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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84화 (184/238)

184화 천하제일 창술명가 (1)

유진산은 진천육협과 함께 객잔에서 손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부수어진 객잔의 문을 지그시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놈은 목숨이 두 개쯤 되는가 보군.”

진득하게 술에 취한 진천육협은 낄낄거리며 배꼽을 잡았다.

“푸하하! 정말 재수도 없는 놈이죠. 지가 누굴 데려가는 줄도 모르고.”

“큭큭. 자살하는 방법도 참 다양합니다.”

“세상 살면서 그렇게 미친놈은 처음 봅니다.”

유진산도 웃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녀가 일부러 끌려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강남색마가 날고 기어도 유설에게는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않을 터.

이번 기회에 강호의 경험을 더 쌓을 수 있게 가만히 지켜만 본 것이었다.

“그래도 놈의 경공을 보니 주제에 절정 이상은 되어 보이더군.”

진천육협의 무공 수준은 일류에 불과하다.

비록 머릿수가 더 많더라도 이들이 강남색마를 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운이 좋아야 양패구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예, 자칫하면 저희 모두 골로 갈 뻔했죠.”

“놈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러고 보면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입니다.”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그들의 술잔을 하나씩 채워주었다.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이지.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만부터 한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네.”

진천육협 중 대사형인 천운필이 다시 유진산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인데 한 잔 더 하시지요.”

그들이 동시에 술잔을 올리는 그 순간이었다.

돌연 문 앞에서 귀에 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할배!”

모두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유설이 객잔 안으로 후다닥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됐느냐? 은닉처는 찾았어?”

“응, 한 명 구출해왔어.”

객잔 밖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유진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진천육협도 내공으로 취기를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그래, 잘했다.”

밖으로 나가자 피풍의를 두른 한 여인이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유설이 옆으로 다가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강남색마를 따라가서 응징하고, 양소희를 구출해오기까지의 얘기를.

옆에서 듣던 진천육협은 통쾌하다며 갈채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래서 저분을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고?”

“응, 혼자 가기 무섭대.”

그렇게 험한 꼴을 당했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어차피 양가장은 지나가는 길이기도 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약속은 항상 지켜야 하는 법이지. 날이 좀 어둡긴 해도, 경공으로 한 시진이면 도착하겠구나.”

양소희가 유진산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유진산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진천육협과 작별을 고했다.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겠군. 오늘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즐거웠네.”

진천육협도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한 명씩 진심을 담아 포권했다.

“오늘 일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최고의 경험이었습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사파에 이렇게 좋은 분들이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진천문의 원수인 강남색마도 잡아주시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음양쌍괴의 종횡무진을 응원하겠습니다.”

틈만 나면 칼을 겨누는 정파와 사파의 관계임에도, 진천육협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유진산도 마주 포권을 해주었다.

그리고 유설은 그들을 뒤로 한 채 객잔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얼마예요? 문짝 고치는 비용까지 물어줄게요.”

이 객잔은 자그마한 곳이라 점소이가 곧 주인장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달려와 굽신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문짝값은 고사하고, 음식값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당연히 좋을 수밖에.

“아이고,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정말요? 그럼 음식값만 계산해주세요.”

웃고 있던 점소이의 얼굴이 천천히 경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내뱉은 말인 것을.

“아아, 예…….”

그 모습이 웃겼던 것일까? 유설이 배꼽을 잡으며 은자 한 냥을 내밀었다.

“푸히히. 농담이에요. 어서 이거 받아요.”

“손, 손님. 은자는 저희가 거슬러드릴 돈이 부족합니다.”

유설은 점소이의 손에 은자 한 냥을 꼭 쥐여주며 말했다.

“우리 때문에 오늘 무서웠죠? 그래서 다 주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횡재에 점소이는 뛸 듯이 좋아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밤이 깊었으나 잠을 못 이루는 자들이 있었다.

지금 양가장은 난리가 한창이었다.

양가이화창(楊家梨花槍)의 달인으로 이름난 양소천은 젊은 나이에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장원의 안뜰을 서성이고 있었다. 동생이 행방불명되어 며칠째 깜깜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모든 식솔이 그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후…….”

그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장창을 움켜쥔 누군가가 다가와 말했다.

“형님,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강남색마의 짓인 것 같아요.”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옆 마을에서도 여인 두 명이 행방불명되었답니다. 정황으로 보면 맞는 것 같아요.”

“지금껏 그놈에게 잡혀가서 살아나온 여인이 한 명도 없다고 들었다. 그럼 우리 막내가 죽었다는 말이더냐?”

둘째 동생인 양소문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막내가 말없이 집을 나갈 성격이 아니잖습니까? 형님이 소희를 예뻐한 것은 알지만, 이렇게는 답이 없어요.”

“그럼 어쩌자는 말이냐.”

“의미 없는 수색은 여기서 멈추고, 강남색마나 추적해 봅시다. 복수라도 해야지요.”

막내의 죽음을 인정하자는 얘기나 다름이 없었다.

분노에 휩싸인 양소천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잡히기만 해봐라. 아주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

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장원의 대문이 쾅 열렸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넷째 동생인 양소필이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형님들! 막내가 돌아왔어요!”

“뭐, 뭐라고? 소희가 돌아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양소천과 양소문이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그때 양소필의 등 뒤에서 낯익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흑흑.”

“소희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가문의 형제들이 그녀를 토닥여주며 모습을 살펴보았다.

피풍의로 가려져 있었지만, 본래의 의복이 갈가리 찢어진 모습이 보였다.

“……나 강남색마 놈한테 잡혀갔었어.”

“하……. 그 죽일 놈, 지금 어딨어?”

“오라버니들이 당장에 찾아서 찢어 죽여 주마!”

양소희는 눈물을 훔치며 손가락을 뒤로 내뻗었다.

“저분들이 구해주셨어.”

식솔들의 시선이 이제야 뒤쪽을 향했다.

그 순간 그들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본 양소천이 화들짝 놀랐다.

“……음, 음양쌍괴?”

어찌 모르겠는가. 창술대회의 준결승전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인물이 양괴였는데 말이다.

그들은 조용히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소였다.

양소천이 재빨리 다가가 포권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무슨. 볼일 끝났으니, 우린 이만 가보겠네.”

유진산이 등을 돌리려는 그때였다.

“잠시만요, 대협! 날이 늦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지요.”

“그것은 좀 불편하지 않겠나. 민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양가장은 중립세력으로 무림의 분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음양쌍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소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은인들을 이렇게 보내면 저희 가문이 뭐가 되겠습니까?”

관료들을 많이 배출한 양가장이 이 정도 일로 곤란을 겪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손녀 생각을 하면 따듯한 잠자리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좌측을 슬쩍 바라보자 유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얼른 수락하라는 의미였다.

유진산은 마지 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하룻밤만 신세를 지겠네.”

“신세라니요? 부족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밤이 깊었지만 양가장의 장원엔 기쁨이 가득했다.

식솔들이 모두 몰려와 양소희를 반겼다.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도 웃음이 나왔다.

“보기 참 좋구나. 구출해오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응, 정말 다행이야.”

유진산과 손녀는 양가장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전날은 장원에서 가장 아늑한 전각에서 따스한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먼저 눈을 뜬 유진산은 기지개를 켰다.

옆에는 손녀가 대자로 엎드려 있었다.

자리가 편안했기 때문일까? 좀 더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척을 죽인 채 조용히 문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할배, 어디 가.”

뒤를 돌아보니 유설이 눈을 감은 채로 묻고 있었다.

“일어났어? 슬슬 출발해야지.”

“나 조금만 더 쉴게. 여기 이불도 부들부들하고 너무 좋아.”

“오냐. 그럼 할애비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있을 테니, 일어나면 짐 챙겨서 나오거라.”

밖으로 나온 유진산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전각 뒤의 공터로 향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하게 몸부터 푸는 것이 평소의 일과였다.

‘남의 집에 얹혀살 일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호현에 도착하면 창룡대에게서 강탈한 은자 삼백 냥으로 집부터 살 생각이었다.

양가장처럼 거대한 부지는 꿈도 못 꾸겠지만, 작은 수련장과 텃밭을 꾸릴 정도의 아담한 장원 정도는 구할 수 있을 듯했다.

좋아할 손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럼 몸이나 좀 풀어볼까?’

창술가의 가문이라 그런지 훈련용 창이 곳곳마다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진산은 그중 가장 짧고 가느다란 목창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움켜쥔 목창이 바람을 가르며 창무(槍舞)를 추기 시작했다.

그의 동작에 화려함은 없었다. 내력을 전혀 싣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로 가볍게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장의 가주인 자신이 경쟁 가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양가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니.

기분이 참 묘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얘!”

웬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유진산이 수련을 멈추었다.

목창을 수직으로 세우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토끼처럼 머리를 양쪽으로 말아 올린 여자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손녀보다도 훨씬 작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많아야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될 듯했다.

“네가 어제 소희 고모 데려다줬지?”

쪼그만 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아직 강호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이일 테니,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음. 그랬지.”

“나는 초미라고 해. 양초미.”

“그래, 초미. 그런데 왜?”

자신을 양초미라 소개한 아이가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불그스름한 과실을 하나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얘, 너희 집에는 이런 거 없지?”

“가을에 딴 천도복숭아가 가장 맛있어. 못 먹어 봤지?”

콩알만 한 게 어른을 놀리고 있다니. 유진산은 관심을 거두며 답했다.

“나는 복숭아 별로 안 좋아해. 너나 많이 먹거라.”

그 순간 갑자기 초미의 미간이 가운데로 좁혀졌다. 몹시 황당하고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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