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첫 번째 손님들 (2)
유진산은 심사숙고 끝에 장원을 매입했다.
가격이 괜찮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손녀가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생활하는 데에도 전혀 불편함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낮에는 양기가 가득하거늘, 어찌 밤에는 이리도 음기가 강하단 말인가.’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밤과 낮의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산과 계곡의 사이에 있어서 그런 것일까? 강한 습기에서는 음산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내일 아침에 시장에서 연등이나 좀 사 와서 달아놔야겠구만.’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다.
장원을 한 바퀴 둘러본 유진산은 다시 전각 안의 침소로 들어갔다.
그간 유랑생활을 할 때는 손녀와 함께 취침했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손녀의 침소를 이 층에 따로 만들어주었다.
지금쯤이면 자고 있을 터.
침상 위에 누운 유진산은 옆으로 누워서 이불을 어깨높이로 올렸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기를 잠시 후.
손녀의 목소리였다. 잘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음?”
위층에서 유설이 후다닥 내려와서는 뒤에서 할아버지의 등과 목을 꽉 끌어안았다.
“할배, 나 무서워~”
유진산은 손녀보다 체구가 작았기에 숨이 막힌다는 듯 콜록거렸다.
“크윽! 왜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봤어?”
“……아니. 그냥 너무 무서워.”
유진산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지난번 망공산(望空山)에서 인연이 있었던 무속인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귀신이 있다면 우리 설이를 보고 도망가겠지. 네 뒤에 관우 장군이 있다는데 뭐가 무섭느냐.”
“장군님이 날 지켜준대?”
“그래. 그때 그 점 봐주는 녀석이 그러지 않았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만호 아저씨?”
“오냐. 먼 옛날 촉나라의 유비 황제가 우리 가문의 조상님이시다. 그분의 의형제인 관우 장군이 형제의 의를 지키기 위해 너한테 왔다더구나.”
분명 만호라는 무속인이 그렇게 얘기했으나, 유진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손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꺼낸 말일 뿐이었다.
“그럼 할배는 누가 지켜줘?”
“괜찮아, 할애비는. 어서 올라가서 자거라.”
유진산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왼손을 등 뒤로 휘저었다.
하지만 유설은 안심이 되질 않는지 할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나 할배 옆에서 잘래.”
그야말로 웃길 노릇이었다.
명색이 절세무공을 익힌 무림고수이거늘,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유진산은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손녀의 숨소리가 조금 거친 것을 보니 잠이 오질 않는 모양이었다.
“집이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후회되면 말하거라. 다시 팔면 그뿐이니.”
“아니야. 여기서 계속 살 거야.”
낮에만 해도 좋다고 뛰어다니던 손녀였다.
밤에는 음산함이 좀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시일이 지나고 적응되면 괜찮아질 터.
“아가, 내일부터는 뒷마당에 텃밭을 좀 가꿔보자꾸나.”
“응, 좋아.”
유진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양주산의 버려진 암자에 머물렀을 시절. 노쇠한 몸을 이끌고, 아기였던 손녀와 함께 밭을 일궜던 기억이 새록새록 했다.
“그런데 개간 작업을 하려면 일손이 좀 필요할 텐데. 고민이구나.”
“내가 몇 명 데려올게.”
“누구를? 애먼 사람을 강제로 데려다가 일 시키면 안 돼.”
“걱정하지 마, 할배. 나는 나쁜 사람 아니야.”
그때 유진산은 며칠 전에 손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록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이지만 약자는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기에 따지듯이 물었다.
“전에 할애비는 나쁘다며? 그럼 설이 너만 착한 사람이더냐?”
유설은 부인하지 않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패도문에는 크고 작은 연무장이 다섯 개나 존재한다.
이곳 중 대부분은 이른 아침부터 붐비기 시작한다. 부지런한 자가 가장 좋은 장소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대에 나오는 자들은 정해져 있었다.
창룡대의 다음 기수로 키워지고 있던 아미산의 아이들이었다.
대부분이 열에서 열다섯 살 정도로 어린 나이였지만, 패도문의 기존 문도들보다 수련에 열정적이었다.
아무도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몸에 밴 습관 때문이리라.
“하압! 하압!”
“이얍!”
연무장의 곳곳에서 아이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리고 그중 한 곳을 뒷짐을 진 채 탐색하는 한 명의 아이가 있었다.
잠시 후 묵묵히 구경하던 유설이 그곳을 향해 소리쳤다.
“만두, 청풍이, 두유, 백구! 너희들 이리와 봐.”
유설은 모든 아이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청풍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이 이름을 지어줬으니깐 말이다.
지목당한 네 명이 수련을 멈추고 엉거주춤 다가왔다.
유설보다 나이가 한두 살씩 많았지만, 누구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파에서는 무공이 곧 서열이었으니까.
오히려 아이들의 표정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우, 우리 불렀어?”
유설은 뒷짐 진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고는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수련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알려줄게.”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깨달음을 지닌 절세고수가 직접 가르침을 주겠다니? 그것은 곧 기연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그래도 돼?”
“지, 지금?”
지금껏 유설은 대련장에서 자신들을 두들겨 패기만 했을 뿐, 알려준 적은 없었다.
뭔가 이상하면서도 불안할 수밖에.
유설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리지 않을 테니, 빨리 덤벼 봐.”
하나같이 일류 이상의 실력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개중에서도 청풍은 초절정의 초입에 도달한 수준이었다.
청풍이 가장 먼저 목검을 움켜쥐고 몸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목검이 곡선을 그리며 유설의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설은 방긋 웃으며 상체를 우측으로 슬쩍 비틀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목검이 유설의 가슴 앞을 스쳐 지나쳤다.
헛손질하게 된 청풍은 이를 질끈 다물었다.
그러나 이어질 줄 알았던 반격은 없었다. 자신의 옆구리에 유설의 손가락이 ‘툭’ 하고 다가왔을 뿐.
“옆구리가 비었네? 공격하고 방어는 동시에 해야지.”
그 순간 유설이 다시 왼쪽으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의 하늘에서 목검이 떨어져 내렸다.
만두의 기습이었다.
가볍게 피해낸 유설은 손바닥으로 만두의 등을 슬쩍 밀쳐냈다.
“기습은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유설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동시에 어깨 뒤에서 주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구의 공격이 스쳐 지나가자, 유설의 얼굴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며 머리칼을 휘날렸다.
“헤헤. 시원한데?”
이번엔 유설의 주먹이 백구를 향해 권풍을 뿜어냈다.
내기를 발출하지 않고 바람만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돌풍을 동반하며 백구를 일 장이나 밀어내 버렸다.
“으윽.”
사대 일의 대련이었지만, 너무나도 일방적이었다.
하지만 네 명의 아이들은 점차 신이 났다.
유설이 손속을 봐주면서 깨달음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대련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근처의 아이들은 부럽다는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일 식경이 더 지났을 때쯤이었다.
유설이 보법을 펼쳐 뒤로 슬쩍 물러섰다.
“이제 그만!”
이제야 대련이 끝난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고마워, 설아.”
“덕분에 더 강해진 것 같아.”
그때 유설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 잠깐 나랑 어디 좀 같이 갈래?”
역시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이들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어, 어딜?”
“우, 우리랑?”
유설은 아이들의 뒤에서 등을 잡아끌며 패도문의 정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음~ 가보면 알아.”
호현의 시장에는 언제나 먹거리가 가득하다.
이른 아침 장터의 한 노점상에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너희들 이런 거 먹어본 적 있어? 우리 할배가 그러는데 절강성의 별미래.”
유설이 훈제로 조리된 닭을 뜯어서 아이들의 그릇에 열심히 올려주었다.
“……맛있어.”
“나는 이런 거 처음 먹어봐.”
“와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 유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내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어. 우리 집에 놀러 갈래? 내가 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게.”
“아직 얘기도 못 하고 나왔는데?”
“가보고는 싶지만, 삼촌들이 걱정하면 어떡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설이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미리 백규 삼촌한테 얘기해놨으니깐. 실컷 놀면서 자고 와도 된대.”
청풍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자고 와도 된다고?”
“응, 정말이야. 같이 가서 텃밭도 만들어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 어때?”
평생의 대부분을 수련에만 매진해왔던 아이들이었다.
텃밭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따라갈래.”
“나도!”
“재밌겠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유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배, 나 친구들 데려왔어!”
손녀의 외침에 어디선가 밀짚모자를 눌러쓴 유진산이 다가왔다.
쇠스랑을 움켜쥐고 바지를 걷어 올린 모습이 시골 농가의 아들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어어, 그래. 청풍이도 왔구나?”
청풍은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가장 강했던 아이로 당시에 자신이 이름을 지어주고, 손녀를 불러오라고 보냈던 아이였다.
부쩍 성장하고 있는 청풍의 모습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할배, 우리가 도와줄게.”
“오냐. 우리 설이가 착한 친구들을 두었구나.”
“응. 뭐부터 할까?”
유진산은 허리를 움켜쥐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이어 연무장을 만들 위치에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날개 달린 염소 석상이었다.
흉측한 모습이 볼수록 꼴 보기가 싫었기에 빨리 부숴버리고 싶었다.
“친구들하고 저기 염소 석상 좀 치우거라. 할애비는 들어가서 간식 좀 준비해오마.”
오늘따라 손녀가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우리 설이는 할애비를 닮아서 집안일도 잘하는구만.’
부엌으로 들어간 유진산은 미리 사두었던 합밀과(哈密瓜)를 꺼내었다.
단맛이 강하고, 식감이 아삭하여 옛날에는 황제의 진상품으로 쓰였던 고급 과일이었다.
부엌칼을 움켜쥐고 한참 손질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유설이 주먹으로 염소 석상을 부순 모양이었다.
이제 잔해만 치우기만 하면 될 터.
관심을 거두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할배에에에!!!”
다급한 손녀의 고함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유진산은 부엌칼을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야?”
손녀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동상이 있던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할, 할아버지…….”
쪼그려 앉아 살펴보던 유진산은 화들짝 놀라며 넘어질 뻔했다.
“뭐, 뭐야, 저거!?”
땅속에서 동물의 사체 하나가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형체가 많이 상해 뭔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인가.
미친 듯이 바동거리는 모습이, 곧 있으면 밖으로 빠져나올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