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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85화 (185/238)

185화 천하제일 창술명가 (2)

“왜 안 먹는 건데!?”

눈앞에서 양초미가 계속 천도복숭아를 내밀고 있었다.

유진산은 시큼한 과일은 좋아하지 않기에 별로 먹을 생각이 없었다.

“안 먹는다면 안 먹는 거지, 왜 자꾸 물어보느냐. 다른 데 가서 놀아라.”

유진산은 등을 돌린 채 다시 자세를 잡았다.

곧 있으면 손녀가 나올 시간이었기에 몸풀기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허공에 대고 몇 번 죽봉을 휘둘렀을 때였다.

“너어!”

등 뒤에서 들려온 앙칼진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뒤를 슬쩍 돌아보자, 어느새 죽봉을 움켜쥔 양초미가 달려들고 있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쪼그만 게 겁도 없이 갑자기 덤벼들다니.

격이 떨어지게 꼬마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진산은 맞서지 않고, 상체를 비틀어가며 여유롭게 공격을 피해냈다.

파앙-! 파앙-!

양초미의 창술은 기본기가 탄탄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의 기준에서였다.

눈감고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느냐?”

가슴 앞으로 또다시 죽봉의 끝이 스쳐 지나쳤다.

“안 먹으면 내가 먹일 거야!”

자신을 힘으로 제압해서 복숭아를 먹이겠다는 얘기였다.

“거참 웃긴 녀석이로구나. 안 먹을 테니, 다른 데 가서 놀아!”

“먹어!”

유진산은 쉴 새 없이 몸을 비틀어가며 공격을 피해냈다.

그가 착잡하다는 심정으로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지원군이 나타났다.

“초미, 너! 아버지가 손님들한테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양가장의 가주인 양소천이 걸어오고 있었다.

양초미는 심술이 가득한 표정으로 죽봉을 휙 던졌다.

“얘가 천도복숭아 안 먹는대잖아.”

“어르신한테 얘가 뭐야? 어서 잘못했다고, 사과드리거라.”

“이 꼬마가 무슨 어르신이야?”

꼬박꼬박 대꾸하는 것이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양소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초미 너, 오늘 혼 좀 나봐야겠구나.”

이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눈치를 살살 보던 양초미가 반대편으로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이따가 두고 봐!”

저렇게 밤톨 같은 꼬맹이한테까지 무시를 당하다니.

반로환동의 서러움에 유진산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것 참. 저렇게 당돌한 여장부에게 찍혔으니 큰일났구만.”

유진산의 너스레에 양소천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우리 애가 어찌나 말썽을 피우고 다니는지, 정말 머리가 아픕니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쓸 것 없네. 자식 키우는 일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드센지 모르겠습니다. 훈육을 시켜도 더 반항만 할 뿐 통제가 안 됩니다.”

그의 표정을 보니 말에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손녀 이기는 할아버지도 없는 법.

이미 경험이 많은 유진산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낸다고 다 될 것 같으면 아이 키우는 일이 얼마나 쉽겠는가. 보아하니 친구가 없는 것 같은데, 외로워서 그러는 걸 수도 있겠군.”

“시도해보았지만 또래만 보면 때리고 괴롭혀서 결국엔 다 도망갔습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음. 그럴 때는 취미를 만들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지. 이것저것 한번 시도해보시게. 아이가 무엇에 흥미를 느낄지.”

무엇인가 해답을 찾은 듯 양소천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꼭 시도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떠나신다고 하셨지요?”

“맞네. 섬서로 갈 예정이네. 갈 길이 머니, 부지런히 가야겠지.”

“그것참 아쉽군요. 그전에 같이 좀 걷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양가장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따로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고민하지 않고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천하제일 창술가인 양가장이 어떤 곳인지 같이 한번 둘러보세.”

유진산과 양소천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장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부끄럽군요. 천하제일 창술가라니, 이제 더는 아닙니다.”

“창술대회에서 내게 패한 일 때문인가?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게. 나 또한 자네 아비에게 패한 적이 있었으니까.”

오래전 자신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인물이 바로 그의 아비인 양연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고인이 되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어르신. 그것은 승패를 떠나 오히려 너무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단지…….”

양소천은 뭔가를 묻고 싶어 했으나,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의 심정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내 창술에 대해 궁금한 것이로군.”

“예. 지금껏 그렇게 현묘하고 패도적인 창술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또한 창술명가의 가주로서 자신이 무엇에 패배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대답을 해주자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놔야 한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양가장 같은 중립세력이라면, 알려진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살풍창(殺風槍)이라고 하네. 유가장에 전해 내려오는 비전창법이지.”

“유가장이라면…… 섬서에 있었던 창술가문 아닙니까? 과거에는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알아주니 영광이군. 내가 바로 유가장의 가주일세.”

양소천은 몹시 놀란 듯 두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유, 유가장은 정파 세력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사파에 붙어서 무림맹과 싸우고 있냐고? 왜 그럴 것 같은가.”

“설마…… 가문을 그렇게 만든 흉수가 그들과 관련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음. 더는 말을 아끼는 게 좋겠군. 아는 것만으로도 자네에겐 화가 미칠 수 있으니.”

굳이 설명하진 않았지만, 양소천 또한 눈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화두를 돌렸다.

“그럼 음괴 대협의 정체는 누구십니까? 반로환동 이전에도 굉장히 대단하신 분이셨을 것 같아서요.”

음괴의 정체는 많은 무림인이 궁금해하는 관심사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혜성처럼 나타난 정체불명의 절세고수.

반로환동 전의 과거에 대해선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말해도 믿기가 힘들 테니, 그냥 우리 가문의 일원이라 생각하시게.”

“예, 어르신.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이지요. 어쨌거나 이제부터 천하제일 창술가는 유가장입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유가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네. 하지만 훗날 우리 가문이 다시 일어서면, 그때 후손들끼리 자웅을 겨루게 하는 것이 좋겠군.”

그때까진 양가장에게 양보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양소천은 왠지 모를 따듯함을 느끼며 조용히 웃었다.

“어르신을 보면 제 아버지가 생각나는군요.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렇게 함께 걸으며, 줄곧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나도 자네를 닮은 아들이 있었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유진산과 양소천은 장원을 천천히 둘러보며 많은 잡담을 나누었다.

일식경이 지난 후 처음 왔던 자리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양소천이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아니, 쟤가!?”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딸인 초미가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손님에게 추근거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사파의 제일고수인 음괴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니. 마음만 먹으면 양가장을 초토화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가 말리기 위해 달려가려 했지만, 유진산이 한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별일 없을 테니, 그냥 놔두시게.”

둘 중에서 유설의 키가 두 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자세히 보니 손녀의 한 손에는 반쯤 먹은 천도복숭아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양초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귀도 잡아당기고, 볼도 만져보는 것이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소천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우리 초미가 저렇게 얌전히 있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어디 그뿐인가.

둘 다 해맑고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 까르륵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손녀가 대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기막(氣膜)을 두른 것이리라.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엿들을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보기 좋군. 아무래도 둘이 잘 맞는 모양일세.”

“그렇긴 하지만, 음괴 님께 무례하게 대할까 봐 걱정입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확실히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한 손을 슬쩍 휘저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내가 책임지지.”

“어르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잠시 아이들의 모습을 응시하던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모처럼 손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좀 더 놀게 놔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거 점심까진 신세 좀 지고 가야겠군. 그래도 되겠는가?”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지요. 욕심 같아선 며칠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친구, 농담도 할 줄 아는군. 어쨌거나 우리도 한번 놀아보는 것이 어떤가.”

양소천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인으로서 맞수를 만나 합을 겨루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는 법이지. 가볍게 몸 좀 풀어보잔 말일세.”

양소천은 매우 반색하며 그를 연무장으로 이끌었다.

“영광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어르신.”

유진산은 양가장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더 놀고 가자는 손녀의 요청도 있었지만, 유진산도 온종일 양소천과 대련하는 맛에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조손은 양가장의 대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잘 머물다 가네. 인연이 있다면 또 보게 될 걸세.”

양소천은 물론 그의 형제들이 모두 함께 밝은 표정으로 배웅했다.

“살펴 가십시오, 어르신.”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한쪽에서도 손녀와 양초미가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설이 언니, 다음에 또 놀러와야 해!”

“응! 초미도 잘 있어~”

짧았던 만남을 뒤로한 채 조손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유진산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았다.

땅콩만 한 여자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양가장의 말썽꾸러기인 양초미였다.

“이름이 산이라며? 우리 다음에 또 보자!”

유진산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양소천이 딸을 낚아채 어깨로 안아 들었다.

“이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그 모습에 조손은 배꼽을 잡고 깔깔 웃어댔다.

“거 참 웃긴 녀석일세.”

양가장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였다.

유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푸히히. 할배는 바보야.”

“초미가 할배 좋아서 그러는 거야.”

“어휴. 그것참 끔찍하구나.”

유진산은 대화 자체를 회피하려 했지만, 유설은 상황이 재밌다는 듯 끈질기게 물어왔다.

“할배는 초미가 좋아? 아련이가 좋아?”

“그런 건 왜 물어?”

“둘 다 할배를 좋아한다니깐, 나중에 크면 한 명을 선택해야지. 내가 골라줄까?”

무심코 상상해보던 유진산은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흔들었다.

“에끼,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거라!”

집요하게 자신을 놀려대는 손녀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손녀를 따돌리기 위해 경공을 펼쳤다.

그러나 애초부터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다.

한 호흡도 지나기 전에 유설은 이미 자신의 옆에서 히죽 웃고 있었다.

“히히. 왜 대답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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