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무인의 자존심 (1)
조손은 팔짱을 낀 채로 당가타의 시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적진의 한복판인데도 불구하고,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할배. 근데 우리한테 음식 팔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유설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들이 때려눕힌 당가타의 가주와 소공자가 이곳의 주인이라는 것을.
아직 시장에까지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두 명의 노인이었다. 상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썼다면, 애초부터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진산은 뒤를 미행하는 자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한테 안 판다고 하면 다른 시장으로 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 있느냐.”
그의 차선책이 마음에 드는지 유설이 까르륵 웃었다.
“히히. 역시 할배는 다 계획이 있었네. 정말 최고야.”
“그럼! 당연하지.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구나.”
유진산은 그렇게 확신했다.
분하고 억울해하는 당문의 원로들이 그것을 원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들은 당소천이 오기 전까지 음양쌍괴가 이곳을 떠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복수를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때 유설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할배, 저긴 어때?”
제법 규모가 큰 노점 식당에서 여러 음식을 팔고 있었다.
조리하는 자들이 따로 있었고, 손님을 응대하는 인물이 주인장인 듯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해왔다.
“음식 냄새가 좋구나. 일단 앉아서 골라보자꾸나.”
탁상이 여덟 개나 되었는데, 조손은 보란 듯이 가장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장이 다가오다 말고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방향을 바꿔 어딘가로 황급히 달려갔다.
음양쌍괴를 뒤쫓아온 자들이었다.
“어르신들이 아침부터 여긴 무슨 일로…….”
노점상의 주인은 양손을 모으며 쩔쩔맸다. 두 명의 노인 모두 이곳에서 서열이 꽤 높기 때문이리라.
그중 한 명이 턱짓으로 음양쌍괴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 저 둘을 제외하고는 손님을 받지 말거라.”
“예? 저 꼬마들 말입니까?”
“반로환동한 사파의 애늙은이들이다. 겉모습에 현혹되어선 안 돼.”
주인장은 잠시 놀란 듯 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존에 있던 몇몇 손님들도 신호를 받고 모두 자리를 비켰다.
이제 남은 것은 음양쌍괴 두 명뿐.
유진산이 멀뚱히 서 있는 주인장을 독촉했다.
“주문을 안 받겠다면 우리도 일어나겠네.”
노점상의 주인은 잠시 가문의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조금 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노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수락한 것이다.
이제야 주인장이 음양쌍괴를 향해 엉거주춤 다가갔다.
그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반로환동한 사파 고수들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주인장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음에도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어, 어떤 요리를 준비해드릴지요?”
유설이 양손을 모으고는 눈빛을 빛내었다.
“우리 뭐 먹을래?”
“뭘 먹든 돈 가진 사람 마음이지. 난 상관없으니, 네가 먹고 싶은 걸 주문하거라.”
유설은 기쁜 표정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노점의 한쪽 면에 쓰여있는 글씨를 차례차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압탕하고 동파육하고 경장육사, 청초육사, 그리고 만두하고 소면 주세요!”
“그걸 전부…….”
이곳에서 파는 음식을 종류별로 전부 주문한 것이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왜요. 우리가 돈이 없을 것 같아요?”
“아, 아닙니다.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주인장이 물러가자, 유설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할배가 배고플까 봐 많이 시켰어.”
“네가 먹고 싶었던 건 아니고?”
유설은 속이 뜨끔한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근데 나도 할배 대신 싸우려면 많이 먹어야지.”
“다 알아. 할배 다쳤잖아.”
유진산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주변으로 기막을 둘렀기에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을 테지만.
“어떻게 알았어?”
“아까 다 봤어. 괜찮은 거지?”
가주와의 마지막 격돌에서 작은 쇠구슬 하나를 놓친 탓이었다.
유진산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 봤다고?”
“응. 어깨에 맞았잖아.”
지금도 그 쇠구슬이 어깨에 틀어 박혀있었다.
그나마 금강불괴신공 덕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원래대로였으면 관통을 당했을 테니까.
약간의 통증과 불편함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따가 빼내면 그뿐이었다.
“저놈들이 할애비의 부상을 알면 안 되니, 절대 내색하지 말거라.”
“아무튼,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 시키는 대로 해.”
그래야 자신이 당문의 가주를 상처 없이 완벽하게 이긴 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속내를 차마 손녀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설은 서운한 모양이었다.
“치. 나한테는 얘기도 다 안 해주고.”
“나중에 말해주마. 일단 배부터 채우고 말이야.”
그럴듯한 말로 적당히 둘러대면 그뿐이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주인장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들고 온 것은 만두와 소면이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유진산은 음식을 내려놓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그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려놨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암기와 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당문의 한복판이었다.
주인장과 조리사를 불러다 직접 먹여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멀찍이서 지켜보는 능구렁이 같은 노인들이 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음식에 무슨 수작을 부려놨다고 한들,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역근경과 금강불괴신공을 익힌 이상 모든 해로운 성분을 다스릴 수 있었으니까.
자유의지로 신체의 상태를 조절할 수가 있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자신보다 내성이 더욱 뛰어날 유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 만두부터 맛 좀 볼까?”
유진산이 먼저 만두 하나를 집어 냉큼 먹어보았다.
다행히도 맛은 괜찮았다.
오물오물 씹던 그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따가워 슬며시 앞을 바라보았다.
유설이 흐뭇한 미소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맛있어?”
“왜 그렇게 빤히 봐? 어서 먹거라.”
“많이 먹고, 부족하면 얘기해. 더 사줄게.”
전낭이 든든했기 때문일까? 모처럼 선심을 쓰듯 얘기하는 손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래. 어서 먹자꾸나.”
이렇게 단둘이서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게 얼마 만인가.
모처럼 조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유진산은 음식을 먹는 한편 조금 전의 결투를 곱씹어 보았다.
‘당문의 가주 당소군. 비록 이기긴 했지만, 무서운 놈이었다.’
예전에 암기를 다루는 고수와 싸워본 적이 있었다.
섬서 북부에 있는 비도문의 문주로 위장한 창룡대원이었다.
당소군의 기술은 그 녀석보다 더욱 날카롭고 예리했다.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을 정도로.
‘촉수백팔타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하지만 이 기술이 두 번은 통하지 않겠지.’
가주보다 더 강하다는 그의 동생은 이길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물며 어깨까지 다치지 않았는가.
만약 왼손에 봉인된 사악한 놈의 힘을 빌려 쓴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경우가 아니라면, 이 힘을 실전에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손녀의 말대로 상대를 양보하는 수밖에.
‘뭐 가주 대 가주로서 싸워 이겼으니, 나도 할 만큼 한 거겠지. 암. 이 정도면 충분하고말고.’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공적을 자축하고 있을 때였다.
“할배, 무슨 생각해? 빨리 먹어.”
“아무것도 아니니, 어서 먹자. 이 집은 무슨 조미료를 뿌려놨는지 음식이 더 맛있구나.”
“그러게. 사천요리는 참 색다른 맛이야.”
음양쌍괴가 식사를 하는 장소로부터 이십여 장 거리.
어느 전각의 그림자 아래에서 두 명의 노인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노점상의 주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분명히 넣었습니다, 어르신.”
“확실해? 근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히 처먹고 있는 것이냐?”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치사량보다 열 배나 더 넣었습니다.”
“우리 당문의 오색치독은 절대고수라도 영향이 없을 수가 없어.”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오색치독이 안 듣는 것 같길래, 산공환에 미혼약까지 다 넣었어요.”
당문의 어른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음양쌍괴를 바라보았다.
독이고 뭐고, 여유마저 넘치는 모습이었다.
반응이 왔어도 진작에 왔어야 했다.
두 명의 노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걱정이구나. 셋째 형님이 오기 전에 둘 중 하나라도 먼저 손을 써놔야 하는데.”
“혹시 둘이 동시에 달려들까 봐 걱정입니까? 괜한 기우가 아닌지요. 그래도 비겁하게 싸우진 않던데.”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저 둘을 어떻게 믿어? 섬서에서 들려온 소문을 같이 듣지 않았는가.”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조차 손을 놓은 개백정들이라고. 하지만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는 법이지요.”
“설마 저 둘을 두둔하는 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소문처럼 잔혹한 자들이라면, 저희 가주님은 왜…….”
가주를 살려준 이유가 의문이었다. 충분히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가주가 깨어나서 말해줘야 알 수 있을 터.
우선은 눈앞의 상황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혹시 모르니 암룡대를 대기시켜야 하는 게 아닌지요?”
암룡대(暗龍隊). 최정예 고수들로 꾸려진 당문의 전투부대였다.
“이미 명령만 떨어지면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을 게다. 하지만 그 아이들만으로는 어림도……”
그들은 잡담을 나누다 말고 몸이 얼어붙었다.
갑자기 한기와 함께 느껴지는 짙은 살기 때문이었다.
둘의 고개가 천천히 우측으로 향했다.
붉은 피풍의와 청색의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누군가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형님…….”
당문의 역대 제일 고수. 당소천이 등장한 것이다.
가주보다 무공의 성취도가 빨랐기 때문인지,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일 장씩 좁혀지는 기이한 경공술. 그리고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는 몹시 분노한 듯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음양쌍괴가 지금 어딨는가.”
“저기 앉아 있는 애송이들입니다. 저놈들이 가주님을…….”
당소천은 크게 분노한 듯 마저 듣지도 않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곧이어 그의 걸음이 음양쌍괴의 삼장 앞에서 멈추었다.
동시에 분노의 외침이 토해져 나왔다.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사나운 기세에 유진산은 몹시 긴장했지만, 유설은 움직이던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응, 잠깐 기다려요. 아직 다 안 먹었으니까.”
명백한 도발이었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다니.
당소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작은 빛살 두 개가 음양쌍괴가 앉은 탁상 위를 지나고 있었다.
유진산의 눈앞에 놓인 그릇이 깨진 소리였다.
그야말로 벼락처럼 빠른 암기술이었다.
그러나 유진산보다 더욱 심하게 놀란 것은 당소천 본인이었다.
던진 암기는 두 개였으나, 깨진 그릇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내 암기를 잡았다고?’
당소천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때 유설이 깨져버린 할아버지의 밥그릇을 보며 씩씩댔다.
“한 번만 더 던져봐. 젓가락을 콧구멍에 넣어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