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2)
어느새 이틀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떠나라고 했음에도 극살오의는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손녀의 강호 친구들을 때릴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텃밭에 모여서 쉬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희들 정말 어쩌려고 그래? 새벽에 야반도주라도 해서 먼 곳으로 도망치라니까.”
천우환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독사 같은 팽가의 노인네한테 위치를 들켰으니, 무림맹에서 매복했을 게 확실해요.”
그 순간 유진산이 한 손을 슬쩍 올려서 때리는 시늉을 했다.
“노인네는 무슨 노인네? 이 녀석이 지금 노인들을 우습게 보는 게냐? 네가 노인의 심경을 알아!?”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유진산은 턱짓으로 약재 더미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됐다. 저것들이나 자루에 담아놓고 있거라. 가져갈 때가 있으니.”
“전부 말입니까?”
“왜? 너희들도 한 뿌리씩 먹게 해줘?”
“아, 아닙니다, 어르신!”
극살오의는 포대가 있는 곳을 향해 부리나케 뛰었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뒷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쿠쿠쿠쿠쿵-!!!
마치 종말이라도 찾아온 듯, 온 세상이 뒤흔들렸다.
전각이 무너질 듯 진동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도 꺾일 듯이 요동쳤다.
모두가 화들짝 놀랐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또 시작했군. 용격사자후라고 했나?’
유설은 소소에게 마지막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용격사자후(龍擊獅子吼). 이름처럼 하늘 위의 용을 사자의 포효로 떨어트린다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단순히 고함을 치는 것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내공을 단번에 발산하는 필살의 음공이었다.
자신이 아는 그 어떠한 무공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었다.
검후에게 듣기로는 내공이 입신지경에 도달한 선음지체만이 이 기술을 익힐 수 있다고 했다.
오직 세상에서 둘만이 익힐 수 있는 사기 같은 무공이었다.
‘휴. 이러다 집이 무너지겠구나.’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전각으로 들어갔다. 봇짐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아주 머나먼 여정이 될 터.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챙길 것이 많았다.
손녀의 옷가지를 고이 접어 넣고 있을 때쯤이었다.
“할아버지도 벌써 출발하시게요?”
마지막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소소였다. 옆에는 유설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갈 길이 머니, 머뭇거릴 수야 없지요. 검후님도 오늘 떠나신다고 하셨지요?”
“예. 설이에게 필요한 기술들은 모두 전수했으니,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무공을 공유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셨을 텐데…….”
검후의 기술들은 하나하나가 만금의 가치를 지닐 정도로 귀중하다.
그런 것들을 자신의 손녀에게 전수해줬으니 고마울 수밖에.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아닙니다. 저도 설이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는걸요?”
유진산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얘한테요?”
“예, 그럼요. 설이의 설설봉타와 촉수백팔타를 잘 연구하면, 무적의 검법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손녀가 직접 창안한 무적설이창법의 초식들이었다.
비록 창으로 펼치는 무공이었지만, 검후라면 그것을 검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터.
유진산은 손녀가 뿌듯한 미소로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언니한테 알려줬어.”
“그래, 참 잘했구나. 할애비는 잠시 나가 있을 테니, 언니랑 떠날 채비를 하고 나오너라.”
유진산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둘이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응? 어디 가려구?”
“오늘 점심은 시장에서 다 같이 푸짐하게 먹자꾸나.”
검후와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가 될 터.
호현의 객잔에서 푸짐하게 대접해주고 싶었다.
조손은 내친김에 짐까지 모두 챙겨서 나왔다.
함께 따라온 극살오의도 짐이 가득했다. 진산삼을 담은 포대를 챙겨 나왔기 때문이다.
여덟 명은 객잔의 중심부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에 가장 신난 것은 유설이었다.
“언니, 이런 거 먹어봤어? 맛있으니까 한번 먹어봐.”
“응. 고마워, 설아.”
유설은 연신 소소의 접시에 음식을 올려주었다. 그녀가 좋은 모양이었다.
“이 녀석, 언니 입만 입이더냐.”
할아버지가 삐진 듯 말하자 유설이 멋쩍어하며 씩 웃었다.
“히힛. 할배도 먹어봐.”
“됐다! 엎드려서 절 받는구나.”
유진산의 장난에 소소가 깔깔대고 웃었다.
식사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주변은 지금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음괴와 검후가 한자리에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한 화젯거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왁자지껄하는 소란스러움이 끊이질 않았다.
“검, 검후 맞지?”
“확실해. 금분세수식에서 본 적이 있어.”
“어째서 검후님과 음양쌍괴 대협들이 한자리에 있는 거야?”
“혹시 같이 무림맹에 쳐들어가려는 걸까?”
“설마? 저분은 이미 은퇴하셨잖아.”
시끄러움이 점점 거세졌다.
그러자 묵묵히 앉아있던 극살오의 중 맏형인 천우환이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눈에 힘을 주며 주변을 향해 원을 그리며 걸었다.
“모두 주둥이들 여물어. 검후님과 음양쌍괴 대협들이 식사하시는데, 방해할 참이야?”
시끌벅적했던 객잔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간 유설과 소소의 위세에 가려져 있었을 뿐, 극살오의 또한 호현에서는 유명했다.
천우환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돌연 그의 얼굴이 굳어지며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홀로 앉은 경장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그자는 주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천우환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깐, 너 나 알지?”
그가 눈알을 부라리자, 중년인이 시선을 회피하며 당황했다.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요? 난 당신을 처음 보오.”
“난 한 번 본 얼굴은 잊어먹지 않아. 내 눈 똑바로 봐.”
분위기가 이상해지려 하자, 보다 못한 유진산이 그를 만류했다.
“그만!”
그의 한마디에 천우환이 즉시 되돌아와서 양손을 모았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어르신.”
“즐거운 식사자리에서 꼭 그래야겠는가.”
천우환은 조금 전의 중년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기회를 틈타 객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방금 그자 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정파 놈이 확실합니다.”
사파의 성지인 호현은 정파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천우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의 사정을 염탐하러 온 인물이리라.
어디 이 객잔뿐이겠는가. 무림맹에서 심어놓은 정보원들은 어딜 가나 있을 터였다.
“조무래기들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것 없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주위에도 사과하게. 사파는 사파다워야지, 어찌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망쳤는가.”
천우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변을 향해 양손을 모았다.
“미안하오, 형제들! 이 천우환이 사과의 의미로 오늘 술 한 잔씩 올리겠소!”
사파의 무림인들은 그의 사과를 호탕하게 받아주었다.
객잔 안이 다시 왁자지껄해지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일행은 함께 시장을 구경했다.
찻집에도 가고, 노점에서 간식도 사 먹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극살오의는 짐꾼이 되어 열심히 쫓아다녔다.
날이 어둑해지자 그들은 마을 입구로 이동했다.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었다.
“가지 마, 언니.”
유설이 울먹이며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손을 놓아주지 않았기에 소소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설아.”
“정말이지?”
“그럼~ 그땐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멋진 구경도 하러 가자.”
“응……. 꼭이야.”
“그래, 언니가 약속할게.”
소소는 유설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후, 다시 유진산을 향해 다가갔다.
“고맙다니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설이를 이렇게 잘 키워주지 않았습니까.”
유진산의 얼굴에 인자한 웃음이 떠올랐다.
“단지 할애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세상의 운명이 설이에게 달려있습니다. 큰 짐을 안겨드리고 떠나 마음이 무겁군요.”
소소는 잠시 유진산과 시선을 마주쳤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둘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모쪼록 무운을 빌겠습니다.”
유설은 우울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소소의 뒷모습을 계속 주시했다.
그녀도 마음이 쓰이는지 힐끗힐끗 몇 번이나 뒤돌아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머지않아 또 만날 게다. 우리도 어서 떠나야지?”
유진산이 손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해주었다.
“어디로 갈 건데?”
“음. 먼저 패도문에 들러서 이걸 전해주고, 가장 먼저…….”
그는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를 주시했다.
이곳에서 얼추 십수 리가 떨어진 위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극살오의가 중얼거렸다.
“불이 났나 보네요.”
“도대체 어느 놈들이 야산 근처에서 불장난을…….”
“저거 잘못하면 불이 커지겠는데요?”
그들은 태연히 말하고 있었지만, 조손의 반응은 달랐다.
“할배. 저기 우리 집이 있는 방향 아니야?”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유진산도 마찬가지였다.
확인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 금방 보고 오마. 여기서 기다려.”
경공을 펼친다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지켜만 보고 있을 손녀가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옆에서 유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물었다.
“누가 우리 집에 불 지른 거 아니겠지?”
“아닐 게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
하지만 조손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둘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매입한 지 얼마 안 된 장원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전각에는 절반이나 불이 옮겨붙은 상태였다. 텃밭은 볼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홀라당 탓을 터였다.
아직 호박과 가지는 수확하지도 못했거늘.
“아니, 도대체 어떤 고얀 놈들이!?”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유진산조차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감히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다니.
“누구야…….”
유진산은 손녀의 분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양손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니 폭발하기 직전인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돌연 유설의 입에서 엄청난 음파가 뿜어져 나왔다.
【누구야!!!!!】
눈앞에서 목격하는 용격사자후의 위력은 엄청났다.
거센 지진과 함께, 엄청난 돌풍이 장원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담벼락을 단번에 무너트렸으며, 불이 붙은 전각을 덮쳤다.
불은 단번에 진압되었지만, 충격의 여파로 전각이 통째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힘들 게 구한 보금자리를 잃었으니, 그 충격을 어찌 이루어 말할 수 있겠는가.
유설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잠시 지켜보던 유진산이 손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갔다.
“괜찮다, 아가. 일을 모두 마치면, 지난번에 제사를 지냈던 유가장으로 돌아가서 살자꾸나. 할애비가 방법을 찾아보마.”
그러나 유설은 격해진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극살오의는 멀찍이서 마른침을 꼴깍 삼킨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천우환이 유진산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 속삭였다.
“어르신. 아까 객잔에서 봤던 그놈이 아닐까요? 누군지 이제야 기억났습니다.”
“어서 말해.”
천우환은 호흡을 크게 한 번 들이켜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림맹의 섬서분타에서 봤던 새끼입니다.”
역시나 무림맹의 일원이 벌인 짓이란 말인가?
이렇게 치졸한 짓을 할 정도면, 십중팔구 조무래기일 터.
그의 주장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도제 팽무기처럼 명망이 높은 노고수들은 이런 짓을 치욕으로 여길 테니까.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주변을 한번 수색해봐야겠다.”
그때 유설이 발자국과 잔향 등 흔적들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한 명이 아니야. 나는 저쪽으로 갈게.”
여러 명이 한 조로 움직였다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계획적으로 불을 지른 것일 터.
용서할 수가 없었다.
“오냐. 지금부터 흩어져서 주변을 조사하되, 위험하거나 뭔가를 발견하면 바로 호각을 불어라. 삼십 리 안에서는 내가 바로 달려갈 수 있다.”
극살오의도 같이 분노하며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