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상품이 뭐예요 (1)
음양쌍괴가 홀연히 사라지자, 원로들은 침울함에 잠겼다.
천하의 당문이 언제 이런 비참한 일을 겪어보았던가.
당소천은 두 눈을 감은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그를 향해 가문의 원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지금이라도 정예를 소집하겠습니다.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하여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친다면…….”
“그만하거라.”
“하, 하지만…….”
미간을 좁힌 당소천이 그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얼마나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우리 당문은 패배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당사자인 그가 떠났는데, 소수의 원로끼리 무엇을 논의하겠는가.
모두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가 서 있던 빈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가주가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산의 촉수백팔타에 당해 기절했던 그가 이제야 깨어난 모양이었다.
“소천 아우 말대로다. 더는 이 사건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말거라.”
당문의 고수 중 한 명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당하고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이제 모두가 우리를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없었던 일로 만들면 그뿐이다. 우리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지켜보던 원로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집값을 운운하던 그놈들의 행태로 봐선 아미파도 위험합니다. 경고해줘야 하지 않을지요?”
“그냥 둬. 온 강호에서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사천을 주름잡던 당문이 고작 단 두 명한테 농락당한 사건을 어찌 입에 담는단 말인가.
이들에게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굴욕이었다.
“이해했습니다. 철저히 입단속들 시켜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가주의 얼굴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음양쌍괴가 섬서에서 이곳으로 바로 넘어왔을까? 종남파를 안 들르고?”
“그들이 먼저 당했다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전서구라도 띄웠을 텐데.”
“능구렁이처럼 속이 시커먼 말코 도사들이잖은가. 한번 사람을 보내서 알아봐. 거긴 무사한지 궁금하군.”
“잘 알겠습니다.”
한편 당가타를 빠져나온 조손은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들 때문에 운치가 제법 괜찮았다.
“바람이 선선하니 좋구나.”
조손의 표정은 상반된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미소짓고 있었지만, 유설은 오리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심통이 잔뜩 난 표정이었다.
“몰라.”
“왜 그렇게 심술이 나 있어?”
“집값 받아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
유진산은 손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타이르듯 말했다.
“아가. 맨몸으로 태어났다가 맨몸으로 가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게다. 재산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어.”
“거지처럼 왔다가 거지처럼 간다고? 난 싫단 말이야.”
“어허. 그렇게 부자가 되면 좋을 것 같더냐. 마음이 풍족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인 게다.”
유설은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뭐해. 먹고 싶은 것도 못 사 먹고, 집도 없잖아. 돈 받으러 다시 돌아가야 한다구.”
“우리 음양쌍괴도 강호에서의 품격과 명성이 있는데, 모양 빠지게 어찌 다시 돌아가서 돈 얘길 꺼내느냐. 이제 그만하거라!”
유진산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기 때문일까?
유설은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시무룩해졌다.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는 것을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엇이 그리 억울한 것일까.
이미 삶의 끝자락까지 가보았던 유진산은 재물에 관해선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시무룩해진 손녀를 보니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다, 아가. 너무 실망할 것 없다.”
유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
“할애비한테 좋은 방법이 있거든.”
이제야 손녀의 고개가 올라왔다. 얼굴을 살펴보니 눈가에 눈물까지 살짝 고여 있었다.
“무슨 방법?”
“우리에게 빚을 진 곳이 아직 하나 더 남지 않았더냐.”
“아미파?”
“오냐. 할애비가 듣기로 비구니들이 축적해놓은 재산이 상당하다더구나.”
유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기쁨이 감돌았다.
“오오! 그럼 우리가 아미파에 쳐들어가서 집값 달라구 할 거야?”
“아무래도 그렇게 받아내면 모양새가 강탈하는 것 같잖으냐. 음양쌍괴가 촌구석 왈패들도 아니고, 강호의 소문도 고려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
유진산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이듯 말했다.
“조용히 받아오면 되잖느냐. 아무도 모르게.”
“훔친다구?”
“어허? 엄연히 대의를 위한 일이거늘, 훔친다고 표현하면 안 되지. 받아야 할 걸 가져오려는 것뿐이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말하든 이미 유설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었다.
“히히히히.”
“응, 너무 좋아!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그렇게 돈을 모아서 뭘 하려고?”
이미 유설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다.
얼굴에선 해맑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다시 또 집을 사야지. 이번엔 불에 안 타는 집으로 구할 거야.”
“음. 그럼 집을 대리석으로 지어야겠구나. 엄청 비쌀 텐데?”
“괜찮아. 내가 돈 많이 모아서 사줄게.”
유진산이 옅은 미소로 은근슬쩍 물었다.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우리 유가장이나 되찾아오는 게 어때?”
“옛날 집?”
“오냐. 지방관청으로 압류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다시 매입하는 게다. 네 부모가 살던 집이기도 하잖느냐.”
유진산에게는 많은 추억이 남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올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손녀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또 갖고 싶은 거 있어?”
“음. 누각이 있는 배도 하나 사주거라. 가끔 강가에 배를 띄워서 낚시도 하고, 낮잠도 자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구나.”
“그럼 나도 태워줄 거지?”
“당연히 태워줘야지. 할애비가 물고기를 잡아서 요리할 동안, 설이 너는 뒤에서 노래를 불러주면 되겠구나.”
“푸흐흐. 알았어. 그럼 배도 사줄게.”
아직 가진 재산은 없었지만, 유설의 마음은 이미 풍요로운 부자가 되어있었다.
손녀가 행복해하는 것을 보니, 유진산의 마음도 금세 흐뭇해졌다.
“배도 사줘서 고맙다, 아가. 역시 우리 손녀밖에 없구나.”
“히히. 근데 할배, 아미파에서는 대결 안 해? 우리가 다 이겨야 한다며.”
“싸울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미 거긴 우리한테 한번 호되게 당했으니, 의미가 없을 게다.”
과거 창룡대의 훈련장에서 탈출했을 때, 아미파의 원로고수들에게 추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유설에게 패배한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전부 처단하지 않았던가.
아미파의 문주는 무림맹의 총타에 있을 터였으니, 지금 아미산에는 이렇다 할 강적이 없을 터였다.
“그럼 가서 보물을 챙겨오기만 하면 되는 거네?”
“뭐,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아미산이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밤까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해가 중천이라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손녀가 아니었다.
“그럼 그때까지 뭐 하지? 우리 뭐 하고 놀까?”
마땅히 생각해둔 게 없었다.
종일 손녀와 손 붙잡고 놀 수도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적당한 목적지를 생각해냈다.
“사천에 왔으면 성도의 거리는 한번 가봐야지.”
“성도?”
“오냐. 우리 조상이신 유비 황제께서 촉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대도시가 바로 성도지. 예로부터 지세가 좋고, 부유하여 천부지국(天府之国)이라고도 불린단다.”
“우와……. 거기 가면 뭐가 있어?”
“음. 특히나 연극이 유명하지. 거리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풍류가 넘쳐 흐르는 도시란다.”
“빨리 가서 보고 싶어.”
유진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서 가보자꾸나. 할애비 먼저 출발한다!”
유진산의 두 발이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허공답보를 펼치는 그의 옆으로 유설이 따라붙으며 보폭을 맞추었다.
동시에 신이 나는지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재밌겠다. 그치? 언제 도착해?”
“음. 지금 속도라면 반 시진 안에는 도착하겠구나. 좀 더 빨리 달려 볼까?”
그의 발이 나무를 딛고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허공을 달리는 유진산은 중간중간 나무를 한 번씩 밟으며, 다시 날아오르길 반복했다. 허공답보의 한계였다.
반면 유설의 움직임은 새처럼 여유로웠으며, 높은 곳에서 매우 오랜 시간 머무를 수가 있었다.
현경에 이르지 못한다면 꿈도 꿀 수가 없는 경공술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유진산이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가! 위쪽의 공기는 어떻더냐?”
“여기는 더 시원해. 엄청 멀리까지 보여.”
유설은 자신보다 곱절은 높은 위치에서 달리고 있었다.
유진산은 그런 손녀가 부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방향으로 쭉 가면 비슷하게는 도착할 게다. 도시가 보이면 얘기하거라.”
그렇지 않아도 유설은 이미 눈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식경을 더 달렸을 때쯤이었다.
잠시 후에 유진산의 시야에도 어렴풋이 보였다.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 성도(成都)의 모습이.
문화가 발달한 성도의 중심가는 그 어느 도시보다 휘황찬란했다.
연등이 달린 전각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각양각색의 사람이 즐비했다.
어디 그뿐인가.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연극과 가면으로 묘기를 부리는 변검까지. 가는 곳마다 볼거리가 넘쳐났다.
조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약을 팔며, 묘기를 진행하는 무대였다.
가면을 쓴 약장수가 빠른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지켜보던 유설도 기분이 좋은지 같이 어깨를 들썩여댔다.
“푸힛. 신나!”
손녀가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약장수가 이곳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거기 흥이 넘치는 예쁜 꼬마 아가씨! 잠시 이쪽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그 순간 어깨를 덩실거리던 유설의 몸이 정지했다.
곧이어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주변에 여자아이라고는 자신 말고 없었다.
“저, 저요?”
막상 올라오라니 쑥스러운 것일까?
얼굴을 붉히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은 모처럼 폭소를 터트렸다.
“허헛! 설이 너, 나오라는구나. 어서 올라가 봐.”
도대체 무엇을 시키려는 것일까. 유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쭈뼛쭈뼛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약장수가 관중들을 보며 시선을 모았다.
“자, 여러분들! 지금부터 이 호비환의 효능을 제대로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배우가 유설의 손에 곤봉 하나를 쥐여주었다.
“지금부터 그걸로 아저씨 배를 힘껏 쳐보거라. 괜찮으니까 있는 힘껏 쳐봐!”
뭔가 재밌는 일을 기대했던 유설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무슨 금강불괴라도 된다는 말인가.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무림 출신은 맞는 듯했지만, 기껏해야 어설픈 외문 무공 몇 개를 익힌 수준에 불과했다.
“안 돼요. 그럼 아저씨가 죽어요.”
“괜찮다니까? 만약 아저씨가 신음이라도 내게 만든다면, 상품으로 이걸 주마!”
유설은 그의 검지가 가리키는 상품을 살펴보았다.
이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정말 저거 주는 거예요?”
“그럼! 아저씨가 얘기한 조건을 달성하면 바로 줄 거다.”
유설은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이내 손가락 두 개를 슬쩍 내밀었다.
“두 개 주면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