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등선하는 기분 (3)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전신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마치 신선이 되어 구름 위를 노니는 것 같구나.’
유진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엎드린 자신의 뒷면을 손녀가 주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진 어깨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이토록 빠르게 전신을 안마해 준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뭔가 달랐다.
손녀의 손길이 오가는 위치마다 따듯한 진기가 혈도를 순회하며, 몸 안의 혼탁한 기운이 사라져갔다.
“아아!”
“할배, 왜 그래? 아파?”
시원함이 극에 달하여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신음이었다.
유진산은 다급히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시원하니 계속하거라.”
이런 식의 안마는 기력을 무척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제 그만하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있는 정신이 없었다.
“어때? 우주가 보여?”
“뭔가 보일 듯 말 듯은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유설은 계속 손을 움직이면서도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할애비는 화경과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화경(化境)의 차원을 넘어 성스러운 경지라 불리는 현경(炫境)에 오른 손녀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니? 유진산은 일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괴감을 느끼며 포기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손녀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뭐, 뭘 하려고?”
밑에서 유설이 양손을 슬쩍 휘자, 그의 몸이 앞면으로 뒤집혔다.
이어서 다시 바닥으로 부드럽게 낙하했다.
유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팔부터 안마를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유진산은 극도의 시원함을 느끼는 한편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손녀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힌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설이 땀을 흘린 것은 처음으로 보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엄청난 공력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 아가…….”
“안돼, 할배.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지금까지의 노력을 허투루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나긋함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유설의 양손이 고양이의 발톱처럼 세워졌다.
곧이어 머리끝부터 시작하여 전신의 기혈을 엄청난 속도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투툭-! 투투투투툭-!!
추궁과혈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달랐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진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마치 영혼이 심연의 어딘가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때 유설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제 준비됐지?”
“뭐, 뭐가?”
“우주로 날아갈 준비 말이야.”
세상에 안마를 받으면서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림의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단지 손녀가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마지막 기회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오, 오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녀의 손바닥이 아랫배에 ‘툭’ 올려졌다.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신음을 뿜어냈다.
단전으로 어마어마한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부처님의 가호처럼 따듯한 불가의 기운이었다.
유진산의 두 눈이 천천히 손녀의 얼굴로 향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두광(頭光)이 머리를 감싼 걸 보니, 불문사자신공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리라.
아니, 정확히는 기운을 넣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단전을 안마하는 게 가능하다고?’
틀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단전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쾌감까지.
이게 바로 황홀경이란 말인가? 유진산의 동공이 점차 초점을 잃어갔다.
곧이어 그의 고개가 푹 떨궈지고야 말았다. 기어코 정신을 잃은 것이다.
밝은 태양을 가릴 정도로 뭉게구름이 가득한 맑은 하늘 아래.
광활한 바다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파도 위를 한 노인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허허허! 허허허허!”
노인은 뭐가 좋은지 한없이 웃으며 걸었다.
어깨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것일까?
노인의 행동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허허허허!”
마치 영겁의 시공간에 갇힌 듯, 노인의 행동은 기계적으로 반복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공허(空虛). 지금 노인의 눈빛이 그러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되는 행위 속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노인이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린 것이다.
‘내가 왜 걷고 있는 거지?’
처음으로 생긴 의문이었다.
동시에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리고 작은 의문은 계속해서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왜 걸어야만 하는 것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계속 반복하던 행위일 뿐. 노인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의문을 던져갔다.
‘근데 나는 누구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백치가 되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다.
해수면을 걷던 노인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는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바람결에 몸을 맡겼다.
‘무엇이 나이고, 내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우주(宇宙). 노인의 의문은 우주를 그리고 있었다. 광활한 시공간 속의 티끌과도 같은 존재를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다른 것들 또한 있겠지. 내가 육신의 주인이고, 마음의 주인이다.’
노인의 의문은 계속해서 더해만 갔다.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면, 나의 의지대로 우주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그것은 내가 곧 우주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점차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자신은 하늘 높이 ‘붕’ 떠오르며 비상하고 있었다.
파아앙-!!!
허공을 뚫고 광속으로 질주하는 그는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
곧이어 낙하하던 그의 신형이 한줄기 빛살처럼 파도 위를 가르기 시작했다.
쏴아아앙-!!!
그가 지나는 자리로 물줄기가 십여 장이나 솟구쳐 올랐다.
‘우주가 지배하는 모든 공허는 곧 나의 공간이다. 고로 나의 의지는 이 공허를 지배할 수 있다.’
돌연 노인의 안광에서 눈부신 광채가 빛났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찬란한 휘광이 뿜어져 나오며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노인의 입이 나직이 달싹였다.
“나는 유진산이다.”
“할배! 할배, 정신이 들어?”
손녀의 목소리를 듣게 된 유진산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가. 할애비가 잠시 이상한 꿈을 꾸었구나.”
어찌 된 일인지 유설이 눈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잠시라니? 벌써 닷새나 지났어.”
“뭐라고?”
잠시 짧은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거늘 벌써 닷새나 지났다니?
유진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기억은 암자 위였으나, 지금은 침상 위에 있었다. 유설이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좀 어때? 달라진 게 느껴져?”
이제야 유진산은 자신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을 인지했다.
이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진 신체의 감각을 가장 먼저 눈치챌 수 있었다.
끊이지 않고 용솟음치는 단전의 기운. 그리고 하늘도 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신체까지.
게다가 전신의 곳곳에서는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응축된 힘이 느껴지고 있다.
“이, 이럴 수가…….”
유진산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존보다 더욱 먼 곳까지 볼 수가 있었고, 들리지 않던 소리까지 들렸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심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광까지.
“할배도 이제 화경이야.”
유설의 한마디에 지금의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화경이라니? 그토록 꿈에서도 그리던 소망이었다.
지금까지 가문에서 화경을 넘어선 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창귀라는 별호로 유명했던 조상 유정풍과 눈앞의 손녀뿐.
그리고 이제 자신도 그러한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감격에 벅차 눈물을 글썽거렸다.
“끄흑…….”
기어코 이러한 날이 오다니.
무인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울지 마, 할배.”
유설이 엄지로 할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안아서 등을 토닥거렸다.
“고생했다, 아가. 모두 네 덕분이다.”
“할배가 한 거지 뭐. 나는 그냥 조금만 도와준 거야.”
비록 손녀가 기회를 만들어주었지만, 무의식중에 깨달음을 얻은 것은 유진산 본인이었다.
그는 잠시 유설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적지 않은 공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리라.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어서 운기조식부터 하거라.”
“아니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어허. 어서 할애비 말 듣거라.”
할아버지가 진지하게 얘기하고 나서야 유설이 가부좌를 틀었다.
유진산은 묵묵히 손녀의 운기조식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
창백했던 얼굴이 빠른 속도로 혈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회복되고 있는 것이리라.
“할배, 지금 느낌이 어때?”
일반적인 무림인들은 운기 중에는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유설은 그러한 법칙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있었다.
“아주 기쁘지. 좋아서 죽겠구나.”
“얼마만큼 좋아?”
손녀의 마음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자꾸 물어보는 이유는 생색을 내는 것이리라. 평소라면 귀찮을 만도 했지만, 오늘은 그러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무리 반복해도 예쁘기만 했다.
“날아갈 것처럼 좋지.”
“히히. 그럼 나 운기 끝나면 우리 같이 놀러 갈래?”
오늘 같은 날에 못 해줄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유진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좋지. 어딜 가고 싶은데?”
“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고, 맛있는 간식도 사 먹자.”
최근엔 손녀와 함께 호현의 시장에 가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다.
사파의 무림인들이 부쩍 많아졌기에 함께 다니면 이목을 끌 터. 피곤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오냐. 오늘 우리 설이가 힘을 많이 썼는데, 좋은 것 좀 먹으면서 몸보신하자꾸나.”
“정말이지? 히히힛.”
이미 유설의 입가는 귀에 걸려 있었다.
운기 중에 말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유진산도 익숙해졌기에 자연스러웠다.
“응. 그리고 또 뭘 하고 싶어?”
“이제 없어. 근데 내일 나랑 대련해줄 거지?”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당당히 요구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손녀는 그래도 될 만한 자격이 있었다. 본인도 그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럼! 시장 다녀와서 바로 해줄게.”
어차피 유진산도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다시 시험해보고 싶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고 있던 유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출발하자.”
“벌써 운기조식이 끝난 거야?”
“응. 이제 다 괜찮아.”
그야말로 놀라운 회복속도였다.
유진산은 혀를 내두르며 손녀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순간 그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신체의 무게에 또 한 번 놀랐다.
어쩌면 경공의 최상위라 불리는 허공답보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할까?’
모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번 시험해보면 알게 될 터.
크게 호흡을 한 번 들이켠 그는 시장이 있는 방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할애비 먼저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