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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16화 (216/238)

216화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1)

유진산의 경고를 신경 쓸 팽무기가 아니었다.

도제의 칭호를 얻은 절대강자로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자였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곳이 음양쌍괴의 집이라는 것을.

팽무기의 신형이 담장을 넘기 위해 날아올랐다.

단숨에 맞은편으로 도약한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검후와 음괴를 이 집안의 식솔쯤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처럼.

유진산과 잠시 눈을 마주쳤지만, 신경도 안 쓴다는 눈치였다.

“여기 숨어있었군, 극살오의. 너희들은 오늘 죽는다.”

그의 시선은 다섯 명의 사파 고수를 향해 고정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겁에 질려야 할 그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라니?

급기야 그들은 자신에게 도발까지 했다.

“뭐 어쩌라고?”

“쥐새끼같이 생긴 늙은이가 뭐라는 거야?”

“그동안 참아줬더니, 우리가 만만해 보이나 보네. 노망났어?”

그야말로 사파 다운 걸걸한 입담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상황이었다.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도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극살오의 따위가 어찌 감히 자신에게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분명 믿고 있는 구석이 있을 터.

그의 시야가 다시 좌측으로 향했다.

조금 전 무심코 지나쳤던 꼬마가 뒷짐을 진 채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제대로 보이나 보지?”

팽무기의 시선이 유진산의 전신을 다시 한번 훑었다.

꼬마임에도 기개가 대단했다.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연륜이 묻어나는 풍채라니.

그의 눈썰미는 유진산의 정체를 유추해 내고 있었다.

“……양괴?”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 우리 집으로 넘어오면 죽는다고 했지?”

유진산은 목과 양손의 뼈를 풀어댔다.

우득-! 우드득-!

도제(刀帝) 팽무기. 예전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칠 전설적인 고수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진산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때 팽무기가 날카로운 도를 사선으로 늘어트리며 말했다.

“네놈 따위가 날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유진산도 알고 있었다.

비록 역근경이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팔성(八成)의 화후로는 도제를 감당할 수 없음을.

그래도 잠시라도 한번 싸워 보고 싶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게지.”

유진산이 발을 한 번 튕기자, 바닥을 굴러다니는 죽봉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죽봉을 움켜쥔 그는 자세를 낮추며 기수식을 취했다.

하지만 팽무기는 도를 내리깔고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처럼.

오만함이 가득한 그였지만, 눈치가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양괴가 있는 곳에는 음괴도 있을 터.

드디어 그의 동공이 움직이며, 유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괴?”

처음부터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제대로 인식할 수가 있었다.

존재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동물처럼.

기를 완벽히 갈무리할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 눈을 마주친 음괴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도둑놈!?”

아무리 무단으로 담장을 넘어왔다지만, 천하의 도제를 도둑 취급하다니.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팽무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음괴를 마주한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리고 그가 머뭇거리던 그때.

“오랜만이네요, 도제 영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팽무기는 다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녀의 존재를 이제야 인지하다니.

그곳엔 음괴처럼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 곧이어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팽무기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검후가 왜 이곳에…….”

소소는 미소 띤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팽무기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음괴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국에 검후까지 함께 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으나, 영문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르신, 도제가 도망치기 전에 어서 퇴로부터 막아야 합니다.”

“겁도 없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왔으니, 절호의 기회입니다.”

극살오의가 유진산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팽무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빠져나갈 기회가 없을 터.

일평생 도주라는 것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팽무기였다. 명성에 흠집이 가겠지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단 백 배는 나았다.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담장을 향해 나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 팽무기는 담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야말로 게눈감추듯 엄청난 속도였다.

극살오의가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쳐!”

“게 섯거라!”

담장을 뛰어넘은 그들은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저 멀리 멀어져가는 도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이 쥐새끼 같은 새끼야!”

“잡히면 가만 안 둔다!”

그를 향해 정신없이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막내인 천우진이 다급히 말했다.

“형, 형님들, 멈추십시오! 대협들이 따라오질 않습니다.”

극살오의 중 나머지 넷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팽무기를 뒤쫓는 것은 자신들뿐이었다.

그리고 천우진의 외침은 당연히 팽무기의 귀에도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이, 이거 난리 났구나.”

“모두 대기해!”

그들은 곧이어 분노에 사무친 팽무기의 두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참한 도주에 심기가 불편했던 그였다. 거기에 도를 넘은 극살오의의 도발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포기할 것 같으냐.”

이십여 장의 거리였음에도, 다섯 명의 사파인들은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쳤다.

여차하면 바로 도망칠 자세를 잡고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극살오의는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을 노려보던 팽무기가 이를 갈며 한마디를 남겼다.

“반드시 잡아서 모두 죽여주마. 한 명도 빠짐없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려 유유히 사라져갔다.

덩그러니 남은 다섯 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저 늙은이가 우릴 끝까지 잡으려고 작정한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 음양쌍괴 대협들이 지켜줄 테니까.”

그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유설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에게 묻고 있었다.

“왜 그냥 놓아주었어?”

평상시의 유진산이였다면 어떻게든 잡아서 처치했을 터였다.

무림맹의 고수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상황이 바뀌었다.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굴복시킬 게다.”

유진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모두의 인정을 받은 자만이 진정한 무림의 지존이 될 수 있으니까.”

“지존이 되어야 한다고? 누가?”

“누구긴, 네가 해야지. 그럼 할애비가 할까?”

“할배도 같이 하면 되지.”

유진산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무림이 의지할 수 있는 지존은 단 한 명뿐이어야 한다.”

유설은 머지않아 뭔가 재밌는 일이 시작될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일까? 이미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히히. 그럼 내가 무림에서 최고가 되는 거야?”

“할애비가 너보다 위니까, 내가 최고지.”

유설이 검지와 중지를 펴 보이며 물었다.

“그럼 나는 두 번째?”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때 소소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럼 저는 세 번째를 시켜주세요, 할아버지.”

유진산은 아차 싶은지 머리를 쓱 긁적였다.

검후의 앞에서 무림 제일의 자리를 논했으니, 민망할 수밖에.

“이미 은퇴하셨으면서…….”

소소가 깔깔 웃으며 그를 귀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농담이었어요. 저는 이틀 후에 다시 떠날 겁니다.”

“그렇게 빨리 간다는 말입니까?”

“예. 예상보다 설이의 습득 속도가 빨라서, 이틀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그때 유설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 어디 가려구?”

“음. 언니도 설이랑 같이 있고 싶지만, 천축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소소의 백옥 같은 손길이 유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싶지만, 설이도 이곳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어느새 유설의 눈가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졌다.

서로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유설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짧은 시간 정을 붙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을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녀석. 검후가 엄마 같은 모양이로구나.’

과거의 만남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손녀가 아기였을 당시, 검후에게 엄마라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유설 또한 자신이 떼를 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히잉. 또 볼 수 있는 거지?”

“그럼! 그동안 우리 같이 재밌게 놀까?”

대답하는 유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손녀의 심정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우리도 곧 떠나야 한다, 아가.”

“응? 우린 어디 갈 건데?”

“강호를 한 바퀴 순회할 게다. 안 가본 곳을 전부 가보게 될 테니, 기대해도 좋아.”

“정말로?”

“그럼!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언니랑 열심히 수련해둬.”

우울했던 유설의 기분이 금세 좋아지기 시작했다.

“알았어, 할배!”

소소와 유설은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이번에는 또 다른 기술을 전수해 줄 모양이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유진산은 우측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느새 돌아온 극살오의가 구석에서 조용히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너희들은 잠시 이쪽으로 와 보거라.”

한달음에 달려온 다섯 명이 유진산의 앞에 도열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며칠 후면 우리도 집에 없을 게다. 그러니 너희들도 내일쯤 떠나거라.”

극살오의는 기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림맹에서 자신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도제도 근처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도 내일 당장 떠나라니? 그들은 몹시 당황했다.

“내, 내일 말입니까?”

“그, 그럼 저희는 척살을 당하고 말 겁니다.”

유진산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노부가 볼 때 너희들은 주둥이가 문제다. 항상 겸손해야 하거늘, 그렇게 촐랑거리니 명줄이 짧아지지.”

가는 곳마다 무림맹의 섬서분타를 공격한 게 자신들이었다고 자랑하던 극살오의였다. 허나 그것이 화근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정파의 명예에 흠집을 내었으니, 척살목록에 오를 수밖에.

무림맹에서도 음괴를 잡는 게 쉽지 않은 만큼, 만만한 극살오의라도 잡아서 본보기로 삼으려 할 게 자명했다.

“살, 살려주십시오, 어르신.”

“시키는 건 모든 다할 테니, 제발…….”

“이대로 나가면 저희는 그냥 죽어요.”

거의 울먹이며 애원하는 수준이었다.

유진산은 그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명색이 절정을 넘어선 사파의 고수들이거늘. 정파 놈들과 비교하면 무게감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들이었다.

“그럼 여기 남아서 집이나 지키든가. 어차피 우린 떠나야 해.”

극살오의 중 맏형인 천우환이 양손을 모으고 비굴하게 물었다.

“저, 저희도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어딜? 우리를? 너희들이 따라다니면서 뭘 하게?”

“짐꾼이든 뭐든,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며칠만이라도 제발…….”

유진산의 입에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어휴. 이 끈질긴 녀석들을 도대체 어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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