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작은 불씨가 재앙을 부르고 (1)
당문의 어른들이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다급히 경공을 펼쳐왔기 때문이리라.
창고의 문이 박살 나는 소리였다.
네 명의 중년인과 세 명의 노인들. 무려 일곱 명이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같이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도포를 걸친 그들은 십중팔구 당문의 최고수들이 분명했다.
“네 이놈들,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이냐!”
가운데 자리한 노인. 가주 당소군이 진노하며 소리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반경 삼백 장 이내의 새들이 도망쳐 날아갈 정도였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널브러진 아들의 등을 웬 여자아이가 한쪽 발로 밟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식은 이미 없었으며, 어찌나 맞았는지 퉁퉁 불어터진 얼굴은 멀쩡한 곳이 없었다.
다른 방계의 두 아이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누워서 미동조차 없었다.
그때 유설이 기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당소군에게 마주 소리쳤다.
“집값 받으러 왔다!”
유설은 할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위엄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은 오므리고, 눈에는 힘을 잔뜩 준 모습이 연습했었던 그대로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진산이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 그래, 천하의 음괴가 그 정도 무게감은 있어야지. 턱도 올리고.
할아버지의 전음을 받은 유설은 턱을 꼿꼿이 세우더니, 양손을 뒷짐 졌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당소군을 노려보았다.
위엄과 무게감은 물론 분노마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유설이 강하게 나왔기 때문일까? 당소군이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노부도 들어서 알고 있다. 무림맹에 있는 우리 가문의 아이들이 방화사건에 연루되었단 것을.”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유설의 미간은 더욱더 좁혀졌다. 집이 불타버린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솟구쳤으니까.
“집이 없어서 어제도 원숭이처럼 숲에서 잤어!”
“오해가 있다면 서로 풀어나가면 될 것을. 어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단 말이더냐.”
“얘가 먼저 우리한테 거지라고 하면서 채찍으로 때렸다구.”
당문의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연유와 용기로 음양쌍괴한테 욕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채찍질이라니? 그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당사우!”
그의 외침에 뒤쪽에서 앞이빨이 없는 우람한 아이가 다가와 양손을 모았다.
소식을 전해왔던 방계 녀석이었다.
“예, 가주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빠짐없이 고하거라.”
“그, 그게…… 저희가 모르고 장난을 좀 쳤을 뿐인데, 갑자기 먼저 우리에게 주먹질을…….”
당사우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횡설수설하는 말투와 어디에 둘지 모르는 시선까지.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할 당소군이 아니었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바른대로 말하지 못할까!”
어찌나 성질이 사나운지 마치 범이 울부짖는 듯했다.
당사우는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울먹이며 실토하기 시작했다.
“저, 저분 말이 모두 사실입니다. 시장을 둘러보다가 아소 아저씨네 가게에서 국수 먹는 걸 봤는데, 저희가 거지새끼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사우는 있었던 일을 모두 실토했다.
시장에서 욕을 했던 부분부터 시작하여 이곳으로 끌고 온 일까지. 그리고 채찍에 대한 부분도 말이다.
가주 당소군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 미친 녀석들이 기어코…….”
“죄, 죄송합니다, 가주님.”
당소군은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꼬여버린 상황을 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음양쌍괴를 조롱하다니. 게다가 채찍으로 후려쳤단 얘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그것은 분명 음양쌍괴가 고의로 맞아준 것이리라.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하니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나를 유인할 명분을 만들려고 일부러 맞은 것인가? 정말 지독히도 사악하구나, 음양쌍괴…….’
당소군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음양쌍괴와 화해를 유도하거나,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거나. 둘 중 하나였지만, 그 어느 것도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소군이 우측에 있는 인물에게 전음을 보냈다.
- 셋째가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 중화봉에서 수련하고 계실 테니, 반 시진은 걸릴 것입니다.
- 어쩔 수 없겠군. 총관이 보기에 내가 저들과 싸우면 승률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 소문을 종합해본 결과 양괴는 승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오기 전까지 음괴와는 절대 싸워선 안 됩니다.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인 사천의 당문.
거기서도 역대 제일 고수로 유명한 당소천이 이 자리에 없었다.
그것이 가주 당소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내 아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었으니, 이쯤에서 노기를 거두는 게 어떻겠는가.”
그 순간 지켜보던 유진산이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수고했다. 이제 뒤로 나오너라.
그가 앞으로 나서자 유설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자리를 교대한 유진산은 손녀를 대신해 축 늘어진 소공자를 한 발로 지르밟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소군은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인내심이 점차 한계에 도달해 가는 것이리라.
막강한 권력과 무공, 그리고 재력까지 모두 갖춘 그가 지금까지 참은 것도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상대가 음양쌍괴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옆에 당소천이 함께 있었다면 고민조차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짐승도 자식이라고 보호하려는 건가?”
“못난 자식도 자식이지 않은가. 이제 남은 아들이라고는 그 늦둥이 녀석뿐인 것을 어쩌겠나.”
늦둥이라는 말에 유진산의 마음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것참 기구하군. 하필 어쩌다 이런 망나니 같은 놈만 남게 되었나.”
그 순간 당소군이 울분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너희들이 내 첫째아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더냐!”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자신이 당문의 자손을 죽인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금양사에서 죽었다. 너희들만 그 자리에 없었어도, 내 아들 당무혁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금양사는 과거 정파의 고수들이 호현을 치기 위해 집결하던 장소였다.
음양쌍괴와 파계승을 필두로 사파의 절대고수들이 그들을 선공하여 몰살시킨 전례가 있었다.
그곳에서 죽은 정파인들 중 한 명이 바로 사천당문의 대공자 당무혁인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피차 은원이 남아있으니,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나. 가주 대 가주로서.”
당소군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음양쌍괴의 근본이 유가장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양괴 또한 어느 집안의 가주라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음괴과 아닌 양괴가 자신과 싸우려 한다는 것을.
이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당소군이 확인차 다시 물어보았다.
“우리 둘이 승부를 보자는 말인가?”
“그게 무림의 방식이잖은가. 그런데 당소천이라는 자는 왜 함께 오지 않았지?”
유진산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당문의 역대 제일 고수인 그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이곳으로 달려온 당문의 고수 중 가장 강한 자는 한눈에 봐도 당소군이었다.
가주를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천의 자존심인 당소천까지 함께 쓰러트려야 당문을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셋째 아우는 출타 중이다.”
다소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가주를 쓰러트리고 나면 제 발로 찾아올 터.
“그렇군. 다시 한번 묻지. 나와 싸워서 이 짐승을 되찾아갈 용기가 있는가?”
유진산은 그의 아들을 짐승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소군을 도발했다. 진심으로 싸우기 위해 고의로 그리한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너무나도 쉽게 넘어왔다. 지금껏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감히…….”
그 순간 당소군의 기세가 돌변했다.
그의 주변으로 기의 돌풍이 휘몰아치며, 도포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진정하십시오, 가주님.”
“셋째 형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함께 온 자들이 말려보았으나, 당소군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 물러나거라.”
그 또한 가주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인이었다. 그것도 당소천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절대고수였다.
양괴와의 싸움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주위의 인물들이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때 유진산이 널브러진 소공자의 옆구리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마치 걸리적거리는 것을 치우듯이.
퍼억-!
허공으로 떠오른 소공자는 마치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유설이 있었다.
유설은 한 손을 슬쩍 휘저을 뿐이었다.
기를 이용해 허공에서 그를 낚아채고는 구석으로 휙 날려버렸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얍!”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본 당소군은 폭발하고야 말았다.
금지옥엽 같은 아들을 짐승으로 몰고 간 것도 모자라 짐짝 취급을 하다니.
“이 잔악무도한 놈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러게 자식을 바르게 키우지 그랬나. 집안 단속을 잘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유진산의 얼굴은 여유가 넘쳤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어찌 긴장되질 않겠는가.
상대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있는 사천당문의 가주 당소군.
옛날 같았으면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정도의 강자였다.
게다가 암기술의 달인과는 싸운 경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유진산의 투지는 어느 때보다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좋구나. 이 느낌이.’
마치 혈기가 왕성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는 손녀에게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예전의 유진산이 아니었다.
그동안 피나는 수련으로 갈고 닦은 성과를 이제 확인해 볼 차례였다.
그가 준비를 마친 듯 보이자 당소군이 나직이 말했다.
“오너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용살창을 움켜쥔 유진산은 조금씩 자세를 낮추었다. 그 모습이 흡사 먹잇감을 덮치려고 접근하는 사자 같았다.
그때 귓가로 손녀의 전음이 들려왔다.
- 조심해, 할배. 옷자락 속에 뭔가 주렁주렁 숨기고 있어.
- 오냐. 지금부터는 할애비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나서지 말거라.
이미 유진산도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당소군은 맨손이었지만, 도포자락 속에 수많은 암기가 숨겨져 있을 터.
어차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단숨에 접근하여 승부수를 띄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유진산은 마지막 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목표와의 거리는 약 오 장.
드디어 유진산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