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등선하는 기분 (1)
이토록 사람 형상과 일치하는 뿌리는 일평생 들어본 적도 없었다.
과연 신비로운 효능을 지닌 영약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터.
유진산은 일단 정체불명의 뿌리를 손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자, 어서 먹어 보거라.”
설사 영약이 아닌 독 뿌리라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만독불침(萬毒不侵)을 넘어서 세상의 모든 해로운 것으로부터 내성을 지닌 현경의 신체였으니까.
유설이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유설은 뿌리를 한 입에 절반이나 베어 물었다.
입에서 ‘오도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손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마치 급체한 사람처럼 심각해 보였다.
지켜보던 유진산이 재빨리 물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유설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이야.”
역시나 맛은 별로인 모양이었다.
이대로 뱉는다면 영약의 효과를 알 수가 없을 터.
유진산이 다급히 손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원래 몸에 좋은 것일수록 입에도 쓴 법이다. 참고 먹어봐.”
“……정말 못 먹겠어.”
“삼켜야 해. 첫 번째로 수확한 작물을 버리면, 한 해 농사가 부정을 타는 게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어쩌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유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유진산은 손녀가 꿀꺽 삼킨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몸이 좀 좋아진 게 느껴지느냐?”
“응. 단전에 새로운 내기(內氣)가 응축되고 있어.”
유진산은 환한 얼굴로 양손을 부딪쳤다.
기대했던 대로 내공 증진의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효과는 어때? 기운이 어느 정도나 생겼어?”
“할배가 한번 먹어봐.”
순순히 대답을 안 해주다니. 삐지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도 한 번은 먹어봐야 할 터.
유진산은 들고 있던 뿌리의 절반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후 마치 당근을 먹듯이 몇 번 씹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헙!?”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약한 향에 헛구역질부터 밀려왔다.
그냥 쓴 정도가 아니었다. 극한의 정신력과 인내심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일반인들보다 미각이 발달한 무림인이었기에 고통이 엄청났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삼킨단 말인가.
이내 먹는 것을 포기할 찰나였다.
유설이 코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낭패가…….’
도대체 유설은 이걸 어떻게 삼켰단 말인가. 무엇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편법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왜 먹겠다고 했는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지만, 방도가 없었다.
유진산은 숨을 참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꿀꺽-!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은 겨우 성공했다.
그러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뱃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고 있었다.
“우억!”
헛구역질과 함께 삼킨 것이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올 찰나.
그는 손녀의 오른손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인후 아래가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음식이 역류하지 못하도록 유설이 자신의 혈도를 누른 것이리라.
“첫 번째로 수확한 작물은 뱉으면 안 된다며. 내가 도와줄게, 할배.”
말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어느새 자신의 복부에 유설의 손이 얹어져 있었다.
‘……왜!?’
묻고 싶었으나 입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손녀가 무엇을 한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목구멍 속에서 역한 향이 올라왔으니까.
내공을 이용해 뱃속의 뿌리를 강제로 녹인 것이리라.
유진산은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할배, 왜 울어?”
시치미를 뚝 떼고 물어보는 모습이 괘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고, 서럽구나. 말년에 손녀에게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다니…….”
지켜보던 유설이 할아버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래도 미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울지 마, 할배. 괜찮아. 뚝!”
사실 눈물을 흘린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는 신체의 반사작용이었다.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유진산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할애비의 일평생 이렇게 고약한 맛은 처음이구나. 너는 어떻게 먹었어?”
“나? 그냥 먹었지 뭐.”
“거짓말하지 말거라. 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순간 손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내공으로 녹이고, 증발시켜서 피부로 내보냈어. 히히.”
증기를 전신의 모공으로 배출했다는 뜻이리라.
자신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만약 가능했다면 토악질을 해가며 트림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럼 아까 단전에서 기운이 느껴진다는 건 뭐였어?”
그 순간 유설이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응?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유진산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질 않고 할아버지를 속이다니.
날이 갈수록 진보하는 손녀의 연기 실력에 기가 막힐 정도였다.
“이 녀석이 감히 할애비를 속여? 오늘 대련은 취소다.”
오늘은 손녀와 대련을 하면서 놀아주기로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또다시 골탕을 먹이지 못하도록 교육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앗! 그건 안 돼!”
유설이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서 이거 놓거라.”
팔을 뿌리친 유진산은 가부좌를 틀었다. 단전이 뜨거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녀 때문에 운기조식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잘못했어~”
“어허? 어서 비키거라. 운기조식해야 하니까.”
“그럼 나랑 대련해줄 거야?”
울상을 지은 유설이 자신의 양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서 운기조식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알았으니까 먼저 연무장에 가 있거라.”
그 순간 유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동시에 할아버지의 팔을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알았어. 운기조식 끝나면 빨리 와~”
그렇지 않아도 손녀를 통해 악마신공의 위력을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기분이 좀 풀린 유진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냐. 대신 오늘은 각오하거라. 예전의 할애비가 아니니까.”
“히히히.”
유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덩실덩실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무척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때 유진산의 동공이 잠시 확장되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손녀의 뒷모습에서 순간적으로 막내아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에휴. 저 고집을 누가 당할꼬.’
그래도 차마 손녀의 성격은 탓할 수가 없었다.
단지 뺀질뺀질하고 고집이 셌던 아비를 똑 빼닮았을 뿐이었으니까.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우선 내공의 변화부터 확인해봐야겠지. 가만있어 보자.’
그는 단전으로 새롭게 모여드는 영약의 기운을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내공 증진의 효과는 있었지만,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아직 뿌리가 완전히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도, 효과는 아주 미미했다.
‘일 갑자의 효능을 보려면, 최소한 이십 뿌리는 넘게 먹어야겠는데?’
밭에 뿌려놓은 씨앗이 수백 개나 되었으니 양은 충분했다.
문제는 반 뿌리만 먹는데도 삶과 죽음을 오가야 했다는 것이다. 인내심이 강한 유설도 포기하고 배출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충분히 익으면 맛이 괜찮아질까? 아마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섭취할 수가 없을 터.
‘탕을 끓여볼까? 아니면 조림을 해서 먹어?’
이런저런 방법을 고민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급할 것은 없으니 시간을 가지고 고민을 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유진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전각의 모퉁이를 돌자, 연무장의 중심에서 손녀가 우두커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다가갔다.
“오냐. 오늘은 맨손으로 해보자꾸나.”
그래야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듯했다. 창술로는 잠시도 버티지 못할 터였으니까.
“할배는 창을 써도 돼.”
“아니다. 대련은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법이지.”
말이 대련이지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였다.
만약 유설이 봐주지 않는다면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나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본인이 더 오래 놀고 싶어 할 테니까.
얼굴을 맞댄 둘은 양손을 모으고는 서로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의식이었다.
그때 유진산이 왼쪽 손목을 슬쩍 튕겼다.
찰그락-!
그의 왼손에 차고 있던 염주가 오른손으로 이동했다.
짓누르고 있던 왼손의 힘을 개방한 것이다.
이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반 각. 그 이상은 정신이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속전속결이다.’
포권이 끝나자마자 유진산이 선공을 개시했다.
그의 왼손이 갈퀴처럼 휘며 유설의 어깨를 낚아채려 했다.
벼락처럼 빠른 속도였지만, 손아귀는 애꿎은 허공만을 갈랐다.
어깨를 비튼 유설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할아버지의 속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산의 공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어찌나 빠른지 그의 왼손이 수십여 개로 늘어난 듯했다.
대단한 공세였지만, 그것을 전부 피해내는 유설의 움직임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파파팟-! 파파파팟-!!
전면을 난자하는 손아귀가 검은 기류를 뿜어내며 허공을 검게 물들였다.
그 순간 회피만 하던 유설의 신형이 갑자기 쭉쭉 늘어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린 유설이 놀람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할배, 방금 그거 뭐야?”
처음 보는 무공이었으니 궁금할 수밖에.
허나 여유롭게 대답할 틈이 없었다.
유진산은 손녀를 따라잡기 위해 똑같이 보법을 밟았지만,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도망치지 말고, 어서 이리 오너라!”
기다렸다는 듯이 유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거리를 벌리던 유설이 다시 보법의 경로를 바꾸어 유진산과 충돌했다.
드디어 처음 일 합을 교환한 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무려 삼 장을 밀려난 유진산과는 달리, 유설은 약 일 장을 미끄러진 것에 그쳤다.
명백한 유설의 우세였다.
그런데도 지금 유진산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철옹성 같은 손녀가 난생처음으로 뒤로 물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오~ 할배, 멋있어!”
강해진 것은 할아버지였지만, 오히려 자신이 더욱 신이 난 모습이었다.
급기야 자세를 낮추고는 양손을 슬며시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자신을 상대로 기수식을 취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대련 중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이제야 진지하게 할 마음이 들었느냐? 그럼 오늘 할애비한테 혼 좀 나보자!”
자신감이 충만해진 유진산은 전력을 다해 돌진했다.
곧이어 그의 왼손과 손녀의 오른손이 중간에서 맞물렸다.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거센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앙-! 콰콰콰쾅-!!
정신없이 맞물리는 두 개의 손은 서로 한 치의 밀림도 없었다.
문제는 아직 유설도 한 손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봐주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고무적인 성과가 아닐 수가 없었다.
비록 한 손뿐이었지만, 고작 초절정의 경지로 현경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다니. 그야말로 기적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유진산이 자신 있게 소리쳤다.
“장난치지 말고, 전력을 다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