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사육의 달인들 (4)
유진산이 움켜쥔 대나무가 손에서 튕겨 날아가는 소리였다.
그에겐 당황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백여덟 개로 갈라진 죽봉이 촉수처럼 내려와 전신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일 푼도 들지 않았다.
유진산은 다급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길 무섭게 경쾌한 소리가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투곽-! 투콰콰콱-!!!
마치 장대비가 온몸을 적시는 듯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던 그의 입에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아악!”
곧이어 자세가 무너진 그는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불과 한 호흡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설이 죽봉에 내기(內氣)를 담지 않았음에도, 그 위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금강불괴신공이 아니었다면 한동안은 몸져누워야 했을 정도로.
만약 실전처럼 제대로 했다면 사지가 갈가리 찢겨 나갔으리라.
앞으로 다가온 유설이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춰 물었다.
“어땠어?”
유진산은 털썩 주저앉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았다.
손녀에게 다짜고짜 두들겨 맞았는데 어찌 기분이 좋겠는가.
“할배, 삐졌어?”
“그냥 초식을 시험해 본 거잖아. 나는 다 막을 줄 알았지.”
“거짓말하지 말 거라! 언젠가는 할애비가 네 손에 죽겠구나.”
“그럼 내가 저녁에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기분 풀어.”
오히려 그 말이 더 무서웠다.
유진산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할아버지의 기분이 풀리지 않자 유설은 고민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잠시 고민하고는 뒤에서 목을 슬쩍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럼 할배한테도 알려줄게. 무적설이창법 이 초식 촉수백팔타(觸手百八打).”
이것은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녀가 만들어내는 초식은 하나하나가 경천동지할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창술가의 가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창잡이로서 확실히 탐이 나는 창법이었다.
“……조건 없이 전수해준다고?”
“응. 약속할게.”
얘가 웬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유진산은 헛기침과 함께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흠흠! 그렇다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마.”
할아버지의 기분이 풀리자, 유설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히히. 지금 알려줘?”
잠시 하늘을 보자 노을이 지려 하고 있었다.
왕사평에게 저녁을 먹일 시간이었다.
“그전에 우울한 기분을 먼저 풀어야겠구나. 특별식 만들어 놓은 거 어딨어?”
“저기!”
손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가지런히 놓인 노구솥이 보였다. 아이 둘이 한 끼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무공을 수련하면서 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가가서 뚜껑을 슬쩍 열어본 유진산은 재빨리 닫았다.
“왜 그래?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만든 요리인데.”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손녀가 개발한 음식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란 것을.
물론 다른 의미에서 말이다.
“아니다. 고 녀석이 참 좋아하겠구나. 어서 들고 따라오너라.”
조손은 노구솥을 들고 왕사평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나무에 기대어 팔자 좋게 잠을 자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밥 먹을 시간이니, 어서 일어나거라.”
왕사평이 졸린 눈을 비비며 대꾸했다.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밥을 제때 안 먹으면 죽는다는 놈이 끼니를 거르면 쓰나. 어찌 보면 우리가 생명의 은인인 게지.”
“뭐, 생명의 은인? 두더지 조림을 어떻게 먹어, 이 미친 것들아!”
왕사평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유설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직일 수 없도록.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직한 한마디에는 말로 못 할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위압감에 짓눌린 그는 저도 모르게 말투가 바뀌었다.
“내, 내가 뭘…….”
“정성을 들여서 만든 거니까, 오늘도 남김없이 먹어야 해요. 알았어요?”
왕사평은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내뻗었다.
유진산이 내민 노구솥의 뚜껑을 열기 위함이었다.
평소 남다른 미식가인 그는 맛만 있다면 못 먹는 음식이 없었다.
내심 걱정 속에 한 줄기 기대감도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제발…….’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뚜껑을 붙잡았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그것을 여는 순간이었다.
돌연 그의 입에서 토사물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꾸어어억!!!”
쭈그려 앉은 유진산이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
“더럽게 음식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이, 이, 이건 도저히 못 먹어. 절대 안 먹어!”
“영양을 고려해서 만든 건강식이다. 자, 투정하지 말고 어서 입부터 벌리거라.”
유설이 그의 턱을 움켜쥐는 그때였다.
그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다급히 소리쳤다.
“잠, 잠깐만!”
“잠깐은 무슨 잠깐? 넘기기 힘들다면 지금부터 우리가 도와주마.”
“말, 말하마! 내가 아는 것을 전부 말해주마!”
유진산은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이 순간만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손녀에게 턱을 놓아주라고 눈짓을 보냈다.
“만약 거짓이 있다면 오늘 밤은 야식도 먹게 될 게다.”
“정말이다. 내 아는 것을 모두 다 말하마. 제발 저것만은…….”
유진산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첫 번째 질문. 정창원의 본부 위치는?”
“마륜산의 정상 부근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륜산(摩崙山)은 개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경관이 뛰어나지만, 산세가 험해 일반인들은 오르지 않는 곳이다.
“규모는?”
“정보를 수집하는 하급대원이 수백 명. 그리고 본부에 상주하는 고위인력은 삼십 명쯤 된다고 들었다. 한 명 한 명이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라 무공도 뛰어나지.”
왕사평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순순히 말해줄 정도로.
유진산은 다른 질문도 계속하며 그의 내용을 종합해 보았다.
그리고 곧 확신할 수가 있었다. 정창원은 무림맹주가 움직이는 창룡대가 이미 장악했다는 것을.
왕사평의 대답이 일관되었기에 거짓은 아닌 듯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자세히 알고 있지?”
“일부는 고관회의에서. 나머지는 셋째 사위에게 들었다.”
“그 셋째 사위라는 놈이 정창원의 수장인가?”
정황상 왕사평의 사위는 창룡대원일 확률이 높았다. 유진산은 확신하고 있었다.
“관직은 부사(府使)로 조직 내의 서열은 두 번째다.”
부사라면 정5품 이상의 무관일 터.
낮은 품계는 아니었지만, 개봉부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신분 차이였다.
그가 어떻게 왕사평의 딸에게 접근했는지도 의문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 잘난 셋째 사위가 지금까지 딸과 잘살고 있다더냐.”
“내 딸은…… 안타깝게도 혼인 직후에 영문 모를 지병으로 죽었다.”
왕사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반응을 보니 죽은 딸을 지극히 아꼈던 모양이었다.
“그것참 애석하게 되었구만. 근데 좀 석연치가 않군.”
“무엇이 말이냐.”
유진산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팔짱을 꼈다. 생각을 정리해 보기 위함이었다.
‘임무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살인귀들이 가정을 꾸렸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겠지.’
애초에 조직에서 허락되지도 않을 터였다. 자신도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겪어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창룡대원이 왕사평의 딸과 혼인을 했다면? 그녀에게 접근한 저의를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개봉부의 수장이 장인이 된다면, 창룡대의 입장에서는 날개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니까.
게다가 혼인 직후에 딸이 영문 모를 지병으로 죽었다니?
당연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림에는 그것이 가능한 방법이 수백 가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큰 사건의 재판을 직접 지휘하는 부윤이라면 알아서 잘 추리할 수 있을 터.
‘어쩌면 일이 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군.’
유진산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부터는 내 얘기를 한번 들어보게.”
유진산의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왕사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얘기?”
“혹시 창룡대라는 조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금시초문이라고 이미 답해 주지 않았느냐.”
전에도 물어보긴 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일세. 아마도 재미있을 것이네. 네 사위와도 관련이 있으니까.”
유진산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나랏일까지 깊이 파고들어 관여하는 무림의 조직인 창룡대에 대해서.
숨겨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잔인무도함에 대해서도 모두 털어놨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왕사평의 인상이 점차 구겨졌다.
지금까지 어떠한 순간보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적은 없었다.
“정말…… 정말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이더냐.”
“이렇게 장황한 말을 누가 즉석에서 지어낼 수 있겠는가?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가 누군가를 향해 욕지거리를 뿜어냈다.
“이 개 같은 놈이 내 딸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나를 이용해!?”
이것은 유진산이 해준 말이 아니었다. 드러난 사실과 정황으로 스스로가 유추한 것이리라.
곧이어 왕사평은 홧김에 오른손으로 노구솥을 후려쳤다.
막을 수도 있었으나 일부로 놔두었다. 심정이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음식을 쏟은 것이 고의적이라는 심증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 부윤 나리께서 보기엔 그 창룡대라는 놈들이 어떤 것 같은가.”
왕사평의 눈빛에 지금껏 보지 못한 살기(殺氣)가 서렸다.
“주제도 모르고 나랏일에 간섭하려는 벌레들은 모두 박멸해야 해!”
탐관오리인 줄로만 알았지만, 나름대로 일말의 애국심은 지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욱 수월해질 터였다.
“음. 허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아무리 부윤이라도 혼자 나서서 설치다간 자다가 칼침을 맞겠지.”
“군부에 나와 연을 맺은 장군들이 몇몇 있다.”
“그들은 매수당하지 않았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는가. 둔황에 설치된 안서도호부의 도호도 그놈들 중 한 명이었는데 말이야.”
왕사평은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방법이 있으니, 나를 보내주거라. 네 가문의 원수라던 그놈들을 내가 전부 심판해줄 테니.”
그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은 것이었으니까.
“별로 믿음이 가진 않는군. 명색이 고위관료라는 자가 허점도 너무 많고.”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게냐? 죽일거면 어서 죽이거라!”
왕사평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산이 자신을 죽일 의도가 없음을.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자신에게 창룡대에 관해 말해줄 이유도 없었을 테니.
“보내주긴 할 게다. 그전에 우리와 같이 어디 좀 다녀와서 말이지.”
“같이 가다니? 어딜?”
“마륜산(摩崙山). 우리와 함께 가서 정창원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는 게다. 그 이후에 개봉부로 돌려 보내주마.”
왕사평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마침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또한 본부에 있을 사위에게 볼일이 있을 테니까.
“좋다! 헌데 마륜산은 개봉성 인근인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무슨 의미지?”
“지금쯤 너희를 잡기 위해 병사들이 쫙 깔렸을 게다.”
병사들은 머릿수가 많아도 위협이 되지 않지만, 군부의 무관 중에서는 무림고수처럼 무공이 대단한 자들이 존재한다.
무섭지는 않았으나 불필요한 싸움은 피해서 불확실성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군부의 경계가 좀 잠잠해질 때까지 이곳에서 은신해 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제부턴 얘기가 달라졌다. 귀찮음을 해소해줄 방법이 생겼으니까.
“부윤 나리와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