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호랑이와 봉황, 그리고 늑대 (1)
검후에게선 유설처럼 어떠한 기운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고수이기 때문이리라.
“다시 무림으로 돌아오신 건지요?”
두 명의 절세고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유진산의 마음은 몹시 든든했다.
만약 검후와 유설이 힘을 합친다면 무서울 것이 없을 터.
하지만 그런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금분세수식을 거행한 제가 어찌 무림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규칙을 어길 수는 없지요.”
금분세수식은 손을 씻고 무림을 은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진산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혹시나 해서 한번 물어보았을 뿐.
“이거 제가 괜한 오해를 했군요.”
“아닙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답니다.”
“천축과 관련된 일인지요?”
“맞습니다. 그곳으로 떠났던 제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림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경고라니요?”
검후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앞서 사도련주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온 상황이다.
자신에 관해서도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 빨라질 터.
“모든 우려가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듯하군요. 상황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예. 그들의 전력이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기에 내부에서 흔들어 보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천하의 검후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니. 자신의 짐작보다 더 심각한 듯했다.
“정녕 그 정도란 말입니까?”
검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천축에서 저와 함께 공작 활동을 하는 고수가 두 분이나 더 계십니다. 그런데도 현재로선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느 정도나 시간을 더 벌 수 있습니까?”
“그곳의 지도자인 아라한이 저희의 존재를 눈치채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녀는 버틴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은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지 궁금증만 더해갔다.
“아라한이라는 놈이 그렇게 강합니까?”
“스스로가 신이 되려고 하는 자입니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이곳에서도 철저히 대비해야겠군요.”
“예. 그들과 맞서보려면 반드시 중원무림이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무림맹과 사도련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얘기이리라.
그러나 두 세력은 서로를 견제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위기를 대비하는 세력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창룡대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터.
“사도련주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무림맹과 함께하느니 같이 죽는 것을 택하겠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결과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정파에서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일 터였다.
서로의 사부를 죽이고, 제자를 죽이고, 사형제를 죽여왔다.
두 세력이 추구하는 이념은 둘째 치더라도, 오랜 세월 얽히고설킨 원한을 어찌 풀겠는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을 터.
“한쪽이 힘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겠군요.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예.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자는 한 명밖에는 없습니다.”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유진산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찰나였다.
옆에서 꿀물을 홀짝홀짝 마시던 유설이 씩 웃어 보였다.
“나야, 할배.”
어른들이 얘기하는 데 끼어들다니. 장난칠 상황이 아니었다.
유진산이 손녀를 나무랄 찰나. 검후가 미소를 지으며, 유설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저보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모두의 운명이 설이에게 달려있습니다.”
전대 무림의 제일고수였던 검후에게 이러한 인정을 받다니.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었지만, 걱정부터 앞섰다.
쉽게 동의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본격적으로 무림맹을 치려면 충분한 조력자들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유진산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누구보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승산이 있을 때만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손녀의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검후 또한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이어나갔다.
“전체와 맞설 수는 없습니다. 정파인들이 의지하는 기둥들을 차례대로 굴복시키십시오. 기둥이 무너지면 아무리 큰 건물이라도 붕괴되는 법이지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명문정파들을 찾아다니며, 하나씩 도장깨기를 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매우 번거롭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었다.
“쉽지 않겠지만, 일리는 있습니다.”
“예. 맹주까지 제압하면, 무림맹은 결속력이 약해져 붕괴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무림맹이 해체되면, 그들을 천축에 대항하기 위한 세력으로 사파와 함께 결속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검후가 미리 생각해놓은 것이 있을 터.
“좀 더 듣고 싶군요. 그 이후의 일도.”
“다음은 궐기를 통해 무림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정파나 사파의 이름이 아닌, 지존의 이름으로.”
자신의 손녀가 공식적으로 무림지존이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일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계획이었을 뿐,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았다.
천축의 혈사객 또한 서쪽에서도 극히 일부 지역만 순회하고, 결국 패도문에서 비명횡사하지 않았던가.
과정이 결코 순탄할 리가 없었다.
“아직은 그것이 가능할지 확신이 서질 않는군요. 콧대 높은 정파인들이 쉽게 굴복할 리도 없고.”
“상황이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고단한 일인 만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심사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음. 조금 고민이 필요한 문제로군요.”
“어쨌거나 저는 다시 천축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전까지 제가 보석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설이의 수련을 도와준다는 말인지요?”
“예. 그것 때문에 온 것입니다.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그 순간 묵묵히 듣고 있던 유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럼 언니,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자고 갈 거야?”
“응, 설이랑 같이 놀고 함께 지내려구. 어때?”
유설이 해맑게 웃으며 검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히히히. 좋아!”
검후도 유설을 마주 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인지 둘은 무척 잘 어울렸다.
선음지체라는 특이체질이 지닌 특유의 느낌과 미려한 외모까지.
그래서일까? 왠지 둘의 모습이 꼭 모녀를 보는 듯했다.
유진산도 손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모처럼 집안이 밝게 빛나는군요. 머무르시는 동안 부족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시간은 충분하니 급할 것은 없었다.
검후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검후가 집에 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사이 손녀와 둘은 무척 가까워졌다.
실과 바늘처럼 온종일 붙어 다니니 그럴 수밖에.
무엇보다 비슷한 점이 많았다. 손녀의 장난을 즐기며 다 받아줄 정도였다.
“언니, 받아!”
유설이 한 손을 휘저으자 허공을 부유하던 접시가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갈 지(之)를 그리며 다가가는 모습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접시가 검후의 주위를 맴돌며 위협을 가했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검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접시가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간다!”
잠시 후 허공에 머물렀던 접시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유설에게 되돌아갔다.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듯 속도와 각도가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급기야 환영을 만들어내며 두 개로 갈라지기까지 했다.
곧이어 유설이 그것을 낚아채고는 같은 방식으로 날려 보냈다.
접시를 요란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흡사 묘기를 하는 듯했다.
그때 때마침 유진산이 부엌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암기술인가?’
둘은 온종일 붙어 다니며, 이상한 놀이를 많이 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단순하지 않았다.
유진산은 그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보고 있었다. 검후가 손녀의 경험 중 부족한 부분을 진단하고, 보충해주고 있다는 것을.
대다수가 유진산이 가르쳐주지 못한 것들이었다.
‘헌데 어느새 저 정도까지…….’
뭘 알려주든 순식간에 터득하는 손녀의 자질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할배, 받아!”
난데없는 손녀의 외침에 유진산은 놀라 움찔했다.
눈 깜짝할 사이 자신의 코앞으로 접시가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생명이라도 깃든 듯 변화무쌍한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칫 낚아채려다 접시에 얼굴이라도 맞으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 터.
유진산은 잡는 것을 포기한 채 상체를 비틀어 피해버렸다.
벽에 부딪힌 접시가 산산이 조각나고야 말았다.
“아이고, 내 접시…….”
“잡아야지, 왜 피했어.”
유진산은 접시의 잔해를 치우며 서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 인생아. 언제까지 이렇게 손녀에게 핍박받고 살아야 하나.”
유설이 미안한지 씩 웃으며 손짓을 보냈다.
“할배도 이리 와서 같이 놀자. 셋이.”
“아니다. 할애비는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 언니랑 계속 놀고 있거라.”
자신이 같이 어울려봐야 수련에 방해만 될 터였다.
유진산은 등을 돌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유설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언니, 이제 우리 다른 거 할래?”
“으음~ 그럼 대련 연습이나 해볼까?”
“히힛, 좋아!”
유설이 오른손을 활짝 펼치자, 어디선가 목창 하나가 손아귀로 날아왔다.
검후를 향해서도 목검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검후와 음괴의 대련이라니.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의 화젯거리였다.
만약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을 것이다.
부엌에서 대화 내용을 들은 유진산도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건 꼭 봐야 해.’
무공이 입신지경에 이른 절세고수들이었다.
검후 소소와 음괴 유설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자세를 잡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틈이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어느 순간 유설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옳지! 우리 설이 잘한다!’
유진산은 마음속으로 손녀를 응원했다.
허공을 밟고 나아가는 유설의 모습이 목창과 하나가 된 듯했다.
기다리고 있던 검후가 반보를 물러서며 목검으로 여유롭게 쳐내었다.
곧이어 두 자루의 대련용 무기가 맞물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진산의 예상과 달리 대련은 조금도 격렬하지 않았다.
강기(剛氣)는커녕 초식조차도 펼치지 않았다.
단지 검결과 창결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경의 대련이란 말인가?
화려함은 없었지만, 유진산은 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수만 가지 변화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동작에도 우주 만물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 듯했다.
탁-! 타탁-! 타타탁-!!
목창과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둘의 움직임은 마치 한 쌍의 나비가 뒤엉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지켜보던 유진산은 손에 땀을 쥐었다.
‘우리 설이 이겨라!’
누가 이기고 지고 있는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뭐든 손녀가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바람결과 함께 살랑거리는 둘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를 무렵.
목검과 목창이 동시에 부러져 버렸다.
부엌의 문틈으로 지켜보던 유진산은 재빨리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승부인가?’
대련의 결과는 당사자들만이 알 터. 승패를 떠나 모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시에 자신도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