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지금 내 기분이 그래 (3)
조손은 나란히 볼품없는 모습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의 아이들에게 좌우에서 어깨를 붙잡힌 모양새였다.
“……내 국수.”
유설은 남기고 온 국수가 못 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좌우에서 팔을 붙잡고 있던 두 녀석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큭큭. 너희들 국수 먹을 돈은 있었어? 그냥 먹고 도망치려고 했지?”
“놔둬 봐. 가서 뒤져보면 알 테니까.”
비참함도 이런 비참함이 없었다.
언제 이런 설욕을 겪어 보았단 말인가.
유설의 두 눈에서는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왔다.
- 할배, 우리 언제까지 참아야 해?
손녀의 전음에 유진산이 타이르듯 차분하게 말했다.
- 이것도 다 수련이라 생각하고 인내하거라. 이 정도도 못 참느냐.
- 우리한테 자꾸 거지라고 하잖아.
- 화를 누를 줄 알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다.
- 나 훌륭한 사람 안 해. 얘네들 앞이빨 다 뽑아서 거지 얼굴로 만들어 버릴 거야.
- 어허!?
유설은 분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유진산도 아무 생각 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미친 녀석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구나.’
정황상 앞장서서 거만하게 걷는 놈은 아마도 당가의 직계혈통이리라.
소공자라 불렸다면 그것도 가주의 아들일 터. 이놈을 이용해 당가의 고수들만 따로 불러내어 상대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앞장서서 걷던 소공자가 인적이 드문 어느 전각 앞에서 멈추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창고로 사용되는 곳인 듯했다.
문이 열리자 바닥에 짚단이 깔린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타났다.
구석에는 상자 몇 개가 차곡히 쌓여 있었으며, 의자들이 나뒹굴었다.
십중팔구 이놈들의 은신처인 듯했다.
일반적인 아이들이 이곳에 끌려왔다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산과 손녀는 겁을 먹긴커녕 조금씩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마치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묶어.”
소공자의 한마디에 아이들이 음양쌍괴를 의자에 묶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둘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유진산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얼룩진 핏자국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끌고 온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단순히 애들의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도가 지나쳤다.
“누가 그러더냐. 이렇게 사람들을 납치하고, 괴롭혀도 된다고.”
유진산이 꾸짖듯 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외형적 나이는 열 살 남짓으로, 손녀보다도 키가 작았다. 하지만 눈앞의 녀석들은 성년을 코앞에 둔 우람한 체구였으니, 우스워 보일 수밖에.
“근데 이 새끼 말투가 좀 기분 나쁘네.”
소공자가 손바닥을 내밀자, 누군가 얇은 밧줄을 가져다주었다.
끝부분에 남은 핏자국의 흔적으로 보아 채찍으로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설마 그걸로 우릴 때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맞아. 잘 아네.”
“허……. 그 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니더냐?”
채찍을 움켜쥔 소공자는 무척 흥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그가 오른손에 채찍을 두 바퀴 휘어 감으며 중얼거렸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
유진산은 녀석의 한마디에서 확신했다. 애초부터 당가타에 함부로 진입한 외부인을 혼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음을.
놈은 단지 자신의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헤맨 것이리라.
어린놈이 이렇게나 심성이 잔악할 줄이야.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미친놈이구나. 우리가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어찌 위해를 가하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찍이 먼저 움직였다.
“밤톨만 한 애새끼가 늙은이 말투를 쓰고 있어. 기분 나쁘게.”
유진산은 황당한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채찍 따위야 아무리 맞아도 상처 하나 안 날 터였다. 금강불괴신공을 익힌 절대고수가 아니던가.
자신이 비명을 지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디 한번 해보자는 듯 채찍이 연달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철썩-!
채찍을 움켜쥔 소공자의 양쪽 입꼬리가 찢어질 듯 치켜 올라갔다.
웃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기이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버텨? 버텨? 버텨봐 계속.”
유진산은 여전히 신음은커녕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았다.
“네놈의 애비도 너의 이런 미친 취미를 알고 있느냐? 아니면 자식을 포기한 것이더냐?”
“너,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어?”
갑자기 후려치는 채찍의 강도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소, 소공자님 이러다 죽겠습니다.”
“……가주님이 또 그러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옆에서 다른 녀석들이 말려보았지만, 채찍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대화 내용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있는 듯했다.
“시끄러워!”
일반인이었다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타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산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래, 마음껏 때려 보거라. 내가 맞은 숫자만큼 네 애비한테 돌려줄 테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찍이 멈추었다.
이제야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소공자의 얼굴에 점차 당황한 기색이 짙어졌다.
“너, 너 도대체 뭐야…….”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유설이 한마디를 나직이 내뱉었다.
“열여섯 대. 내가 확실히 셌어.”
할아버지가 채찍에 맞은 횟수였다.
유진산은 치솟는 화를 식히려는 듯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의 녀석들을 즉시 죽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공자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은 그의 모습을 오해했다.
“죽, 죽었나?”
“그런 것 같은데요?”
“역시 그렇겠지? 저렇게 맞고도 멀쩡할 리가 없어.”
“근데 얘는 어떡할까요?”
모두의 시선이 의자에 묶인 유설을 향했다.
곧이어 소공자의 입꼬리가 다시 치켜 올라갔다.
광기에 물든 눈동자가 유설의 위아래를 훑기 시작했다.
“옷 속에 뭘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마친 그는 유설의 옷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옷깃을 젖히려는 찰나,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고야 말았다. 유진산이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다. 어린놈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미쳐 날뛰는구나.”
동시에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밧줄들이 하나둘씩 끊겨나갔다.
툭-! 투툭-!
“너, 너…….”
소공자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눈에 띄게 당황했다.
힘으로 밧줄을 끊어내려 하다니. 엄청난 내공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앞의 여자아이는 한술 더 떠서 한 방에 끊어냈다.
투투툭-!
마치 악몽에서나 나올할 법한 무서운 일들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경악하고 있을 무렵.
유설이 할아버지에게 나직이 물었다.
“할배. 나 이제 안 참아도 되지?”
유진산은 어리다고 봐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하고,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 한다. 쓸데없는 동정심은 가지지 않는다. 이곳은 무림이었고, 그 안에서 깨달은 그만의 법칙이었으니까.
곧이어 그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오냐. 이 녀석들은 사람으로 대우해줄 필요가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말을 마친 그는 슬쩍 창고의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분노한 음괴가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
소공자와 그를 추종하는 네 명은 얼음처럼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특히나 소공자는 충격이 극심한 듯했다.
지금껏 자신의 또래에서는 맞수를 만나보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현경의 기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너희들도 거지로 만들어줄게.”
“내,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날 건드리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설의 주먹이 소공자의 인중에 틀어박혔다.
어찌나 빠른지 주먹을 휘두른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앞이빨 두 개가 튀어 오르며,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끄아아악!”
당문의 소공자는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손아귀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때 창고의 입구를 틀어막은 유진산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쌤통이다, 이 녀석아. 남을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더니, 직접 당해보니 어떻더냐.”
그 순간 소공자가 이빨 빠진 얼굴로 악에 받쳐 소리쳤다.
“빨리 공격해, 이 등신들아!”
그의 명령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공포에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네 명은 흠칫하며 뒷걸음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용서해줄 유설이 아니었다.
마치 신기루를 일으키듯 유설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에 네 번의 타격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쩌저적-! 콰앙-!!
여덟 개의 이빨이 옥수수를 튀기듯 튕겨 올랐다. 공통점이라면 전부다 앞이빨이라는 것이었다.
터진 입술과 피범벅이 된 얼굴들. 하지만 고통보다 그들을 더욱 괴롭히는 건 극심한 두려움이었다.
유설이 한 발자국씩 다가갈수록 아이들도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끄으윽!”
“크흑!”
“아악! 살, 살려주세요…….”
다섯 명을 벽까지 밀어붙인 유설이 두 눈에 힘을 주며 물었다.
“아직 열한 대 남았어. 누가 맞을래.”
할아버지가 채찍으로 맞은 대수는 열여섯 대.
그리고 다섯 명이 한 대씩 맞았으니, 열한 대가 남았다는 얘기이리라.
하지만 한 방 한 방이 이빨이 부러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누가 감히 맞을 생각을 하겠는가.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순간 다급해진 소공자가 좌우의 두 명을 잡아채 앞으로 밀어버렸다.
무의미한 시도일 뿐이었다.
엉거주춤 나아가던 둘은 두 걸음 만에 ‘픽’ 하고 쓰러져 버렸다.
어떻게 맞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턱이 돌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맞고 쓰러진 것으로 짐작될 뿐이었다.
기절 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유설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열 대밖에 안 남았네. 몇 대씩 나눠서 맞을래?”
횟수가 고작 하나밖에 줄지를 않았다. 그렇다면 방금은 주먹 한 방에 둘을 쓰러트렸다는 얘기이리라.
소공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의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었지만,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남은 둘을 이용해보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방도가 있을 턱이 없었다.
“우, 우리 아버지를 데려오겠다! 너희들도 나 대신 아버지에게 돌려준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유진산이 기다리고 있던 대답이었다. 어차피 그리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이거 장차 크게 될 놈이구나. 자기 살겠다고 부모까지 팔아먹다니.”
소공자는 그의 비웃음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사정하듯 말했다.
“나, 나를 보내주면 지금 바로 가서 불러오겠다.”
“음. 네 아비 이름이 당소천이 맞느냐?”
종남파의 현호 장로에게 듣기로 그가 이곳에서 제일가는 고수라고 했다.
기대하며 물었지만, 눈앞의 소공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그분은 내 사숙이다.”
가주는 따로 있었고, 당소천은 그의 동생인 듯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유진산은 소공자가 아닌 다른 녀석을 지목해 앞으로 잡아끌었다.
“네가 가서 둘 다 불러오너라.”
“제, 제가요?”
“그래, 너. 어서 가서 전해. 음양쌍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그 순간 아이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섬, 섬서의 그 음양쌍괴?”
자신들의 명성이 사천에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사천이 섬서와 인접한 지역이라도, 이런 어린놈들까지 알고 있다니.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시끄럽고 빨리 가서 불러와. 일각 안에 안 오면, 소공자인지 뭔지 이놈부터 죽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