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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74화 (174/238)

174화 왕 대인이 달라졌어요 (1)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유진산과 손녀는 수배자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개봉부의 귀빈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와아~ 이거 다 우리 둘이 먹으라고 차려준 거야?”

관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각종 볶음요리부터 잉어찜. 그리고 완자탕을 비롯해 향긋한 과일들까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조용한 공간에서 단둘이 이런 식사를 대접받다니.

손녀가 입을 벌리고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응. 많이 먹거라, 아가. 왕 대인이 미식가라 그런지 준비를 많이 해줬구나.”

젓가락을 움켜쥔 유설은 음식을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입맛에 맞는지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왕, 맛있어! 근데 아저씨는 왜 안 먹는대?”

왕사평은 원래 식탐이 굉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두더지찜 사건 이후로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치 먹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유진산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높으신 나리니까 나랏일 하느라 바쁘겠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네가 언제부터 걱정했다고.”

“처음이랑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저팔계가 사오정이 되었더라.”

서유기(西遊記) 설화는 손녀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바뀐 것은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빙의(憑依)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오히려 더 보기 좋지 뭐.”

“히히. 근데 우리한테 왜 이렇게 잘해줄까?”

왕사평은 언제나 화가 많았던 인물이었다.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가 의아할 수밖에.

그때 유진산이 자신의 앞에 있는 닭 다리를 집어서 손녀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할애비 생각엔 아무래도 일을 시키려는 것 같구나.”

“그럼…… 우리 이거 먹고 도망칠까?”

어떠한 일인지 대충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손녀의 제안처럼 도망칠 생각은 없었으나, 장난기가 발동하여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것도 뭐 나쁘진 않겠구나. 먹고 바로 도망치자고?”

유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한 번 가로로 저었다.

“일단 기다려봐, 할배. 맛있는 걸 계속해줄지도 몰라.”

“며칠 더 있어 보자는 얘기지? 음. 역시 우리 설이는 천재로구나.”

그 순간 조손의 두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더니, 각자 다른 의미에서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왕사평의 얼굴엔 근엄함이 가득했다.

예전의 살찌고 나태했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집행관의 의자에 앉은 그는 경당목(惊堂木)을 움켜쥐고 탁상을 내리쳤다.

“지금 즉시 오호상관을 모두 소환하라!”

관원 한 명이 읍을 하고는 재빨리 뛰쳐나갔다.

오호상관(五虎上官)은 개봉부에서 가장 뛰어난 다섯 명의 포두(捕頭)들이다.

현장에서 포쾌들을 이끌고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무공 실력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동시에 소집되는 경우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왕사평이 다시 누군가를 지목했다.

“장호!”

“예, 명하십시오.”

“오호상관을 통솔하여 성내의 모든 관리를 조사하라! 출신과 행적이 수상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해!”

“예, 대인!”

할 말을 마친 왕사평은 손짓으로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정청에 남은 자는 호위 전충뿐.

그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여도 괜찮으신 건지요? 다른 관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개봉은 나라의 도읍으로 가장 깊은 곳에는 궁성이 존재한다.

정치의 중심지인 만큼 영향력이 있는 관료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부윤이라도 무턱대고 설쳤다간 곤경에 처할 우려가 있었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다.

“지금 놈들을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가 당한다.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창룡대와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자신을 노릴 것은 불 보듯 뻔할 터. 끝장을 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발 뻗고 잘 수가 없을 듯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내부의 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왕사평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이것은 임시조치일 뿐, 내 선에서 혼자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칼을 뽑은 이상 확실하게 추진해야겠지.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겠다.”

어설프게 진행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우려가 있었다.

왕사평은 현재의 심각한 상황을 상고하고, 일거에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충의 얼굴엔 여전히 근심이 남아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대인이 자리를 비우시면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군부 출신이나 뒷배경이 있는 자들, 그 외에 고관들도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소한 제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전충은 말끝을 흐렸다.

지금 시점에서 왕사평이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할 터. 어딜 가든 자신이 호위로 따라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분간은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릴 예정이었기에, 둘 다 수사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일이니, 한 명도 빠짐없이 확인해야 한다. 무력을 써서라도.”

“하오나 오호상관 정도로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급관원들을 조사하는 것이면 모를까. 포두 정도의 끗발로 신분이 높은 자들을 원활히 조사하는 것은 무리였다.

왕사평 또한 알고 있을 터였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만약 음양쌍괴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전충은 상상도 못 했는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음양쌍괴라니요? 그 위험한 자들을 수사에 끌어들인단 말씀입니까?”

“안 될 건 무엇인가. 아마 그 망나니들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을 걸세.”

“그래도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대낮에 개봉부에 침입해서 부윤을 납치할 정도로 미친 생각을 지닌 자들입니다.”

“나도 처음엔 자네처럼 미친놈들인 줄로만 알았다. 허나 쭉 돌이켜보니 모든 행동이 계산된 것이었더군.”

전충은 더 이상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대인. 그런데 그들이 순순히 우리를 도와주겠습니까?”

“창룡대라면 그들도 우리 못지않게 이를 갈고 있어. 놈들을 색출하는 일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민간인의 신분이지 않습니까? 돕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방법이야 만들면 그뿐 아닌가. 그러고 보니 포쾌를 충원해야 한다고 했지?”

전충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왕사평을 응시했다.

“그럼 설마…….”

“내 권한으로 음양쌍괴를 개봉부의 포쾌로 임명하겠네. 정창원의 수사에도 협조한 바가 있으니, 명분도 충분하고.”

“문제가 없을지요? 우리 애들이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포두들이 겁을 먹고 명령을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 누가 음양쌍괴를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개봉부의 제일 고수인 전충조차 눈치를 살펴야 할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왕사평은 이미 생각해둔 게 있다는 듯 여유가 넘쳤다.

“내가 놈들에게 잡혀가서 열흘 이상을 시달리지 않았는가. 그동안 유심히 지켜본 게 있으니 걱정할 것 없네.”

“그들을 통제할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왕사평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괴는 심계가 깊어 마음이 고요하지. 반면 음괴는 기분에 따라 행동이 그때그때 다르더군. 웃다가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고, 예측이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럼 양괴를 타일러서 음괴를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로군요.”

“아니, 그 반대일세. 양괴는 공명 선생이 와도 조종할 수가 없어.”

“그럼…… 음괴를 구슬리라는 말입니까?”

왕사평이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음괴는 아부에 약하니까 뭐든 호응을 잘 해주라고 해. 기분만 좋게 해주면, 어지간한 일들은 협조해 줄 테니까.”

“양날의 칼이로군요. 반대로 기분을 상하게 하면…….”

왕사평의 시선이 굳게 닫혀 있는 정청의 문짝을 향했다.

얼마 전에 음괴에게 부수어진 후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럼 그날의 일이 반복될 수도 있는 게지.”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개봉부의 제일 고수인 자신은 기절할 때까지 맞았으며, 왕사평은 개작두에 목이 끼였던 날이었다.

일평생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기억이었다.

전충이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움켜쥔 채 포권했다.

“포두들을 소집해 명심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내일 바로 궁성으로 출발할 예정이니, 그 전에 잘 마무리해 두시게.”

“예,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유진산은 개봉부의 정청 앞마당을 산책했다.

드넓은 공간에 민간인이라고는 혼자였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관원이 없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을 때였다.

“어르신,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는지요?”

전충이 다가와 그의 앞에서 다소곳이 깍지를 꼈다.

그는 교위의 품계로 개봉부의 무관 중에서는 가장 높은 축이었다.

그런데도 유진산을 대하는 자세에는 예의가 가득했다.

“덕분에 잘 먹었네. 개봉부에서 손님을 이렇게 환대해줄 줄은 몰랐군.”

“부족한 게 있으시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대인께서 극진히 모시라 하셨습니다.”

“그래, 용건이 무엇인가.”

“저……. 사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미 그가 찾아올 것을 예상했던 유진산이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묵묵히 하는 말을 들어보았다.

내용을 전부 듣게 된 후에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우리보고 포쾌가 되어 달라고?”

“예.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진산은 시큰둥한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조사 대상이 어디 한두 명인가. 지겹도록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었다.

노동량에 대비하면 효율이 별로였기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감옥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 더욱 의미가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음. 나는 썩 구미가 당기지 않는군. 음괴한테 물어보든지.”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유진산은 턱짓으로 어딘가를 쓱 가리키고는 등을 돌렸다.

전충은 묵묵히 그가 알려준 곳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의 전각 지붕 위.

올챙이처럼 배가 부른 유설이 그곳에 대짜로 누워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선선하니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음괴 대협!”

유설의 눈동자가 우측으로 슬쩍 이동했다.

이어서 전충을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포쾌가 되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할아버지와 전충이 나눴던 얘기를 들은 이후였다.

유설은 관심이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안 해요. 귀찮아요.”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이야.

전충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그러길 잠시 후. 갑자기 그가 경건한 모습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대협의 무공에 깊이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개봉부의 관원들이 대협을 존경하는 걸 아시는지요?”

그 순간 무표정했던 음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것을 눈치챈 전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나를 존경한다고요?”

“예, 물론입니다. 대협의 정의로운 행동은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니까요.”

그 순간 전충은 음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디 포쾌들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음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하는 듯했다.

전충은 양손에 땀을 쥐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정적이 흐른 뒤.

곧이어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다.

“그럼 급료는 얼마만큼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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