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우리만 당할 수는 없잖아 (2)
종남산 인근 마을 외곽의 작은 노점 찻집.
유진산은 찻잔을 움켜쥐고 앉아 있었으며, 그의 뒤로는 극살오의가 기립하고 있었다.
그들 중 맏형인 천우환이 양손을 모은 채 연신 그를 치켜세웠다.
“고생하셨습니다. 도사 놈들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아주 속이 후련합니다.”
사파에 속한 극살오의에게 종남파는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생각보다 너무 싱거웠어. 종남파가 오랜 세월 이름난 고수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니.”
이렇게 간단히 끝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머릿수만 많을 뿐, 제대로 된 고수들의 숫자는 형편없었다. 불쌍해서 적당히 마무리하고 내려왔을 정도로.
무엇보다 현재의 종남파를 더 몰아붙인다고 한들, 명성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섬서의 화산파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 탓 아닐까요? 사파 세력과 다툼도 잦았었고.”
“그것도 맞는 말 같군. 어쨌거나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야.”
“그래도 만만치 않은 놈들인데,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머지않아 음양쌍괴의 이름을 천하가 알게 될 것입니다.”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이거늘, 어찌 그렇게 자만할 수 있겠느냐. 오래 살고 싶으면 그런 자신감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그나저나 음괴 대협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유진산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먼 하늘을 지그시 응시했다.
“마침 저기 오는구만.”
이십여 장 높이의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처음엔 두 개의 작은 점으로 보였으나, 점점 커지며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정체를 확인한 극살오의는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렸다.
“푸핫!”
“하하하! 저 녀석, 저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유설에게 뒷덜미를 잡힌 도사가 허공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종남산을 오를 때 욕설을 퍼붓고 도망쳤던 젊은 도사였다.
겁에 질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녀의 부름에 유진산이 한 손을 흔들었다.
“여기다! 어서 와서 앉거라.”
잠시 후 유설의 신형이 코앞에서 새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여기 잡아 왔어.”
젊은 도사는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유진산이 그를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고얀 녀석. 어린놈이 겁도 없이 노부를 두 번이나 약 올렸겠다? 어디 얼굴 좀 자세히 보자꾸나.”
종남파의 이대 제자 무성.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설이 그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잘,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또 우리한테 욕하고 도망칠 거야?”
“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아직 때리지도 않았거늘, 그는 시작하기도 전부터 겁에 질려있었다.
아무리 경험이 적은 녀석이라지만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도사인데 이렇게나 겁이 많고, 쉽게 굴복하다니.
지켜보던 유진산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런 녀석은 말로 해선 안 돼.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게다.”
“그럼 어떡하지?”
“무림에선 무림의 방식대로 처리해야지. 어설프게 봐주면, 끝없이 기어오르는 법이다.”
그때 지켜보던 천우환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저급한 녀석한테 손을 더럽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가 끌고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유진산은 잠시 팔짱을 끼고, 도사를 바라보았다.
이미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어찌 그런 부탁을 하겠나. 이 녀석은 놔두고, 다들 객잔에 가서 요기라도 하고 와.”
“어르신은요?”
“별로 생각이 없어.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그때 유설이 검지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물었다.
“할배, 나는?”
“같이 다녀오너라. 돈은 있지?”
비축해놓은 용돈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돈을 건네줄 필요는 없었다. 자신들보다 사정이 넉넉한 극살오의가 있었으니까.
“저희가 살 테니, 대협께서 먹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정말이에요? 뭐든지?”
“예, 그럼요!”
유설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히히. 할배, 나 금방 다녀올게.”
“그래. 마을은 벗어나지 말고.”
“응, 알았어!”
극살오의를 따라가는 유설의 발걸음에는 흥이 넘쳤다.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묵묵히 앉아 있길 잠시 후.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또다시 목숨을 구걸해오는 젊은 도사였다.
유진산은 귀찮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 녀석 참 시끄럽네. 내가 언제 널 죽인다고 했느냐.”
분명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었다.
다소 거칠게 끌고 온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상상해서 겁을 먹었을 뿐.
“……그, 그럼 저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그건 네 사문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조금 기다리면 알게 될 게다. 아무튼, 그때까지 입 좀 다물고 있거라.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유진산이 기다리는 인물은 종남파에서 보내올 책임자였다.
종남산에서 마을로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이 노점 찻집을 지나쳐야 한다.
모두의 앞에서 이대 제자를 데려왔으니, 분명 누군가는 찾으러 내려올 터.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잠시 두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종남파에서의 일을 곱씹어보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고민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그만큼 우리가 강해졌기 때문이겠지. 만약 설이가 아니라 내가 나섰다면? 내가 그 원로고수와 싸워서 이길 수 있었을까?’
자신이 싸웠어도 충분히 해볼 만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같은 화경의 고수라 해도, 무공의 우위가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그의 판단으로는 굳이 손녀 혼자서 모두를 때려눕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강호출타의 목적은 음괴가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음괴가 양괴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게 강호의 정설이었으니, 만만한 적들은 자신이 꺾더라도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적막 속에서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유진산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향해 한 노도사가 경공을 펼쳐 다가오고 있었다.
‘저자가 직접 왔을 줄이야.’
과거 손녀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던 현호 장로였다. 지금도 그는 앞니 하나가 없는데, 그날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종남파에서는 자신들과 가장 악연이 깊은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이곳에 도착한 그가 양손을 모으고는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나는 종남파의 장로 현호라 하오.”
콧대 높은 명문정파에서 사파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험한 말부터 나왔겠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 유진산도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구면인데 뭘 인사까지 하고 그러시오. 어서 앉으시오.”
현호는 유진산의 맞은편에 앉고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음괴가 보이지 않자,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안심하는 눈치였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다시 종남파의 이대 제자인 무성에게로 향했다.
무성은 양괴의 왼쪽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장로님…….”
사문의 제자가 눈앞에서 사파의 고수에게 무릎 꿇고 있다니.
현호는 심기가 불편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제자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내가 대신 사죄드리겠소.”
유진산은 무성의 뒷덜미를 슬쩍 움켜쥐고는, 현호를 향해 던지듯 밀었다.
“네가 직접 얘기해.”
현호 앞에 철퍼덕 주저앉은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요, 욕을 했습니다, 장로님…….”
“뭐라고 말했는지 자세히 얘기하거라. 그래야 내가 널 구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무성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애, 애늙은이 새끼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욕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호의 손바닥이 먼저 움직였다.
“이놈! 도를 공부하는 도사가 어찌 그리도 입을 경박스럽게 놀린단 말이냐!”
따귀를 맞은 무성은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빌었다.
“크흑……. 죄송합니다, 장로님.”
현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제자들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다. 음양쌍괴의 집에 불을 지른 것도 모자라,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쌍욕을 날린 것이다.
‘이 녀석들아……. 상대를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현호였다. 음양쌍괴가 강호에 처음 나타났을 당시, 가장 먼저 엮였던 인물이 그였으니까.
지금의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무림의 세계가 아니던가. 종남파의 입장에서 음양쌍괴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넘을 수가 없는 벽이었다.
곧이어 그가 지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우리 종남파는 음양쌍괴 대협들과 화해하고 싶소.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주시오.”
음양쌍괴를 대협이라 호칭했을 정도면, 자존심까지 모두 내려놓은 것이리라.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이내 선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건 이미 얻었으니, 그 녀석은 그냥 데려가시오. 무령패인지 뭔지 이것도 돌려주겠소.”
유진산은 품속에서 투박한 옥패를 꺼내어 ‘툭’ 던져주었다.
너무나도 쉽게 수락했기 때문일까? 현호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현호가 우선 무성을 먼저 돌려보냈다.
“너는 먼저 사문으로 돌아가거라.”
“……예, 장로님. 알겠습니다.”
무성이 눈앞에서 멀어지자, 현호가 다시 한번 양손을 모았다.
“정말 고맙소. 사파인들 중에서는 양괴 대협이 가장 대인배일 것이오.”
“이것으로 피차 서로에게 진 빚은 없는 것이오.”
현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동의하오. 헌데 제자들에게 듣기로는 당문과 아미파도 가만두지 않으시겠다고 들었소. 정말 사천으로 넘어가실 생각이시오?”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유진산은 고민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불을 지른 무림맹원 중에 당문과 아미파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음양쌍괴의 이름으로 강호의 강자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마침 그들에게 명분이 생겼기에 그렇게 순서를 정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종남파의 입장에서는 음양쌍괴의 목적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장문인 현종은 이번에 당한 굴욕과 망신을 최소화하는 것을 원했고, 장로 현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사천성의 당소천이라는 고수에 대해서 들어보셨소?”
유진산의 고향이자, 일생의 대부분을 머물렀던 터전은 섬서 지역이었다.
과거 아미산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사천지역에 머무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곳의 정세에는 눈이 어두운 것이 당연했다.
“사천의 정세는 잘 알지 못하오.”
“그는 당문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오. 십 년 전에 화경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아무도 모르오.”
당문을 응원하긴커녕 자신한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주다니.
그의 속내를 짐작한 유진산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할 말은 그것뿐이신가?”
잠시 뜸을 들이던 현호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가 펼치는 만천화우(滿天花雨)라는 초식을 조심하시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
그런 강자라면 충분히 싸워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의 속마음을 짐작한 유진산이 위로하듯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종남파는 우리에게 당한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오.”
그 순간 어둠이 가득했던 현호 장로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