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자네만 믿겠네 (2)
침상에 주저앉은 유진산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손녀가 다가와서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만호 아저씨가 할배 위험하대서 내가 업고 왔어.”
“……휴. 도대체 이게 다 뭔지 모르겠구나. 근데 왜 같이 안 들어왔어?”
“나도 몰라. 못 들어오겠대.”
손님이 오면 맞이하는 것이 예의인 법. 우선 만나서 상황을 물어봐야 했다.
“일단 나가 보자꾸나.”
기진맥진해진 유진산은 정신이 없었지만,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갔다.
문 앞에서 도사복을 입은 중년인이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어르신. 좀 괜찮으신지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헌데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만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마당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도착하니, 내 목을 조르던 허연 손들이 모두 사라졌단 말일세.”
“저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잡귀들은 손녀분이 온 것을 알고 도망친 것입니다.”
물리적인 힘이 통하지 않는 존재들이 손녀에게 겁먹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뭐 때문에?”
만호는 유설의 등 뒤를 슬쩍 바라보며 답했다.
“정확히는 등 뒤에 서 계시는 관우 장군님 때문입니다. 이곳에선 절대 손녀분에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어르신이 위험합니다.”
“이것 참 미치겠군. 내 집에서도 편히 쉴 수가 없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만호가 품속에서 주섬주섬 부적 뭉치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집 안에 붙어 있던 이 부적들은 영적인 존재를 봉인할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집에 잡귀들이 봉인되어 있었고, 그걸 떼서 이 사단이 발생했다는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작 잡귀를 봉인하려고, 이 많은 부적을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집 안에 뭔가 엄청난 존재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들이었다.
그렇다고 만호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유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뻑이고 있었으며, 유진산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든 보상을 해 주겠네.”
만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보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이미 어르신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은혜는 무슨.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어르신 덕분에 제 아이를 천도시킬 수 있지 않았습니까?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음.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니 고맙구만. 그럼 자네만 믿겠네.”
만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온 작은 주머니를 몇 개 꺼내었다.
“우선은 제가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주변에 결계부터 펼쳐야겠습니다.”
“우리가 도와줄 터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게.”
그가 건네준 주머니에는 소금과 팥이 뒤섞여 있었다.
조손은 그를 도와 집 주변 곳곳에 그것을 조금씩 뿌려 두었다.
준비를 마친 셋은 다시 입구에 모여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만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정말 이렇게까지 음기가 강한 장소는 처음 봅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었길래…….”
“듣기로는 오래전에 백영교라는 놈들이 모여 의식을 했었다는군.”
유진산은 백규와 임전세에게 들었던 괴소문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내용을 듣게 된 만호는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강령술을 시도한 모양입니다.”
“나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군. 영적인 존재를 소환하는 뭐 그런 의식이 아니던가.”
“예. 하지만 일반적인 강령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잡귀 따위가 아닙니다. 지금 집 안에 뭔가 엄청난 것이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어째서 자신의 집 안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잡귀가 아니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악귀(惡鬼)이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후. 해치울 수 있겠는가?”
“저 같은 자들이라면 백 명이 모여도 어림도 없습니다. 하지만 손녀분이 도와주신다면 해볼 만할 겁니다.”
말을 마친 만호는 품속에서 작은 목검을 하나 꺼내었다.
검 날에 알 수 없는 문양이 빼곡하게 각인된 모습이 특이했기 때문일까? 유설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저씨, 그건 뭐예요?”
“벽조목(霹棗木)으로 만든 법검이란다. 이것으로 그 사악한 것의 위치를 찾을 것이다.”
벽조목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뜻하며, 엄청난 양기를 품고 있기에 귀신을 퇴치하는 데 쓰인다.
조손은 묵묵히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법검을 앞으로 뻗은 채 집안 곳곳을 뒤적거리길 일식경.
한참이 지나도 소득이 없자 유진산이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왜 계속 맴돌고만 있는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세.”
“집 안에 숨어 있는 건 확실한데, 도무지 위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참 난감한 문제로군.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유진산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였다.
“내가 한번 찾아볼게.”
조용히 뒤따라오던 유설이 돌연 벽면에 손바닥을 얹었다.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주변의 기(氣)를 탐지하는 듯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경지인 현경의 감각이라면 뭐라도 찾아낼 수 있을 터. 유진산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뭐 좀 느껴져?”
유설이 두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응. 바닥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
“우리 집에 지하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유설은 일 층의 구석으로 유진산과 만호를 안내했다.
“여기 밑에.”
유진산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서서히 기(氣)를 발출해보니 바닥 밑에 공간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잘했다, 아가. 아래에 어떤 빌어먹을 녀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혼내 줘야겠구나.”
바닥의 재질은 원목이었고, 입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확인해 보기 위해선 파손해야 할 터.
새로 매입한 집을 망가트리는 것이 좀 아쉽긴 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진산은 바닥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바닥에 구멍이 뻥 뚫리며 공간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어서 내려가 보자.”
“오냐, 할애비가 앞장서마.”
구멍을 좀 더 넓힌 후에 유진산이 선두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빛 한점 들지 않는 깊숙한 지하였다. 하지만 무림고수들에게 어둠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경지가 낮은 만호만 불편함을 좀 느꼈을 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약 삼 장의 깊이까지 내려갔을 때였다.
일행은 굳건히 닫힌 철문에 가로막히고야 말았다.
문 전체에 그려진 기괴한 문양. 그리고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부적들의 모습에 만호가 경고했다.
“이 정도로 강력한 봉인은 저도 처음 봅니다. 이 문을 열면 돌이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겁을 준다고 해서 물러설 조손이 아니었다.
무림에서도 앞뒤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음양쌍괴가 아니던가.
유진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으로 철문을 강타했다.
단박에 떨어져 나갈 줄 알았으나,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심부에 손바닥 자국만 움푹 남았을 뿐.
유진산은 포기하지 않고 유가건곤장을 연달아 펼쳤다.
콰앙-! 콰앙-!! 콰쾅-!!
아무리 때려도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일반적인 철이 아니었으며, 두께도 엄청난 듯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유설이 나직이 말했다.
“뒤로 나와 봐, 할배.”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유진산은 손바닥을 털며 손녀와 자리를 바꿨다.
“할배가 거의 다 해 놨으니, 살짝만 건드리면 될 게다.”
자리를 바꾼 유설은 주먹을 어깨 뒤로 끝까지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철문에 힘껏 때려 박았다.
찰나의 순간. 눈부신 섬광과 함께 엄청난 굉음이 뿜어져 나왔다.
꿈쩍도 하지 않던 철문이 단박에 떨어져 나갔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지하 전체에 진동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제 됐지?”
“조금 살살하지 그랬어. 이러다 집이 무너지면 어쩌려고.”
유진산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내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긴 통로밖에 보이질 않았기에 조금 더 들어가 봐야 했다.
그때 법검을 움켜쥔 만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리하시게. 퇴마는 우리 분야가 아니니, 자네가 하는 게 낫겠지.”
통로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꼬불꼬불한 길을 조금 전진하자 드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얼추 보아도 백여 평에 가까운 이곳은 지하광장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지하에 잘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놨군.”
주위를 둘러보자 제단처럼 보이는 단상이 보였고, 안쪽에는 석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값비싼 야명주도 몇 개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의식에 쓰였을 법한 기이한 물품들이 곳곳에 나뒹굴었다.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 기쁨이 가득한 유설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다!”
뜬금없이 뭘 찾았단 말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유설이 제단 앞에서 뭔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황금빛이 번뜩이는 작은 상자였다. 홍옥이 박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진귀한 물품이 들어 있는 듯했다.
“그런 거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 아가.”
하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손녀를 어찌 말리겠는가.
이미 유설은 상자를 열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야 이거.”
가까이서 살펴보니 품종을 알 수 없는 씨앗이 한 움큼 들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을 터인데, 신비롭게도 생기가 느껴졌다.
자신이 시장에서 사 왔던 씨앗이 하루 만에 썩었던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어째서 이딴 걸 이렇게 귀한 상자에 담아 두었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유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건…… 보물 씨앗이야. 심으면 뭐가 나올까?”
그걸 자신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씨앗의 정체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아봐야겠으니, 일단 챙겨 두거라. 우선 여기부터…….”
만호에게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그는 화들짝 놀랐다.
유설은 이미 몸이 정지한 상태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관 앞에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만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두 눈이 까뒤집어져 흰자만 보였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보게! 어서 정신 차리시게!”
유진산이 그의 팔을 흔들어 보았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돌연 만호의 입이 쩍 벌어지며 의미심장한 말을 토해냈다.
“여기서 당장 나가!!!”
그 순간 조손은 오싹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할, 할배……. 만호 아저씨 몸에…… 귀, 귀신 들어갔나 봐.”
백만 대군이 몰려와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을 유설이었지만, 귀신만큼은 무척 무서워했다.
그것은 무공과는 관계없이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부분이었다.
그리고 손녀에게 그런 유전적인 부분을 물려준 장본인이 바로 유진산이었다.
“세,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어, 어떡해…….”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만호를 이렇게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할 터.
유진산은 긴 세월을 살아오며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들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유진산은 만호가 움켜쥐고 있던 법검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할애비 생각에는 이걸로 관 안에 있는 것을 찔러야 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