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2화 (202/238)

202화 형이 도와줄게 (3)

유진산은 우여곡절 끝에 정혜를 설득할 수 있었다.

역근경의 구결을 전달받은 그는 인적이 없는 패도문의 뒷산으로 이동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문제가 없는지 시험을 해볼 작정이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다시 돌아가서 물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연습 삼아서 한번 시도해본 수련은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기만 하면 주화입마에라도 빠질 것처럼 기혈이 뒤틀렸다.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거 큰일이구나. 집에 밥도 안 해놓고 나왔거늘.’

집에 먹을 것도 없을 텐데, 혼자 있을 손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산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자신의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세상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무적의 손녀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가부좌를 틀고 기공 수련을 이어가길 이틀째였다.

‘설마 땡중이 나한테 사기를 친 것인가?’

정혜가 역근경의 구결을 이상하게 알려주었다면 말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성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니라면 심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심법은 곧 내공을 쌓는 수련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슨 무공이든 궁합이 잘 맞는 심법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내공은 소림의 심법으로 쌓은 것이 아니기에 부작용이 있는 것이리라.

기초가 탄탄한 유가심법이라면 문제가 없을 줄 알았거늘.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겠구나.’

들끓는 기운을 역근경의 기운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기혈을 안정시켜주는 것은 물론, 부정한 기운에 대항할 수 있는 절세의 무공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수련을 계속 진행하여 역근경의 성취도를 높여야 했다.

우우우우웅-!

가부좌를 튼 그의 주변으로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유설이 익힌 불문사자신공의 성질과도 유사했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달랐다.

구결에 따르면 역근경은 부처를 자신의 몸 안에 담아 힘을 빌리는 것이다.

하지만 불문사자신공은 자신이 곧 부처가 되는 더 높은 차원의 무공이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서둘러야겠구나.“

유진산은 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손녀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

유진산은 모든 정신을 오직 역근경의 수련에만 몰두했다.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와 달이 수차례 더 바뀌고 나서야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주위를 감싼 황금빛 기운이 몸속으로 흡수되듯 증발해 버렸다.

천천히 눈을 뜨는 유진산의 안광에는 깨끗한 호수처럼 맑은 정기가 빛나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한숨이었다.

드디어 역근경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성취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무한한 잠재력을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다. 가히 달마조사가 남긴 소림 최고의 무학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이며 왼쪽 손목의 염주로 향했다.

‘혹시 역근경이라면 이 왼손에 봉인된 놈을 통제할 수 있지는 않을까?’

부처의 기운으로 악마의 기운을 누른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듯했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일 것 같았다.

‘화후가 더 높아진 후에 시도해보는 게 좋겠지.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겠구나.’

손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유진산의 발이 지면을 박차고 허공답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허공을 질주하던 그는 나무의 머리를 한 번씩 밟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가벼운 몸놀림과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머물렀던 때와 비교하면 몇 배는 강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가, 기다려라. 할배 곧 간다.’

집에 도착한 유진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얘가 어딜 간 거지? 가출했을 리도 없고.’

어디에도 유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오래 비울 손녀가 아니었다.

분명 어딘가에는 흔적을 남겼을 터.

집안 곳곳을 살펴보던 그는 정자 위에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이게 무슨 보따리들이지?”

몇 개는 술이나 간식이 들어 있었고, 심지어는 사치품들까지 보였다.

이런 게 다 어디서 났단 말인가. 직접 사 왔을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집에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그때 유진산은 보따리 밑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종이를 펼치자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손녀가 남긴 자필 서신이었다.

내용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할배, 나 어디 좀 다녀올게. 걱정하지 말고, 이거 먹고 있어.】

자기가 갈 곳이 어디가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산은 털썩 주저앉아 남겨진 음식들을 살펴보았다.

대다수는 오래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신선도로 보았을 때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이 분명했다.

“에휴. 자리를 비운 내 잘못이지. 무사히만 돌아오너라.”

손녀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제때 돌아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어디를 갔던지 머지않아 돌아오리라는 판단이었다.

유진산은 멍한 얼굴로 육포를 하나 집어 씹어댔다.

며칠이나 굶었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그렇게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눈치챌 수 없을 거리였다.

잠시 후 장원의 입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계십니까!? 설아!”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가 혼잣말로 입맛을 다셨다.

“휴. 아직도 안 돌아오셨나.”

중얼거림으로 보아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

그 시점에서 유진산은 이미 그의 등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르신!? 언제 다가오셨습니까?”

반들반들한 대머리와 낯익은 사파의 복장.

이곳의 집을 매매할 때 도움을 준 패도문의 문도 임전세였다.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방금. 근데 우리 설이 못 봤어? 패도문으로 간 줄 알았는데.”

“어르신이랑 같이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저희도 닷새 동안이나 두 분을 찾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유설이 사라진 곳은 패도문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자신이 역근경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최소한 닷새는 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답답했지만 지금은 패도문의 상황부터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헌데 무슨 용건으로 왔어?”

“지금 호현 전체가 비상경계태세잖아요. 어르신과 상의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호현이 시끄럽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유진산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아지경 속에서 닷새 이상을 역근경만 익히다가 돌아왔으니까.

어쨌거나 백규가 직접 오지 않고 부하를 보냈다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경계태세라니?”

“소식 못 들으셨어요? 지금 난리가 아닙니다. 며칠 사이에 무림맹의 섬서분타가 박살 나고, 비밀지부도 두 개나 털렸대요.”

유진산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섬서분타라니? 섬서분타면 지난번 사도련에서도 공격에 실패한 곳이잖은가?”

사도련주는 물론 흑묘파의 문주와 백규까지도 동원된 총공세였다.

하지만 당시 창룡대의 등장으로 후퇴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약조대로 그들이 무림맹을 돕지 않았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이번에는 사도련이 아닌, 사파의 협객들이 나서서 성공했어요!”

좋게 말해서 협객이지, 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사파의 고수들이리라.

허나 그들 중 그런 능력을 지닌 절대고수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성과로군. 헌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자들이?”

“혹시 극살오의라고 들어보셨어요? 그들이 자신들의 짓이라고 밝혔어요.”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진산이 두 눈을 부릅떴다.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장에서 손녀를 향해 인사를 하던 녀석들이었다.

‘……설마?’

다섯 명 모두가 절정의 무위를 넘어선 고수들이었지만, 그들만으로 무림맹의 분타를 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분명히 조력자가 있을 터.

“극살오의는 누군지는 나도 알고 있네. 허나 그 녀석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또 누가 있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괴인이 그들을 도왔다고 해요. 목격자가 있는데, 작은 체구에 엄청난 고수였다고 합니다.”

유진산이 한 손을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높은 위치로 쓱 올려 보였다.

“혹시 키는 이만하고?”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일까? 임전세가 움찔하며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진산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괴인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장에서 이상한 놈들하고 어울릴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어서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랄 수밖에.

“음괴다.”

임전세는 몹시 놀랐는지 자라처럼 목을 빼고 물었다.

“예에? 괴인의 정체가 우리 조카라는 말씀입니까?”

“확실해. 며칠 전에 극살오의 녀석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봤으니까.”

“하하하! 그것참. 이제 설이는 우리의 영웅이 될 겁니다.”

“웃을 일이 아니야. 혹시 사고라도 친 건 없었지?”

“사고라니요? 무림맹의 불행은 저희의 행복이잖아요. 호현의 모두가 응원하고 있어요.”

무림에서 손녀의 영향력이 점점 막강해지고 있었다.

오로지 무공과 명성으로 배분을 따지는 사파무림이 아니던가. 이제 음괴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사도련주의 아래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이렇게 변해 가는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천천히 생각해 볼 문제였다.

“상황은 잘 알겠다. 무림맹 놈들이 보복해올지 모르니,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로군.”

“예, 그것도 있지만. 사실은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우리 설이랑 관련된 거만 아니라고 얘기해주게.”

임전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혹시 혈사객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자네 문주한테 직접 들었네. 천축에서 넘어와서 각지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는 녀석.”

“예, 맞습니다. 사실 그자가 지금 호현에 와있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호현이 초토화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확실한가?”

“예. 저희 문주님한테 도전장을 보냈어요.”

유진산의 판단으로는 백규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필이면 손녀가 자리를 비운 이때 오다니.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파계승 정혜뿐이었지만,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날짜는?”

“바로 내일입니다. 어떡해요?”

임전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 또한 자신의 문주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도전이야 거부하면 그만이지.”

“만약 강제로 싸우려 들면요?”

“그럼 더 좋은 일 아닌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결과 싸움은 엄연히 달라. 호랑이굴에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지.”

그 말은 곧 정당한 승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유진산의 자신감에 임전세는 안도하며 말했다.

“그럼 어르신의 묘책만 믿겠습니다.”

“그래. 걱정할 것 없으니, 일단 패도문으로 가자꾸나.”

유진산은 출발하기 전에 손녀에게 서신을 남겨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혈사객이 오기까지의 남은 기일은 하루.

손님맞이 준비로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