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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60화 (160/238)

160화 기분 좋은 날 (3)

유설의 울먹임을 보니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 전 어미가 보고 싶다고 오열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진산은 옅은 미소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우리 설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게지.”

“응. 빨리 가서 잡아야 해.”

각오부터 다지는 손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누군 줄 알고 어디 가서 잡아?”

의지만 앞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본디 살수들이란 행적이 신출귀몰하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도 사파의 고수를 암살할 수 있을 정도라면 특급살수 일터.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할배가 간계를 쓰면 찾을 수 있잖아.”

손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유진산이 갑자기 버럭댔다.

“아니 이 녀석이? 간계는 무슨 무슨 간계?”

“호현에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할배의 간계가 무림에서 제일이라고. 그쪽 방면으로는 지존이래.”

“아니, 도대체 어떤 고얀 놈들이 그런 소릴 했어!?”

“나도 몰라. 시장에서 들었어.”

호현에 드나드는 사파의 무림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손녀를 사파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면서, 자신은 모사꾼으로 몰다니. 어떤 놈들인지 무척 괘씸했다.

잠시 씩씩대던 유진산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 그런 놈들을 보거든 간계가 아니라 지혜라고 얘기해주거라. 알겠느냐.”

“……으응.”

불현듯 허튼 소문으로 흥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신도 창술대회에서 우승하여 강호에 실력을 입증해 보였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그럼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놈을 어떻게 잡을지 어른들끼리 상의 좀 해봐야겠으니.”

고개를 끄덕인 유설은 두말없이 쫄래쫄래 걸어 나갔다.

이 자리에선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진산은 팔짱을 끼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방법을 고심하기 위해서였다.

묵묵히 기다리던 은화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냈다.

“미끼가 필요하겠지요?”

“그렇겠지. 그것도 아주 먹음직스러운.”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미끼가 필요한 법.

어지간한 함정에는 입질조차 없을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미끼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누가 살수의 표적이 되어가면서까지 위험에 노출되려 하겠는가.

“고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질 않는군요.”

유진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느 정도 정적이 흐른 뒤 그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며 나직이 답했다.

“사파 제일의 정보조직인 흑야방의 핵심 간부라면 어떻겠는가. 그것도 남부지역의 정보망을 총괄하는 중추적인 인물이라면.”

은화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저……요?”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그 살수라면 절대 자네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걸세.”

“하지만…….”

“두렵다면 얘기하게.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일 뿐이니. 하지만 나도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는군.”

은화린이 누구인가. 흑야방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배경의 뒤에는 그녀가 있었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그녀를 이용하겠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의심 없이 미끼가 되려면 흑야방의 비밀지부 하나 정도는 날릴 각오를 해야 할 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라 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도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은화린은 결심을 굳힌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겠습니다.”

“마치 자네의 얼굴이 전쟁터에 죽으러 가는 병사 같구만. 우리가 지켜줄 텐데 뭐가 두려운가.”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네. 우리가 준비를 잘한다면,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야 그녀도 조금 안심이 된다는 듯 표정이 풀렸다.

“제 학식은 경영 위주일 뿐, 무림인들의 수단에는 눈이 어둡습니다. 조언을 조금 더 듣고 싶군요.”

“음. 강호에서는 살수처럼 조심성이 많고, 눈치가 빠른 족속이 없네. 하물며 숙련도가 절정에 이른 특급살수라면 오죽하겠는가. 모든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치밀하게 꾸며야 하네.”

미끼만 준비한다고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조금의 허점도 허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체를 노출하고 그를 유인하는 과정. 그리고 그녀의 안전에 대한 문제까지.

유진산은 일식경에 걸쳐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상의했다.

어느새 은화린의 얼굴엔 미소까지 피어올라 있었다. 고민거리가 해소되었기 때문이리라.

“역시나 계획에 빈틈이 없으시군요. 명성처럼 대단하십니다.”

조금 전 손녀에게서 들었던 말 때문이었을까? 칭찬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어딘가가 씁쓸했다.

“설마 자네도 나를 간계나 쓰는 모사꾼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지? 누구처럼 말이야.”

“그, 그럴 리가요!? 어르신의 지혜로움은 학식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이라, 평소에도 몹시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더듬는 겐가.”

“……예? 제가 말입니까?”

은화린은 고개를 갸우뚱하기까지 했다.

설마 연기를 하는 것일까?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유진산은 이내 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으니 신경 쓸 것 없네. 아무튼,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

“아마도 보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보름이라…… 그래, 그 정도는 걸리겠지.”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생각보다 긴 기간은 아니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낯선 하남에서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아닐세.”

“그런데 그때까지 어디에 계실 건지요?”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적당한 곳에 객실이라도 하나 얻어서 틀어박혀 있어야겠지.”

은화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작게 웃어 보였다.

“지내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마침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는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은 행적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작전을 수행할 지역에서 음양쌍괴가 자주 목격된다면 살수의 의심만 살 터.

필시 그녀가 제안하는 장소가 유리할 듯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잘 알겠네.”

은화린의 말처럼 쥐죽은 듯이 한적하고 고요한 장소였다. 사람의 인기척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곳에 머물게 된 조손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숲속에 이런 별장을 만들어 놨다니, 제법이군. 잠시 쉬어가긴 좋은 곳이로구나.’

작은 연못의 주위로 부엌이 딸린 아담한 오두막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러나 새들의 지저귐과 주변을 빙 두른 높은 나무숲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그는 온종일 연못 언저리의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기공 수련을 이어갔다. 금강불괴신공의 화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등 뒤에서 손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심심해. 너무 심심해.”

유설은 진중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엔 그 어떠한 것도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희를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들과 함께 있으면 그녀가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었으니까.

“안 되겠어.”

무엇인가 결심을 굳힌 유설은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우리, 마을에 놀러 가자. 여기는 너무 심심해.”

유진산은 기공수련을 멈출 수 없다는 듯 가부좌를 튼 자세를 여전히 유지했다.

“음. 아직은 나가면 안 되니 조금만 참자꾸나. 그 잔악한 놈을 유인해와야 하는데, 우리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면 도망치지 않겠느냐.”

창술대회 때문에 음양쌍괴는 하남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졌기에 무턱대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히잉.”

모처럼 들뜬 마음으로 하남에 왔거늘, 여기까지 와서 수련이라니.

숲속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뭘 하더라도 지루함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참아 보거라.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참을성을 길러야 한단다.”

“휴.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해?”

“음. 한 열흘쯤이면 될 게다.”

그 순간 유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으응? 열흘? 열흘이라니!?”

유설이 할아버지의 등 뒤에서 옷깃을 잡고 흔들어댔다.

그러자 그의 상체가 바람결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허,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조금 더 있으면 아주 할애비를 때려잡겠구나!”

할아버지의 나무람에 유설이 시무룩한 말투로 말했다.

“너무해.”

“뭐가 말이냐.”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니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뾰로통해진 손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수련을 이어갈 수 없었다.

심심한 손녀와 놀아주는 것 또한 할아버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 유진산은 몸을 풀며 말했다.

“우리 설이는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지?”

“응, 없어.”

무엇이든 손녀에게 취미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강호 유랑이 고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요리실력도 필요한 법.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지. 한번 배워 보겠느냐.”

“싫어. 내가 음식을 왜 만들어? 그냥 할배가 해주는 거 먹으면 되지.”

이렇게나 시큰둥한 반응이라니.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할애비 없으면 굶어 죽겠구나.”

“사 먹으면 돼. 나 돈 많아.”

허리춤에서 작은 전낭을 열어 보이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입맛을 다시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우리 막내 며늘아기는 식구들에게 음식 만들어주는 걸 참 좋아했는데 말이다.”

“정말? 우리 엄마가 요리를 좋아했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눈빛을 빛내는 것을 보니 이제야 관심이 생긴 듯했다.

“물론이다. 솜씨도 정말 기가 막혔지. 네 어미의 요리법을 몇 가지 알고 있긴 한데, 배우기 싫다니 뭐 할 수 없겠구나.”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가 솜씨를 발휘할 때면 가문의 식구들이 밥을 두세 그릇씩 먹었으니까.

“나, 나도 해볼래. 어서 가르쳐줘.”

유설은 안달 난 강아지의 얼굴로 할아버지를 보챘다.

하지만 유진산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연못을 지그시 응시했다.

“안 배운다며? 이미 늦었다. 이제는 알려줄 생각이 일 푼도 없어.”

등 뒤의 손녀에게 팔로 목을 휘감기는 소리였다.

급작스러운 기습에 유진산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흡!”

“빨리.”

물론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오싹해졌다. 만약 손녀가 아닌 적에게 이런 식으로 붙잡혔다면 목뼈가 꺾였을 테니까.

“이 녀석이 감히 할애비를 협박해? 어서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손녀보다 작은 체구와 아이의 얼굴에서 나오는 외침에 위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목을 풀어준 유설이 할아버지의 등을 슬쩍 토닥이며 설득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어서 알려줘. 응? 내가 매일 할배한테 맛있는 음식 해줄게.”

유진산은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고분고분해진 손녀의 모습에 노기가 약간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이번만 특별히 알려주는 게다. 또 할아버지를 놀라게 하면 그때는 얄짤없어.”

“고마워, 할배. 설이가 뭐부터 만들어줄까?”

유설은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내부에는 흑야방에서 미리 채워놓은 식재료가 가득했다.

“우선 먼저 동파육을 만들어보자꾸나. 지금부터 순서와 재료의 양을 설명해줄 테니 잘 들어야 한다.”

동파육(東坡肉)은 껍질이 붙은 돼지고기를 사용한 요리다.

소금으로 밑간을 한 후 발효주와 설탕, 간장, 향신료 등을 함께 넣고 푹 삶는다. 여기서 유가장의 비법으로 몇 가지 약재를 곁들이는 것이다.

초인적인 기억력을 가진 손녀였기에 두 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시키는 대로만 해도 어느 정도의 먹을만한 음식은 나올 터.

설명을 다 들은 유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배, 아까는 내가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오냐. 그래야 착한 손녀지.”

“이제 방해 안 할 테니 밖에서 수련하고 있어. 내가 만들어서 가지고 나갈게.”

“혼자서? 정말 할 수 있겠느냐.”

“응. 요리 잘하는 우리 엄마 딸이잖아.”

손녀의 모습에서 순간 어미가 겹쳐 보였다.

진중한 얼굴을 보니 걱정이 없어 보였다.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흐뭇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허허. 우리 설이가 이제 철이 들었구만.’

잠시 후 기쁜 마음으로 다시 연못 언저리의 바위에 앉았다. 수련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다시 수련에 매진한 지 반 시진.

드디어 부엌에서 유설이 밥상을 들고 나왔다.

“할배, 밥 먹자!”

유설과 마주 앉은 유진산은 눈물을 글썽였다.

손녀가 해준 음식을 먹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수고했다. 아주 향이 기가 막히는구나.”

반드시 요리 실력이 무공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부엌칼이라곤 처음 잡아본 손녀였지만, 정말이지 손재주가 대단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률적으로 손질된 고기와 재료들. 게다가 나름대로 고명 비슷한 것까지 올려놓은 모습이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먹어봐. 맛있을 거야.”

유진산은 젓가락으로 큼지막한 고기와 야채를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의 입안에서 의미심장한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끄흠!!!”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그였지만, 처음으로 느껴 보는 맛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삼키는 순간엔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마주 앉은 유설이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어때? 응? 맛있어?”

유진산은 대답하지 않은 채 우선 다른 것을 물었다.

“할애비가 시키는 대로만 재료를 사용한 게 맞느냐?”

“아니, 맛있으라고 듬뿍 넣었어. 아주 많이.”

“……먼저 먹어는 본 거지?”

유설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소리쳤다.

“장유유서(長幼有序)! 할배도 안 먹었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맛을 봐?”

잠시 심호흡을 하던 유진산이 다시 조용히 물었다.

“으응? 왜?”

유진산은 젓가락으로 동파육을 두 개나 집어 손녀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네가 열 점을 먹을 수 있다면, 할애비가 앞으로 너한테 할머니라 부르마. 자 어서 먹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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