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눈만 마주쳐도 인연이오 (1)
다짜고짜 은자 삼백 냥이라니.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시도는 좋았다만 그렇게 큰 금액을 줄 리가 없잖느냐. 오십 냥 정도만 불렀어야지.
그런데도 유설은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 세 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리 금군의 대장이라고 해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창룡대의 숨겨진 자산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유진산은 그가 수락하지 않으리라 판단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좋소. 요구대로 은자 삼백 냥을 줄 터이니, 약속은 꼭 지키시오.”
단지 휴전에 대한 대가로 이렇게나 어마어마한 금액을 내놓겠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유진산을 뒤로한 채 손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신 오늘까지 줘야 해요.”
황소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얘기는 끝난 것으로 알겠소.”
그 말을 끝으로 황소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일을 마쳤다는 듯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다섯 명의 장수가 그를 호위하듯 보폭을 맞추어 뒤따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드넓은 실내에는 둘만이 남게 되었다.
정적 속에서 유설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할아버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푸흐흐! 할배, 우리 횡재했어!”
“큭, 숨 막힌다. 그 많은 은자로 뭘 하려고?”
“집을 살 거야.”
일평생 자신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해왔던 손녀였다.
내심 집이 너무 갖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포두를 도우며 은자를 모으려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지금?”
목을 풀어준 유설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
“응. 장원을 사는 거야. 넓은 마당도 있고, 화원도 있는 곳으로.”
유진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집은 모든 은원을 정리한 이후에 사려고 했으나, 손녀는 마음이 급한 듯했다.
창룡대와 잠시 휴전을 했다지만, 아직 평화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무림맹과는 별개였으니까.
음양쌍괴를 호시탐탐 노리는 정파세력이 어디 한둘이던가. 피곤한 일이 끊이지 않을 듯했다.
“장원이라면 우리가 집주인인 게 금방 소문이 날 게다. 그럼 원수들이 계속 찾아오지 않겠느냐.”
“우리 집에 쳐들어온다고?”
“음. 아마도 시시때때로 와서 귀찮게 할 게다.”
유설이 왼쪽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 오기만 해봐. 정의가 뭔지 알려줄 테니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 아팠다.
하지만 하나뿐인 손녀가 원한다면, 그래서 웃을 수 있다면 감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안정된 공간에서 다음 행보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런 꼴을 안 보려면 호현으로 알아봐야겠구나.”
“백규 삼촌네 동네?”
“오냐. 사파의 성지라면 정파 애들이 함부로 오지 못할 게다.”
“그럼 삼촌한테 가서 좋은 곳이 있는지 물어보자!”
우선 목적지는 호현의 패도문이었다.
유진산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손은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밖으로 나왔다.
반로환동을 한 뒤로는 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게 어색했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싱글벙글한 유설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절로 흐뭇해졌다.
먼 곳에서 전충이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문의 상황이 종료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한달음에 다가온 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어왔다.
“금군이 모두 철수했습니다. 협상은 어찌 되었는지요?”
“음. 내가 얘기했던 대로 잘 진행되었네.”
전충은 긴장이 탁 풀렸는지 숨을 깊게 내쉬었다.
“……휴. 고생하셨습니다.”
“왕 대인이 곧 풀려날 것이니 궁성으로 가보시게. 아울러 쥐새끼 두 마리도 집으로 돌려 보내줘야겠지.”
“예. 정말 고맙습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유진산은 오른손을 슬쩍 휘저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은혜는 무슨. 상부상조한 것이니 마음에 담아둘 것 없네. 어쨌거나 여기서는 볼일도 끝났고, 우린 오늘 떠날 예정이니 그런 줄 알게.”
전충이 아쉽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벌써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음괴 대협의 요리 솜씨도 맛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나중에 호현에서 우리를 찾으시게.”
“알겠습니다. 꼭 한번 들르겠습니다.”
이렇게 작별인사가 마무리되는 듯하였으나, 아직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아저씨.”
유설의 나직한 부름에 전충이 포권하며 답했다.
“예, 대협. 말씀하십시오.”
“내 은자 다섯 냥, 오늘까지 줄 수 있어요?”
창룡대원을 색출해오면 주겠다고 약속했던 특별 포상금이었다.
잊지 않고 있던 모양이었다.
“알, 알겠습니다.”
날이 조금씩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한 시진 전에 성문을 빠져나온 조손은 당당히 대로를 따라 이동했다.
지금은 잠시 쉬어서 갈 겸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은자를 두둑하게 챙겼기 때문일까? 손녀가 등에 멘 봇짐이 무척 묵직해 보였다.
“이제 우린 부자야.”
한참 전부터 유설의 입가는 귀에 걸려 있었다.
“집을 살 생각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응, 너무 좋아! 우리 뒷마당에는 텃밭을 만들고 작물을 심을까?”
장원을 어떻게 꾸밀지 자기 나름대로 벌써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냐, 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거라.”
“히히. 할배, 근데 배 안 고파?”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게다가 날도 어둑해지고 있었으니 묵을 곳을 찾아봐야 했다.
“음. 객잔을 찾아서 좀 쉬어가는 게 좋겠구나.”
전낭이 두둑할수록 목소리도 무거워지는 법.
유설이 등 뒤의 봇짐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응. 맛있는 거 많이 사 먹자.”
조손은 다시 경공을 펼쳐 나아갔다.
바람처럼 빠른 이동속도와 독수리보다 뛰어난 눈썰미를 가진 무림고수들이었다.
더군다나 유설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반경 수십 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유설이 다가와 소리쳤다.
“찾았어!”
유진산은 손녀를 따라 그곳으로 이동했다.
대로에서 벗어나 인적이 드문 외딴곳에 있는 전각이었다.
그래서인지 객잔치고는 무척이나 작고 아담해 보였다.
입구에는 쌍룡객잔(雙龍客棧)이라는 거창한 현판이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
“잘했다. 오늘은 저곳에서 쉬자꾸나.”
한달음에 달려간 조손은 객잔의 입구에서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탁상의 개수는 고작 일곱 개.
예상대로 규모가 작았으며, 손님도 거의 없었다.
무림인으로 보이는 여섯 명이 전부였으며, 두 개의 탁상에 나눠 앉은 모습이었다.
단정한 백의 장삼 차림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정순한 기운들. 한눈에 봐도 정파인들로 보였다.
‘이거 민폐를 끼치게 되겠구만.’
음양쌍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정파인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왁자지껄하던 그들의 대화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은 객잔의 입구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설, 설마?”
무림에서 가장 특색있는 인상착의 때문이었을까? 반응을 보니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리라.
창술대회가 열렸던 장소가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음양쌍괴를 알아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곳을 가든 정체를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신체가 전부 성장하기 전까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고요 속에서 눈치 빠른 점소이가 입구로 다가와 굽신거렸다.
“아이고, 나으리들. 편하신 자리에 앉으십쇼.”
유설이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가장 넓은 자리를 지목하며 물었다.
“저기 앉아도 돼요?”
얼추 성인 여덟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둘이 쓰기엔 어색할 정도로 넓었지만, 점소이는 상관없다는 듯 한쪽 손을 쭉 내밀었다.
“예, 물론입지요.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넓게 쓰십시오.”
“고맙습니다~”
유진산이 손녀의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넓은 곳을 골랐어?”
“음. 탁상이 좁으면 음식을 올려놓을 자리가 없잖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음식을 시키려고 그런단 말인가.
손녀의 먹성이 아무리 좋더라도 대부분 남기고 말 터.
할아버지로서 손녀에게 씀씀이에 대해 교육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국수 한 그릇이면 되니, 설이 너는 두 가지만 시키거라.”
“으잉? 왜?”
“돈이 많다고 너무 사치를 부리면 안 되는 게다.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힝. 나는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다고.”
“글쎄 안 된다면 안 돼.”
유설은 심통이 난 듯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설마 할아버지가 이렇게 완고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선다면 유설이 아니었다.
드르륵-!
의자를 밀치고 벌떡 일어선 유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쥐죽은 듯이 앉아 있는 정파인들이었다.
그들의 탁상엔 고작 만두 두 접시뿐. 그 외엔 술병만 잔뜩 올려져 있었다.
“어디 가려고?”
유진산이 손녀를 불러보았지만, 삐졌는지 대꾸도 없었다.
“흥.”
유설은 이미 무림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그들의 심장 소리가 유진산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정파의 무림인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저희에게 무슨 볼일이신지.”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무림맹조차 두 손을 들게 만든 사파의 지존.
공포의 음괴가 자신들의 탁상 앞에서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우리랑 같이 먹을래요? 사줄게요.”
무림인들은 마치 헛것을 들었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음괴가 자신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겠다니.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합, 합석하자는 말씀인지요?”
“저, 저희랑요?”
그들의 반응이 시원찮았기 때문일까? 유설의 얼굴에 점차 실망감이 짙어졌다.
“네. 싫어요?”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음괴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짓 한 번에 모두의 수급이 잘려나갈 수도 있었다.
정파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요!”
엉거주춤 일어선 그들은 쭈뼛쭈뼛 음양쌍괴의 탁상에 합석했다.
그 순간 유설이 해맑은 미소로 점소이를 향해 소리쳤다.
“음식 종류별로 한 개씩 다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요.”
여덟 명이 한자리에 앉았으나 정적만이 가득했다.
그동안 어떤 소문을 들었길래 이토록 좌불안석이란 말인가.
홀로 신이 난 유설이 탁상 위에 양팔을 기대고 한 명씩 쭉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바로 옆에 앉은 무림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물었다.
“아저씨는 왼팔이 왜 그래요?”
그의 왼팔은 탁상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장애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별, 별거 아닙니다. 오래전의 부상으로……?”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음괴가 자신의 팔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잡았는지조차 알아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봐요.”
우드득-! 우드드득-!!
“끄아아악!!!”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객잔 안을 가득 메웠다.
유진산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공포에 휩싸였는지 온몸이 경직된 모습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명은 금세 멈추었고, 그의 표정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조금씩 팔에 힘을 줘보던 무림인은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을 듣지 않던 팔이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이 팔은 의원들도 고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어느새 유설은 탁상 위에 턱을 괴고 웃고 있었다.
“내가 악당인 줄 알았어요?”
공포에 질려 있던 무림인들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적어도 음괴는 자신들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그, 그럴 리가요…….”
“절,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인물은 비단 음괴뿐만이 아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양괴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파인들은 그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유설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요. 우리 할배가 나쁜 사람이긴 해도,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괴롭히진 않아요.”
그 순간 가만히 지켜보던 유진산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나쁜 사람이지만,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너무나도 모호한 표현이었다.
어쨌거나 손녀가 자신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마디를 쏘아붙이려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고는 주방을 향해 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보시게 주인장! 죽엽청도 한 동이 내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