거짓말을 해.”
하긴, 그렇지.
뭘 얻겠다고 고종숙이 그런 거짓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저 표정.
아내 고종숙은 정말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여자다.
속이 투명하게 다 보이는 스타일.
참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하지?
아들 선우는 며칠 만에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성격만 좋아진 거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는데…….
‘완전히 능력자가 되어 버렸잖아?’
고종숙에게 듣자 하니 어제 제육볶음도 대히트를 쳤다고 했다.
이놈이 어디서 벼락이라도 맞아서 천재가 되어 버린 걸까?
허리 디스크로 앓아누운 후, 이철민의 일상은 암흑 그 자체였다.
희망도, 의욕도 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이대로 그냥 누워서 사느니 죽어 버리자고.
어차피 아내와 아들에게 도움이 못 되느니, 짐은 되지 말자고.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만큼 더욱 극단으로 자신을 몰아갔던 이철민이었다.
그런데…… 달라진 선우의 모습을 보니 조금씩 조금씩 삶의 의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늘 감자탕 맛을 보니 희망이라는 싹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게 다시 생길지도 몰라.’
이철민은 여전히 혼자 웃고 있는 고종숙을 향해 말했다.
“여보. 나, 운동하고 싶어. 좀 일으켜줘.”
“우, 운동?”
고종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달 동안 의욕 없이 누워만 있던 남편의 입에서 운동하겠다는 소리가 나온다고?
그것도 자기 스스로?
어제도 별 똥고집을 부리면서 운동 안 하겠다고 버티던 사람이?
고종숙은 이철민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늘 썩은 동태눈을 하고 있던 이철민의 눈빛에 생기가 느껴진다.
“뭐해? 나 안 도와줄 거야?”
“도, 도와줘야지. 자, 일어나 봐. 으쌰.”
끄응.
고종숙의 도움을 받은 이철민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 * *
“아, 배 터질 것 같아.”
“배가 안 터지면 그게 인간이겠어?”
“진짜 너무 많이 먹었다.”
“휴…… 그러게…… 너희는 시험 다 끝나서 좋겠다. 이제 집에 가서 밀린 잠 푹 자면 되겠네.”
이초희가 부럽다는 눈빛으로 다른 학생들을 바라봤다.
“초희 너는 시험 안 끝났어?”
“시험은 끝났지…… 근데, 과제 하나 남아서…… 기말고사 대체 과제.”
“아…… 설마 그거 ‘외식기업 사례 연구’ 그 과목이지?”
“응…… 에휴…… 수강신청 때 말리는 네 말 들을걸.”
“그것 봐라, 그것 봐. 그 교수님 수업 어렵기로 유명하다니까.”
“맞아…… 그냥 다른 과목처럼 똑같이 시험 보면 될 걸 무슨 과제로 대체하겠다고…… 에휴…….”
두 여학생의 대화를 듣던 주강재가 나섰다.
“과제가 뭔데 그래? 이 오빠한테 말해 봐.”
“에이, 오빠도 그 과목 들은 적 없잖아.”
“야, 야. 그래도 이 짬이 있지. 과제 하나 정도 해결 못 하겠니?”
“짬? 군대에서 먹은 짬밥 빼면 오빠랑 나랑 대학교에서 먹은 짬밥은 같거든요.”
“에이. 그래도 경험은 무시 못 하는 법이야. 내가 이래 봬도 간부 식당 취사병 출신이거든?”
“그래, 초희야. 뭐,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한 번 얘기해 봐. 또 알아? 강재 오빠가 해결해 줄지.”
“음…… 오케이. 그럼 이거 한번 봐 봐.”
이초희가 가방에서 꺼낸 노트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기말 과제…… 국내 외식 브랜드 중 실패한 브랜드 한 곳을 선정하여, 그 브랜드의 문제점과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그 브랜드를 다시 살리기 위한 방안을 기획하여 제출하시오…….”
“와…… 이게 기말고사 대체라고? 과제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온다…… 그냥 포기하는 건 어때?”
“이건 우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닌데? 그것 봐. 그 교수님이 과제 어렵게 내는 데는 선수라니까…….”
“음…… 일단 브랜드는 선정했어?”
큰소리친 게 있어서 그런지 제법 진지하게 물어보는 주강재.
이초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페 본. 그거 처음에는 막 연예인 내세워서 홍보 크게 하더니 쫄딱 망했잖아. 지점도 다 사라지고 있고.”
카페 본?
주방에서 다음 날 장사 준비를 하던 내게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에스엠푸드에서 야심 차게 내놓았던 카페 브랜드.
유명 연예인들을 앞세워 공격적으로 시장에 나섰으나 쫄딱 망해 버린 그 브랜드.
그러고 보니……
‘저 손님들 외식경영학과 학생들이었구나?’
전생에서도 이따금씩 영훈대학교 외식경영학과 학생들이 선우 푸드에 들어오곤 했다.
아까 커플 여학생이 들고 있던 ‘외식경영론’ 교재를 보고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구나.
대화를 듣자 하니, 어려운 과제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걸로 보이는데…….
도움을…… 줘야 하나?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
단골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