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호랑이와 봉황, 그리고 늑대 (3)
“헌데 누가 너희들을 쫓고 있지?”
천우환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도제 팽무기. 그자가 저희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도제(刀帝)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거물이었다.
하북팽가의 제일 고수로 유진산조차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도법으로는 무림에서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극살오의가 기겁하고 도망쳐다니는 것이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우리 집으로 그런 무시무시한 놈을 달고 왔다고?”
“송구스럽습니다. 음괴 대협만이 그놈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풍기는 고수였다.
하지만 누가 오더라도 겁먹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노부는 어때?”
천우환은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빼고 물었다.
“음괴만 상대할 수 있다며? 그 말은 노부는 도제한테 안 된다는 말이더냐.”
“그, 그게 아니라…….”
천우환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양괴의 명성이 도제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예전의 유진산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자신감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쯧쯧.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냐. 노부의 본 모습을.”
극살오의는 이제야 유진산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느낌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무공 수준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오직 음괴뿐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유진산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서렸다.
빈말이라도 자신이 도제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해줄 줄 알았거늘.
괘씸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림은 명성이 가장 우선시되는 세계였으니까.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등을 돌렸다.
“고얀 녀석들. 이리 따라오너라.”
극살오의는 감격하며 그의 뒤를 향해 연신 포권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유진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우측으로 연못이 있는 곳에서 음괴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포권을 한 번 더 건네었다.
그러고는 그들의 시선이 다시 좌측을 향했다.
음괴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미모의 여인. 양괴가 말했던 손님이리라.
극살오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유진산이 그들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손님을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쓰나.”
천우환이 당황하며 대꾸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분명 어디선가 뵈었던 분 같은데…….”
“저, 저도요!”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유진산은 그녀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여지는 것을 보았다.
말해줘도 상관이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검후님이지.”
그 순간 다섯 명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과거 검후의 금분세수식이 진행되었던 날. 극살오의 또한 그곳에 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리라.
“검, 검후께서 왜 이곳에…….”
“이럴 수가…….”
그들의 반응이 재밌었기 때문일까? 유진산이 은근슬쩍 물었다.
“부담스러우면 나가도 돼. 잡지 않을 테니까.”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검후와 음괴가 한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임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극살오의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앞장서던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너희들도 밥값은 해야겠지.”
천우환이 다가오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다 할 수 있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그들의 모습에 유진산도 흡족했다.
잠시 후 그들의 발걸음이 텃밭에 도착했다.
그가 왼쪽의 절반 부근을 검지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늘은 저쪽의 삼밭을 수확하거라. 아주 귀한 약초들이니 조심히 다뤄야 해. 작업이 끝나면 너희들에게도 따로 요리해서 먹여주마.”
“……혹, 혹시 진산삼입니까?”
진산삼은 손녀가 지은 약초의 이름이었다.
유진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먹어봤어?”
극살오의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괴님께서 저희에게…….”
“제, 제발 저걸 먹는 것만은…….”
이미 손녀가 먹였을 줄이야.
유진산은 계획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혀를 찼다.
“쯧. 다 큰 녀석들이 먹을 거 가지고 투정이나 부리고. 금방 끝날 테니, 쉬엄쉬엄 작업해.”
극살오의는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아 그의 등 뒤로 포권을 건넸다.
“예, 어르신!”
“고맙습니다!”
휘이잉-!
따스했던 태양 아래로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텃밭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극살오의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형님들, 저는 태어나서 밭일은 처음 해봐요.”
“그럼 우리는 해봤겠냐?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사부님이 알면 관속에서 까무러칠 거다.”
“큭큭.”
“하하핫!”
“헛소리들 하지 말고, 열심히 작업이나 해. 쫓겨나기 싫으면.”
“예에~!”
이들은 분명 신이 난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꿈만 같구나. 우리가 그분들과 함께 지내다니.”
“모두가 우리를 부러워할 거예요, 형님.”
“당연하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사파의 영웅인 음괴와 전대 무림의 제일고수인 검후와 한집에서 지내게 될 상황이었다.
그들은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남았으니깐 빨리들 끝내자고.”
극살오의가 캐낸 진산삼은 족히 사백 뿌리에 가까웠다.
잠시 후 작업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아저씨들 뭐해요?”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유설이 방긋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극살오의 중 둘째인 천우소가 양손을 털고 일어서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음괴 대협?”
“우리랑 같이 놀래요? 언니가 물어보래요.”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검후와 음괴가 같이 놀자고 제안을 해오다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정말입니까?”
“좋죠!”
유설이 씩 웃으며 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그들의 검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받아요!”
극살오의는 당황하면서도 저마다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텁-! 터업-!
“근데 뭘 하는 건데요?”
“가보면 알아요.”
유설은 그들을 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선 소소가 다소곳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극살오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주춤거렸다.
두 명의 절세고수와 함께 훈련장에 서다니.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의 심정을 눈치챈 소소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괜찮아요, 오라버니들. 해치지 않아요.”
장난기 섞인 그녀의 한마디에 그들의 긴장감도 사르륵 녹아내렸다.
“저희가 뭘 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부터 몇 가지 놀이를 할 거예요. 아 참! 저는 심판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설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저씨들이 날 잡아봐요!”
설마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애들이나 하는 놀이였지만, 어찌 싫은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 저희는…….”
첫째인 천우환이 말끝을 흐리자, 소소가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러분은 무기를 사용해도 좋아요. 만약 옷자락이라도 건드리는 분이 있다면, 제가 포상으로 무공 하나를 전수해드리지요.”
그녀의 제안이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후의 무공이라니? 만약 그녀에게 뭔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고 달려들 무림인이 줄을 설 것이다.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음괴가 두 눈까지 천으로 묶고 있지 않은가.
“그게 전부입니까?”
“그럼요.”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비좁은 훈련장 내에서 다섯 명을 피해 도망만 다닌다. 게다가 눈까지 가린 채로.
음괴의 움직임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어도, 어떻게든 얻어걸리기라도 할 듯했다.
“좋습니다!”
유설은 이미 훈련장의 중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요.”
다섯 명의 사파 고수는 음괴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손아귀에는 검집을 하나씩 움켜쥐고 있었다. 스치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굳이 진검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천우환의 지시에 따라 다섯은 성큼성큼 포위를 좁혀갔다.
그리고 삼 장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다섯이 중심부를 향해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일률적이고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합을 맞춰왔기에 손발이 잘 맞는 자들이었다.
순식간에 음괴의 코앞으로 접근한 그들이 동시에 검집을 내지르는 그때.
돌연 눈부신 섬광이 번쩍이며, 그들의 시야를 차단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유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헛?”
“이럴 수가.”
극살오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설은 이미 오 장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히히. 나 여깄어요.”
검후에게 전수받은 경신술인 섬전비영보였다.
배운 지 불과 하루도 안 되어 흉내 낼 수 있을 정도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자질에, 지켜보던 소소도 갈채를 보낼 정도였다.
“지금부터 제대로 합니다!”
또다시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는 극살오의도 필사적이었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잡을만하면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통에 약만 바짝 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역근경을 수련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유진산이었다.
‘저 녀석들을 받아주길 잘했구만. 안 그랬으면 내가 저 자리에 있었겠지.’
자신이 손녀를 잡으러 뛰어다닌다고 상상을 해보니,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식객으로 찾아온 극살오의는 여러모로 쓸데가 많았다.
머지않아 그들이 지쳐서 포기하자, 유설이 다른 것으로 유혹했다.
“이제 우리 다른 놀이 할래요?”
“더 재밌는 거 있어요.”
경신술의 실전연습은 시작에 불과했다.
검후에게 배운 새로운 무공들을 시험하면서 몸에 익혀두려는 것이다.
극살오의 정도라면 그러기에 아주 적당한 수준이었다.
‘쯧쯧. 불쌍한 녀석들. 오늘 제대로 낚이는구만.’
유진산이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담장 밖에서 적개심이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너라, 극살오의. 여기 숨어있는 거 알고 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이 쩌렁쩌렁 메아리치고 있었다.
최소한 화경을 뛰어넘는 절대 고수.
그것도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어지간한 수준이 아닐 터였다.
‘도제가 맞는 듯하구나.’
겁에 질린 극살오의는 얼음처럼 정지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반면 소소와 유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때 유진산이 담장 밖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누군데 남의 집 앞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게야!?”
도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담장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당장 그놈들을 내보내라. 만약 내가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한패로 간주할 것이다.”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야? 여기가 누구 집인 줄 알고?”
유진산의 강경함 때문일까? 도제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듯했다.
다만 그것이 분노인지, 당황스러움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향해 유진산이 다시 한번 일침을 박았다.
“보내줄 때 그냥 가거라. 우리 집 담장을 넘어오면 넌 죽어.”
감히 그 누가 도제에게 이런 도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명색이 무림의 십대고수에 포함될 정도로 전설적인 강자였다.
돌연 엄청난 살기(殺氣)가 담장을 넘어 이곳까지 전해져 왔다.
“도제 팽무기. 그게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