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우리만 당할 수는 없잖아 (1)
손녀와 눈을 마주친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도 문파의 어른이니 예우는 해줘야겠지. 편안하게 보내줘.”
종운의 배분은 원로 중에서도 높은 축이었으며, 인자한 성품으로 도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문파에 위기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종남산의 어딘가에서 여생을 편히 보내고 있을 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모두의 앞에서 처형을 당한다니? 편히 보내주라는 양괴의 한마디에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안 된다, 이놈들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느냐!”
“끄흐흑…….”
울부짖는 도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곧이어 음괴가 종운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부는 그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켜보는 것밖에는.
더군다나 장문인의 목숨은 양괴가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때 엉거주춤 일어선 종운이 도사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슬퍼하지 말거라. 결투에서 패배하여 죽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는냐.”
오히려 도사들의 통곡은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결투에서 패배한다면 승자가 목숨을 결정한다. 그것이 무림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종운은 등 뒤에서 사근사근한 음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서 가요, 할아버지. 편안하게.”
“……무슨?”
종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유설이 다시 한번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할배가 보내주라잖아요. 빨리 가요. 나, 다음 상대랑 싸워야 하니까.”
애초부터 이곳은 도사들을 죽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유진산이 편히 보내주라고 한 뜻은 하늘이 아니라, 왔던 곳으로 보내주라는 의미였다.
지금껏 상대를 죽여본 적이 없는 유설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럼 지금 날 가지고 장난을…….”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자신의 등 뒤로 음괴의 손바닥이 다가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설의 손은 등과 한 치의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곧이어 손바닥과 등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응축된 기(氣)가 폭발하며, 거센 반발력을 뿜어냈다.
쩌엉-!
종운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발로 지면을 끌며 멀어져갔다.
주르르륵-!
그가 멈춘 곳은 원래 있던 자신의 자리였다.
주변에 있던 도사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며 기뻐했다.
“태, 태사숙!”
“괜찮으십니까?”
무사히 원래 자리로 돌아온 종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저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
직접 당해본 그는 그렇게 확신했지만, 쉽게 포기할 종남파의 도사들이 아니었다.
장로 현종이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종찬 사숙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십 년 전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으니, 지금쯤 엄청난 고수가 되셨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곳에나 비장의 무기가 하나쯤은 있는 법.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유설은 무척 기대했다.
종운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종찬 사제의 사부님이 와도 안 돼. 그리고 사제의 수련을 물거품으로 만들 셈이더냐.”
“죄송합니다, 사숙.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때 어두운 표정으로 최고 원로인 종해가 다가와 말했다.
“종운 사제가 맞다. 분하지만 저들의 요구가 무엇이든 모두 들어주고, 이 사태를 수습하거라.”
현호 장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서면 우리 종남의 명예가…….”
“현호야.”
현호 장로는 문파 내에서 위엄 있는 인물이었지만, 원로들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사백…….”
“지금 우리에게 지킬 명예가 뭐가 더 남았단 말이더냐.”
현호는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의 상황이 억울하고 분했기 때문이다.
문파의 신물은 빼앗겼으며, 장문인은 양괴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이다. 그것도 모자라 도와주겠다고 온 큰어른까지 두들겨 맞지 않았는가.
예전부터 음양쌍괴에게 당한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끄윽.”
“지금은 살아남아서 명맥을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비록 우리 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기회까지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이대로 음양쌍괴와 죽기로 싸운다면 종남파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터.
현호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일단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누군가의 고함이 그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음양쌍괴가 사라졌습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음양쌍괴가 감쪽같이 증발한 것이 아닌가.
도사들이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갔어?”
“그냥 떠난 거 아냐?”
의문과 혼란. 그리고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모두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가장 무공이 뛰어난 종운을 제외하고는.
그가 최고원로인 종해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저쪽입니다, 사형.”
이제야 모두가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멀어져가는 양괴의 뒷모습을.
분명 그는 종남파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도사들은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현호 장로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음괴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숙.”
그들이 확인한 것은 오직 양괴뿐이었다.
그 누구도 음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종운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움직임을 놓쳐서 잘 모르겠구나. 같이 내려갔길 바랄 수밖에.”
“이렇게 그냥 떠날 놈들이 아닙니다. 그 음괴라는 대마두가 얼마나 사악하냐면…….”
현호는 말을 하다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곧이어 다른 장로 한 명이 다급히 어딘가를 향해 검지를 내뻗었다.
“저, 저런!”
구름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하늘.
마치 구름을 타고 나아가는 제천대성처럼, 음괴가 허공을 가로질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수많은 도사가 공포에 질리며 당황했다.
“세, 세상에나.”
도사들이 밀집한 곳으로 이동한 음괴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누군가의 뒷덜미를 낚아채고는 다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모습 같았다.
“이대 제자 무성입니다.”
“저 아이를 왜 데려가?”
그 의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하여 이대 제자 한 명만 납치하여 데려간다는 말인가. 장문인과 원로고수는 멀쩡히 살려둔 채로 말이다.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때 어느새 정신을 차린 장문인 현종이 원로들에게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문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어찌 얼굴을 들 수가 있겠는가.
“장문인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은퇴한 원로들은 어떤 경우에도 문파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문파의 존망이 걸린 위기가 찾아오면, 힘을 보태주는 것이 전부일 뿐.
“현종아.”
“예, 종해 사백.”
“우리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그들을 만나 이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거라.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방금 그자들이 음양쌍괴라 불린다고 했던가.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과는 대적할 생각은 버리거라.”
현종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비참했기 때문이다.
“왜 대답하지 않는 것이냐.”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개백정 같은 짓만 골라서 하는 사파의 우두머리들입니다. 그냥 놔두면 결국 우리 종남파를…….”
음괴와 싸웠던 종운이 나서서 다시 한번 그를 설득했다.
“방식이 거칠고, 성난 금수들처럼 막무가내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게 악인들은 아닌 것 같구나.”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종운이 그의 말을 잘랐다.
“되었다. 장문인인 네가 알아서 잘 결정하리라 믿는다. 우린 이만 돌아갈 테니, 더는 그들과 관련된 일로는 부르지 말거라.”
그것을 마지막으로 원로들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다시 산속으로 은거하여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원로들이 사라진 후 현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종남파의 역사상 최악의 날이었다.
장문인으로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을 정도였다.
“휴. 지금 즉시 최고회의를 진행하겠다.”
종남파의 문주 현종과 여덟 명의 장로가 한자리에 모였다.
당대의 문파를 경영하는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탁상을 마주한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장문 사형. 음양쌍괴의 집에 불을 지른 무림맹원 중에 셋이 우리 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당문 출신이고, 나머지 하나가 아미파의 비구니였지요.”
“계속 말해보게, 현진 사제.”
“다음은 아마도 당문의 차례가 될 공산이 큽니다. 그들에게 미리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지요. 당문의 당소천이 직접 나선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천의 당문은 무림의 오대세가 중 하나로 그 위세가 어마어마하다.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당소천이라는 무시무시한 고수가 사천일대를 주름잡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장문인인 현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으니, 사천 쪽은 신경 쓰지 말게.”
현진 장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그에게 제안했다.
“장문 사형. 경고라도 해줘야 그들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무림맹에 지원도 요청하고.”
“그냥 놔두라고 했네. 우리만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참하게도 우리 종남은 구대문파의 문턱에 겨우 걸쳐 있는 상황이었네. 오늘의 사건이 소문나면 어찌 되겠는가.”
단순히 구대문파에서 밀려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될 터였다.
“이해했습니다, 장문 사형. 당문과 아미파도 우리처럼 굴욕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군요.”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만이 우리 종남파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현종이 장로들에게 말했다.
“우리 종남파는 오늘의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다시 태어날 것이네. 지금부터 일 년간 봉문을 선언하고, 내실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네.”
장로들도 장문인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변화와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문파의 대문을 걸어 잠그고, 최대한 많은 고수를 배출하여 훗날을 준비할 요량이었다.
“장문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내내 어두웠던 현종의 얼굴이 이제야 조금 밝아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우측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지목했다.
“현호 사제.”
“예, 장문 사형.”
“사제가 음양쌍괴를 찾아서 원하는 게 뭔지 대화를 나눠보게. 납치된 아이는 구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령패도 되찾아야 하고.”
현호는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꿈에서조차 마주하기 싫은 음양쌍괴를 만나보라니.
자신을 종남이라고 호칭하며, 마구 때렸던 음괴를 생각하면 지금도 뼈마디가 시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장문인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장문 사형…….”
구름을 뚫고 치솟은 종남산의 절경은 더 없이 장엄했다.
지금 그곳의 구름을 밝고 신선처럼 나아가는 자들이 있었다.
“살, 살려주십시오.”
음괴한테 잡혀가고 있는 이대 제자 무성이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래를 볼 수조차 없었다.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아찔해졌기 때문이다.
“나랑 우리 할배한테 욕했지? 넌 죽었어.”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습니다. 제발…….”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겁도 없이 음양쌍괴에게 욕을 하고 도망치다니.
그의 뒷덜미를 움켜쥔 유설은 더욱 빠르게 허공을 질주했다.
잠시 후, 약속된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와 극살오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