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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75화 (175/238)

175화 왕 대인이 달라졌어요 (2)

음괴가 협조의 대가로 보상부터 요구할 줄이야.

전충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포쾌의 품계는 최하위로 급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며칠만 일하고 사직하는 계획이었기에 제대로 지급될 리도 없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협조를 거부할 수도 있을 터.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포쾌의 보수는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중도에 사직하시면, 거의 받지 못하실 겁니다.”

유설은 관심이 사라졌는지 반쯤 감겨있던 두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안 해요.”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충은 다급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실망하지 마십시오. 특수사건인 만큼, 검거에 공을 세운 자에겐 특별 보수가 지급될 것입니다.”

특별 보수라는 말에 흥미가 생긴 것일까?

유설의 눈꺼풀이 다시 살짝 올라갔다.

“얼마나 주는데요?”

“한 명을 검거할 때마다…… 은자 다섯 냥이 지급될 것입니다.”

그 순간 유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지붕 위에서 허공답보를 펼치며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유설은 전충 앞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모양이었다.

“정말 다섯 냥씩 주는 거죠?”

“제가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이 전충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은자 한 냥이면 보편적인 서민 기준으로 반년은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두당 은자 다섯 냥을 준다니? 잘만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기회였다.

“할게요.”

전충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은자 다섯 냥의 유혹에 이리도 쉽게 넘어올 줄이야.

그는 혹시라도 음괴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가 편성되면 포두가 찾아갈 것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용무를 마친 그가 등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근데 아저씨는 어디 가요?”

“아……. 저는 며칠간 궁성에 좀 가봐야 합니다.”

“황제가 있는 곳이요?”

“예. 대인께서 폐하를 알현할 계획이라 옆에서 보좌할 예정입니다.”

궁성에 대해서는 유설도 할아버지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근엄함이 가득하다는 얘기를.

하지만 아무에게나 출입이 허락되는 곳이 아니었다.

“아아~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어느 쪽이에요?”

전충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음괴가 궁성에 난입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유진산이 소리쳐 손녀를 불렀다.

“궁성은 무슨 궁성!? 사고 치지 말고, 어서 이쪽으로 오너라.”

유설이 쫄래쫄래 멀어지자, 전충은 황급히 도망쳤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온 유설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왜에? 할배, 우리도 궁성에 구경하러 가자.”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금군이 지키고 있어서 가면 큰일 나.”

“금군?”

“그래, 궁궐을 지키는 무서운 근위병들이지.”

“치.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황제가 있는 곳인 만큼 무시무시한 고수들이 많을 터였다.

손녀라면 구경하고 빠져나오는 것쯤이야 문제없겠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할애비는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다. 그나저나 네가 돈이 왜 필요해?”

“들었어?”

“그래, 다 들었다. 은자 다섯 냥을 받으면 뭐하게?”

“모아야지. 그래서 땅도 사고, 할배랑 같이 살 집도 짓고, 농장도 만들려구.”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파의 지존치고는 무척이나 소박한 꿈이었다.

유진산은 순수한 손녀의 마음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 크면 시집을 가야지, 왜 할애비랑 살려고 해.”

“왜? 할배는 나랑 살기 싫어?”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설이 너도 언젠가는 갈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 순간 유설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조용히 물었다.

“할배도 나중에 크면 장가가려고 하는 거지?”

“아니, 이 녀석이!?”

유진산은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유설이 까르륵 웃으며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아련이는 어때? 아련이가 할배 좋아한다고 했어.”

쌍룡창을 만들기 위해 방문했었던 철가장의 꼬맹이였다.

자신에게 계속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말을 걸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유진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하거라. 이 녀석이 할애비를 놀려?”

“푸흐흐.”

유설이 배꼽을 잡고 웃고 있을 때였다.

포쾌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쭈뼛쭈뼛 다가오고 있었다.

지켜보던 유진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볼일인가.”

“저, 저기 말입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내리깐 시선을 보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음양쌍괴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리라.

“사람이 말을 하면 얼굴을 보면서 대꾸해야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 교위님께서 전해주시라 하셨습니다.”

그가 건네준 것은 포쾌들이 사용하는 짧고 뭉툭한 곤봉이었다.

유설이 그걸 냉큼 건네받아서 휘둘러 보았다.

부웅-! 부웅-!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 것임에도 바람이 매섭게 뿜어져 나왔다.

“내 거예요?”

“예. 명패도 곧 만들어 드릴 예정인데, 이, 이름이…….”

“설이요. 유설.”

“그,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포쾌는 등을 돌려 부리나케 사라졌다.

“포쾌의 곤봉이 마음에 드느냐.”

유설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다 죽었어.”

“죽긴 누가 죽어? 아무나 막 때려잡지 말고, 포두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알았어. 근데 할배는 왜 안 해?”

유진산이 먼 곳으로 보이는 감옥의 입구를 가리켰다.

“할애비는 저길 지켜야지. 우리 둘 다 자리를 비웠다가 그놈이 도망치면 어떡하느냐.”

“아아~ 그럼 나 혼자 다녀와?”

“그래, 다른 녀석들 따라다니면서 잘 배우고 오너라. 아주 값진 경험이 될 게다.”

험난한 무림에서는 경험만큼 좋은 자산이 없다.

사건을 수사하는 포쾌들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손녀에게는 도움이 될 터였다.

“알았어. 내가 다 잡아 올 거야.”

유진산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의지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곳의 관리 중에 창룡대원이 몇이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관리들을 조사하는 것은 단지 만일을 대비하여 내부를 단속하기 위함이었다.

이튿날 왕사평과 전충은 궁성으로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한다고 하여 바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차를 밟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선 며칠씩 대기하기도 한다.

한편 개봉부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대부분의 포쾌들이 다섯 조로 나뉘어 출타를 나갔기 때문이다.

적막한 정청의 지붕 위에는 유진산이 홀로 앉아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무심히 감옥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유설의 전음이 들려왔다.

- 할배. 나, 다녀올게

한 무리의 관원들이 개봉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행렬의 맨 뒤에서 손녀가 곤봉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

유진산도 웃으며 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유설이 속한 조는 포두 한 명과 일곱 명의 포쾌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뭐 별일이야 없겠지.’

유진산은 전각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정청의 앞마당에 내려선 그는 감옥을 향해 걸었다.

입구를 지키는 관원 두 명이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예, 교위님께 미리 언질을 받았습니다. 안내해드릴지요?”

“그럼 고맙겠군. 어제 체포해 온 놈을 좀 보고 싶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관원 한 명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입구를 통과한 둘은 통로를 따라 쭉 걸었다.

미로처럼 연결된 지하는 규모가 상당했으며,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유진산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입구 근처는 경범을 저지른 죄인들인 모양이군.”

“예, 죄질이 중한 자일수록 깊은 곳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음. 그럼 그 녀석은 어디쯤 있는가.”

“대인께서 가장 깊숙한 곳에 넣으라 하셨습니다.”

왕사평이 창룡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딸을 죽이고 자신을 이용했던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입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중년인이 양손을 쇠사슬에 묶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창룡대의 부대주였다.

고문을 당했는지 온몸이 축 처진 몰골이었으나, 눈빛만큼은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런 자들은 고문해도 입을 열지 않아.”

“모두를 고문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인 인적사항조차 대답하지 않는 자들은 괘씸죄로 태형이 추가됩니다.”

정상적인 심문 과정이라는 얘기였다.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한번 시도해보겠네. 잠시 자리 좀 피해주시겠나.”

“예. 저는 밖에 있을 테니, 볼일 마치고 나오시지요.”

“고맙네.”

유진산은 쇠창살에 바짝 붙어 그의 전신을 쭉 훑어보았다.

“쯧쯧. 몰골이 말이 아니구만. 이름 몇 자가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고집을 부렸는가.”

“노부도 아미산의 훈련소에 있어봐서 잘 알고 있네. 잘 생각해보게. 이건 자네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 아니지 않은가.”

붉게 충혈된 부대주의 눈동자가 유진산을 노려봤다.

유진산은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인생이란 것이 얄미운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인생에 대해서 뭔가 알 것 같은 시기가 오면, 죽음이 함께 찾아오기 때문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누구에게나 기회는 한 번쯤 주어져야 하네. 자네가 원한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겠네.”

순순히 협조한다면 풀어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갑자기 부대주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단전까지 파괴해 놓고, 기회는 무슨 기회? 캬약, 퉤!”

애초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혹시 몰라서 한번 떠보았을 뿐.

하지만 설마 자신에게 침을 뱉을 줄이야.

유진산은 재빨리 피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싹수없는 놈이 어른한테 가래침을 뱉어?”

마음 같아선 쇠창살의 사이로 손을 넣어 때리고 싶었지만, 거리가 나오질 않았다.

“……빌어먹을 애늙은이 새끼. 네놈이 모든 걸 다 망쳐놨다.”

반응을 봐선 설득할 수 있을 확률이 없을 듯했다.

창룡대원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협조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부윤이 궁성으로 출발했으니까.”

“폐하를 알현하여 모든 것을 상고할 게다. 이제부터는 너희들을 소탕하기 위해 금군이 나선다는 얘기지.”

갑자기 부대주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큭, 큭큭.”

“뭐가 그렇게 웃기지?”

그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죽어가던 자가 어찌 이렇게 실성한 것처럼 웃는다는 말인가.

곧이어 그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하!!”

유진산은 그의 웃음에서 무엇인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이토록 의미심장한 웃음이라니.

분명 궁성 안에 무엇인가가 있는 듯했다.

‘설마 황제의 주변에도 창룡대원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왕사평의 계획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리라.

어쩌면 그가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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