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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93화 (193/238)

193화 횡재로구나 (1)

일을 마무리한 유진산은 손녀에게 국수부터 삶아 주었다.

그러고는 만호와 따로 마주 앉아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헌데 그 씨앗은 무엇인가. 범상치 않아 보이던데.”

제단에서 찾은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이었다.

그것은 지금 유설이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오랜 세월 의식을 통해서 만들어낸 씨앗은 특별한 힘을 지니거든요.”

“우리 손녀가 텃밭에 심어 보겠다는데, 문제는 없겠는가?”

만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했다.

“씨앗은 창조를 의미합니다. 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존재들은 멀리하는 물건이지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럼 그냥 놔둬도 상관없겠군.”

“예. 아마도 제 짐작대로라면…… 영약이 자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약(靈藥)이 무엇인가. 내공을 증진해 주는 등 영묘한 효험이 있는 신령스러운 약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아주 진귀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영약의 씨앗이라니? 정말 그 말이 사실인가?”

“확실한 건 심어 봐야 알 듯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이지 못한 방식에는 대가도 따르는 법입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효과가 미미할지도…….”

만호의 마지막 말은 유진산의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횡재한 기분이었다. 미소가 절로 지어질 정도로.

“뭐 효과가 크지 않으면 어떠한가. 대량으로 수확할 수만 있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있겠지.”

만호도 동의한다는 듯 작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그나저나 손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유진산은 자신의 왼손을 탁상 위로 보여주며 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 기운을 조금씩 통제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셔야 합니다.”

“노력이라니? 어떻게 말인가.”

“어렵지 않습니다.”

만호가 양손으로 그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

그러더니 손목의 염주를 확 빼내는 것이 아닌가.

함부로 빼면 안 된다고 했거늘.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자네 지금 뭘 하는 겐가?”

손에서 검은 기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기운에 내심 불안했지만, 만호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유진산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기다렸다.

한 호흡이 더 지난 후에서야 만호가 다시 염주를 채워 주었다.

“어떠셨습니까?”

“염주를 빼니 주체 못 할 힘이 느껴지더군. 동시에 모든 걸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

“놈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 힘에 지배당하지 말고, 어르신이 통제하셔야 합니다.”

“음. 그럼 내가 이 악마 놈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예. 다만 염주를 너무 오래 빼고 있으면 안 됩니다. 조금씩 시간을 늘리며 노력해 보십시오.”

유진산은 자신의 왼손을 주물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날의 칼이로군. 그래도 잘만 활용한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무공에 응용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다시 없을 악마의 신공이 될 터였다.

자주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잠시나마 도움이 될 듯했다.

“예, 어르신. 그럼 지금부터는 집터를 정리할까 합니다.”

“무엇을 정리한단 말인가?”

“아직도 집 안에 잡귀들이 득실득실합니다. 모두 천도시켜야지요.”

“나한테 해코지했던, 백영교의 교도들이로군.”

“예. 교주의 영혼이 소멸한 후 영가들의 힘이 약해졌으니, 퇴마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만호의 꼼꼼한 배려에 유진산도 따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고맙네. 이거 자네한테 신세를 많이 지는구만.”

“별말씀을요. 의식이 끝나면 더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장원 곳곳에 가득했던 음기는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일출이 시작되고 있음에도, 벌써 포근한 양기가 가득할 정도였다.

드디어 최악의 흉가에서 안락한 거처로 탈바꿈이 된 것이다.

조손과 만호는 장원의 입구에서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우리가 바래다주겠네. 어찌 자네를 혼자 보내겠는가.”

먼 곳에서 손녀에게 납치당하다시피 끌려온 만호였다.

오는 데에는 두 시진이었지만, 그가 혼자 돌아가려면 빨라도 사흘 이상이 소요될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양손을 손사래 치며 거절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섬서에 오게 된 김에 명산을 돌며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유진산은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급하게 끌려왔으니 전낭이 가벼울 터.

그는 만호에게 은자 두 냥을 강제로 쥐여주었다.

“수행길이 배고프면 안 되겠지. 그럼 여비라도 받으시게.”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 그래도 어르신의 성의이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만호가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유설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댔다.

“만호 아저씨, 다음에 또 놀러 와요~”

“그래! 또 보자, 설아.”

조손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시선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저 녀석에게도 가족이 남아 있었다면 참 좋았으려만.’

그의 유일한 아들이 안타까운 일을 당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가슴 속에 아픔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겨내고 수행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할배, 지금 무슨 생각해?”

굳이 사실대로 말해서 손녀까지 우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오늘 텃밭에 뭘 심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먹을 가지랑 호박 심어 준다며. 나는 보물 씨앗을 심을 거야.”

정말이지 기억력 하나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음, 그랬지. 어서 옷 갈아입고 밭으로 나가보자.”

모든 게 정상화가 된 이상 할 일이 많아졌다.

오전에 파종 작업을 마치고, 오후부터는 수련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조손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바지를 허벅지까지 올린 채 텃밭으로 나왔다.

불과 하루 만에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따듯한 아침 햇살의 느낌이 유난히도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대충대충 심으면 안 돼.”

손녀를 지켜보던 유진산이 보다못해 잔소리를 해댔다.

파종을 처음 해 보기 때문일까? 예상외로 손녀가 씨앗을 심는 모습이 좀 어설펐다.

“아니야. 마음을 담아서 심은 거야.”

역시나 고집은 제 아비를 닮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할애비가 하는 걸 잘 보거라. 적당한 간격과 깊이로 하나씩 심어야 무럭무럭 자라는 게다.”

“나는 두 개씩 심을 거야. 외롭게 크지 않게.”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어떻게 심건 농부 마음이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알았어. 분명히 더 맛있게 자랄 거야.”

밭의 구조는 절반으로 나누었다.

한쪽은 채소와 과일들을 심었으며, 나머지는 지하에서 꺼내온 정체불명의 씨앗을 심었다.

만호의 말대로 영약이라도 나온다면 그야말로 횡재일 터. 무엇이 자랄지 내심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한창 파종작업을 이어가던 중 그가 고개를 들고 손녀를 쓱 바라봤다.

“아가, 적적한데 노래나 한번 해 보거라.”

노래라는 말에 유설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피어올랐다.

“히히. 내 노래? 듣고 싶어?”

“오냐. 전에 들어보니, 제법 흥이 나더구나.”

유설은 노래를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타고난 감각이 꽤 괜찮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하던 유설이 곧 노래를 시작했다.

“랄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야채~ 둘이 심어요~ 할배는 한 개, 나는 두 개! 말 잘 듣는 설이~ 잔소리꾼 할배! 랄라~ 라랄라~”

유설의 노래는 무척 빠른 박자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닥거리는 모습이 본인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유진산은 한참을 웃었다.

“최고였다. 우리 설이는 무공만큼 노래에도 참 소질이 있구나.”

지금껏 어디에서도 이러한 음률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사가 좀 거슬리긴 했지만, 실력만큼은 일품이었다.

할아버지의 극찬에 유설의 기분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히히히. 가르쳐 줄까?”

“아니다. 할애비는 그런 거 못 해.”

그때 벌떡 일어선 유설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한번 따라 해 봐.”

유진산은 갑자기 무서워졌다. 손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쉽게 뜻을 꺾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강제로라도 시킬 태세인 듯했다.

“아아, 못 한다니까?”

유진산이 울상을 짓고 있을 때였다.

돌연 코앞에서 유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할배, 손님 왔어.”

난데없이 손님이라니.

짐작되는 인물은 없었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누가 왔어? 어디 한번 보러 가자꾸나.”

유진산은 손을 털며 손녀와 함께 장원의 입구로 나아갔다.

낯익은 인물이 묵직한 보따리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반사 시키는 대머리와 흉악한 인상.

패도문의 문주인 백규였다.

“설아, 삼촌이 간식 사 왔다!”

“백규 삼촌~”

유설이 후다닥 달려가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곧이어 내용물을 살펴보던 입가가 해맑은 미소를 그렸다.

“시장에 들러서 이것저것 담았어.”

“히히. 역시 삼촌이 최고야~”

백규는 유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유진산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설이랑 같이 밭일하고 있었나 보오. 이거 아우가 방해한 거 아닌가 싶소.”

“아닐세. 정말 때맞춰 잘 왔네.”

유진산의 표정과 말투엔 진심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손녀에게 이상한 노래를 배워야 했을 테니.

그때 백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집에서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소?”

“이젠 전부 해결되어 다 괜찮아. 자세한 건 앉아서 얘기하지.”

유진산은 백규와 함께 거처 앞에 있는 정자로 이동했다.

근처엔 연못도 있어서 운치가 꽤 괜찮았다.

“조용히 살기엔 참 좋은 곳 같소. 옆에는 계곡도 있고, 산세의 경치도 일품이오.”

“뭐 따지고 보면 아우가 알선해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덕분에 저렴하게 잘 샀네.”

“애초에 여긴 줄 알았으면 뜯어말렸을 거요. 임전세 그 녀석에게 이곳이란 얘길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오.”

유진산이 옅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죽을 뻔했지. 하지만 이젠 다 해결되었으니, 괜찮아.”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해 주었다.

만호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고, 악마를 봉인했던 일까지.

그가 한참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삼촌~”

유설이 양손으로 판자 위에 무엇인가를 들고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과(茶菓)였다.

“아이고. 우리 조카가 이제 다 컸구나.”

“맛있게 먹어, 삼촌.”

다소곳이 과일과 차를 내려놓은 유설은 다시 쫄래쫄래 사라져갔다.

그리고 손녀의 뒷모습을 유진산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군. 설이가 이럴 리가 없는데?”

“하하. 아마도 조카가 용돈이 필요한가 보오.”

“음. 그럴 만도 하겠지. 집 사느라 돈을 다 썼으니.”

“그래도 예쁘지 않소? 설이를 볼 때마다 형님이 정말 부럽다오.”

유진산도 동의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바쁘신 아우가 예까진 어쩐 일인가. 집이나 구경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백규가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사실 조금 전 련주님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이오.”

사도련주 영영과 밀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앞서서 백규를 통해 그녀에게 부탁했던 것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에 관한 내용일 터.

바로 무림맹주인 화령사태에 대한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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