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아미파의 보물들 (2)
유진산은 어깨가 진동함을 느꼈다.
정확히는 등 뒤에 사선으로 매고 있던 용살창이 우는 현상이었다.
“왜 그래, 이놈아?”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용살창은 신수인 화룡(火龍)의 영석으로 만들어진 신병이기였다.
지금껏 창날이 스스로 반응을 보인 전례는 단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오래전 영물이었던 청랑(靑狼)과 마주쳤을 때였으며, 두 번째는 불문사자신공을 지키던 신수인 교룡(蛟龍)의 근처에서였다.
그런데 왜 하필 아미파의 장경각에서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어찌 된 일인지 창날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유진산은 용살창을 빼 들고는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창끝이 거세게 반응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경각에 영물이 있을 리는 없고.’
그의 발걸음은 책장 사이의 복도를 따라 끝까지 이동했다. 그곳에서 우측으로 다시 한번 돌자, 막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장경각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었기에 더는 전진할 곳이 없었다.
주변을 뒤적거려보았으나 아무런 특이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든 곳을 확인해 보았다. 한 곳을 제외하고는
‘설마 바닥?’
유진산은 창끝으로 바닥을 두들겨 보았다.
퉁-! 퉁-!
소리의 진동과 손아귀의 느낌으로 보아 확실히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비밀공간임이 분명할 터.
근처 어딘가에 문을 여는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을 듯했다.
주위를 한 번 더 쓱 둘러보던 유진산은 이내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파괴해버리면 그뿐. 밖에서 손녀가 시간을 벌어주며 싸우고 있는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날카로운 창기(槍氣)를 일으켜, 바닥을 몇 차례 그어버렸다.
쩍-! 쩌억-!
바닥이 갈라지자 드디어 내부의 공간이 드러났다.
약 삼 평 정도의 좁고 어두운 공간. 자세한 건 내려가서 확인해봐야 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기에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뛰어내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옆으로 누워 있는 와불상이었다.
불상 자체도 값어치가 꽤 있어 보였지만, 들고 갈 수 있는 수준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불상 앞에 몇 가지 물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낡은 서책 한 권과 굳게 닫힌 상자 한 개였다.
유진산은 먼저 서책을 집어 보따리에 챙겨 넣었다.
‘비밀공간에 있을 정도면 필시 귀한 서적이겠지. 근데 이 상자는 뭐지?’
상자를 집자 드디어 용살창의 떨림이 멈췄다.
그러나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힘을 줘도 잘 열리질 않았다.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상자가 분명했다.
여는 방법은 나가서 확인해 보면 될 터.
일단 정체 모를 상자도 보따리에 쑤셔 넣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미파를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뿐.
발을 박차고 도약한 그는 창으로 천장을 부숴버렸다.
장경각의 지붕을 뚫고 솟아오른 그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럴 수가.’
위에서 내려다본 지상의 광경은 믿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장경각의 입구 주변으로 널브러진 비구니가 오십 명을 웃돌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유설을 향해 비구니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원이 많다고 한들, 손녀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달려드는 족족 순서대로 나가떨어졌다.
콰직-! 쾅-! 쩌억-!
도대체 무엇이 비구니들을 저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손녀가 손속을 봐주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현경의 기세에 대항하여 달려든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없인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보따리에 챙겨 넣은 물품 중 하나가 그 이유인 듯했다.
“가자!”
지붕 모서리에서 유진산이 소리치자, 유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왼손에는 축 늘어진 어느 비구니의 멱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 보물은 챙겨왔어?”
“오냐, 다 챙겼다!”
유진산은 손녀가 기쁨의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손아귀에 쥔 비구니를 휙 던져서 도약할 공간을 확보하는 모습도.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유설이 경공을 펼치기 시작하자, 비구니들로선 쫓을 방도가 없었다.
그녀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 망할 놈들아, 당장 돌려줘!”
“거기 서라, 이놈들!”
그 순간 전황을 지휘하던 늙은 비구니가 정예를 모았다.
“사매들과 아미사검은 날 따라오고, 나머진 남아서 이곳을 수습하라!”
지금 이곳에서 가장 강한 비구니들이 앞으로 나섰다.
경험이 많은 장로들과 장경각의 입구를 지키던 네 명이었다. 저마다 작은 부상이 있었지만,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녀들의 눈빛엔 목숨을 잃더라도 반드시 쫓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갑시다, 사저.”
도합 여덟 명이 음양쌍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경공을 펼쳐 달렸다.
남겨진 젊은 비구니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일어나 봐!”
“괜찮아?”
널브러져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비구니들만 수십 명이었다.
곧이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나 좀 부축해줘.”
놀랍게도 치명상을 입은 비구니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혈도를 가격당하고 기절했던 것이다.
상황이 조금씩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자,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소곤거렸다.
“난리 났네. 장문인이 알면 진노할 텐데.”
“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근데 그 장군 가면을 쓴 놈들, 정체가 뭐야?”
“나도 몰라. 장로님들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다 쫓아가셨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경공을 보니까 쫓아봐야 소용도 없을 텐데.”
그들이 쑥덕거리고 있을 때였다.
“태상장로께서 오신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제자들이 잔뜩 얼어붙었다.
태상장로는 문파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비구니로, 장문인보다 훨씬 윗대의 인물이었다.
젊은 제자들이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그게 정말이야?”
“윤회동에서 수행 중이시라고 들었는데.”
“상황이 이 지경인데 수행이 문제겠어?”
비구니들은 속닥거리면서도 그녀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나이가 지긋한 노파가 허공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있는 그녀는 몹시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면에 내려선 그녀는 다짜고짜 눈앞에 보이는 제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불상이 도둑맞고, 장경각이 털렸다니?”
“어떤 놈들인지 말하거라. 어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파였지만, 목청은 맹수의 포효처럼 쩌렁쩌렁했다.
까마득한 배분의 태상장로가 윽박질렀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붙잡힌 제자는 몹시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관, 관…….”
“누구? 어서 말을 하거라!”
애석하게도 그녀는 음양쌍괴에 대해 알지 못했다.
“관우와 장비가…….”
“이년이 감히 날 가지고 놀아?”
아미파의 역사상 손에 꼽는 비상상황이었다. 가뜩이나 기분도 좋지 않은데, 자신을 가지고 농락을 하다니.
소리만 났을 뿐, 그 누구도 태상장로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뺨을 맞은 제자는 목이 꺾일 듯이 휘청거렸다.
또다시 노파의 손이 올라가는 찰나. 일대제자 중 한 명이 다급히 다가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제자 은정이 태상장로를 뵙습니다.”
“그래. 네가 말해 보아라.”
은정은 머뭇거림 없이 즉각 보고했다.
“음양쌍괴입니다. 그놈들이 확실합니다.”
태상장로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정녕 그 미친것들의 짓이 확실하느냐?”
“예. 제가 직접 봤습니다.”
시장에서 음양쌍괴를 목격한 후 미친 듯이 달려와 보고한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태상장로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필이면 장문인도 없는 마당에…….”
그때 일대제자 은정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전 장로님들과 아미사검이 음양쌍괴를 쫓아갔습니다.”
“쯧쯧. 부질없는 짓을…….”
그 말을 끝으로 태상장로의 신형이 다시 날아올랐다.
곧이어 그녀의 신형도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멀어져 갔다.
아미산 어딘가의 한적한 나무 그늘.
유진산과 손녀는 기쁜 마음으로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아직도 가면을 벗지 않은 모습이었다.
“뭘 가져왔어? 빨리 풀어보자, 할배.”
“너무 세게 묶었나? 왜 이렇게 안 풀려, 이거.”
유진산이 뜸을 들이자, 유설이 안절부절못하며 독촉했다.
“궁금해~ 궁금해!”
“다 됐다. 어디 한번 보자.”
그가 먼저 꺼낸 것은 유설이 태상각에서 챙겨온 불상이었다.
크기는 팔뚝만 했으며, 영롱한 빛이 감도는 게 무척 신묘해 보였다.
“어때? 비싸 보여?”
“음. 조각이 정교하고, 재질이 특수한 걸 보니 비싼 건 확실하구나. 암시장에 나가서 한번 알아보자.”
유설은 어찌나 기쁜지 양손까지 흔들며 좋아했다.
“이히히. 다른 건 뭐 가져왔어?”
불상을 다시 집어넣은 유진산은 서책을 한 권 꺼냈다.
“장경각의 아래에 숨겨져 있더구나. 귀한 것 같아서 한번 가져와 봤지.”
“뭔데, 뭔데. 무공비급이야?”
얼추 봐도 무공비급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맨 앞장에 제목이 적힌 글씨가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을 뿐.
유진산은 천천히 책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지법인 것 같구나. 아미파의 지법이라면…….”
지법(指法)은 손가락의 끝으로 기를 쏘아 보내는 상승무공이다.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설마 불광일선지?’
불광일선지(佛光一線法).
문주들만이 일인전승으로 익힐 수 있는 아미파 최고 절학 중 하나였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본다면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때 유설이 눈빛을 빛내며 재촉했다.
“어때? 좋은 거야?”
“아마도 횡재한 것 같구나. 지법 중에선 최고의 무공이야.”
“우와~ 할배, 대단해. 정말 잘 골라 왔어!”
손녀의 거듭된 칭찬에 유진산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흠흠. 할애비가 원래 보는 안목이 좀 있지. 이제 마지막 물건을 좀 볼까?”
말을 마친 그는 작은 강철 상자를 꺼내 들었다.
유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뭐야? 보물상자야!?”
“응. 근데 이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열리질 않아.”
“줘봐. 내가 한번 해볼게.”
손녀에게 상자를 넘기려던 유진산은 잠시 흠칫했다. 어디선가 이질적인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방해꾼들이 나타났으니, 다른 데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구나.”
유설은 진작에 눈치챈 듯했다. 다만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상자 안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잠시 미뤄둘 수밖에.
“궁금한데……. 빨리 내려가자.”
물품들을 차곡차곡 보따리에 담은 유진산은 다시 어깨에 들쳐메었다.
그리고 그들이 경공을 펼치려는 찰나.
뒤에서 늙은 비구니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멈추거라!”
“당장 우리 물건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음양쌍괴!!!”
그 순간 앞서서 도망치던 한 명이 고개를 휙 돌렸다.
관우 장군의 가면을 쓴 유설이었다.
“우리 음양쌍괴 아니에요!”
그 말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비구니들은 가면 속의 눈이 웃는 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으냐!”
등 뒤에서 경고와 저주가 끊이질 않았지만, 도주하는 조손의 귀에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