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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6화 (156/238)

156화 어디 한번 두고 봐 (2)

날이 밝고 일행은 제시간에 맞춰 시합장에 당도했다.

동구는 거동이 불편한지 목발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유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기댄 모습이었다.

“고마워, 설아.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이제 아프지 마요. 내가 아저씨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니까요.”

“무슨 선물?”

유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

그때 붕대에 감겨 있는 동구의 얼굴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어르신이 보이는구나. 어서 함께 응원해보자고.”

각 조에서 선발된 자는 총 네 명이었다.

양가장의 제일고수 양소천. 양가이화창(楊家梨花槍)의 달인으로, 하남의 주민들이 우승 후보로 점찍어둔 인물이었다. 지난 대회의 우승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의 우승자는 태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연소 참가자였다.

겉모습은 연약해 보이는 꼬마였지만, 무림인들은 그를 우승 후보로 예측했다. 그의 정체가 양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리라.

세 번째 조는 산동악가의 악운평으로 악가창법(岳家槍法)을 대성한 인물이었다. 악가는 악비라는 명장을 배출한 가문으로 관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절강성에서 온 도룡창법의 계승자가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삽심육번 참가자는 왜 보이지 않는 거요?”

“뭐 하자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관중들의 야유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자로 인해 대회가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판이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여러분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당도하실 겁니다!”

관중들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아니, 그의 변명은 오히려 화를 돋웠다.

“이유라도 좀 알자고!”

“도대체 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한 사람들인 줄 알아?”

어디든 다수가 모이면 용감해지는 법이다.

주변에 질서를 유지하는 관원들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열기는 점점 거세졌다.

심판은 이제야 곤욕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막을 설명했다.

“자자, 어젯밤 삼십육번 참가자가 괴한의 습격으로 내상을 입었는데, 치료가 조금 늦어지는 것뿐입니다. 곧 도착한다니까요?”

괴한의 습격이라니. 그것도 대회의 우승 후보에 오를 정도의 강자가 말이다.

그야말로 황당한 핑계가 아닐 수가 없었다.

누구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제 시합장에서 음괴를 알아본 몇몇 무림인을 제외한다면.

“그게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습격은 무슨 습격?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지금 장난해, 시발!?”

혼란이 거세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시합장을 향해 인영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섬전같은 경신술. 모두가 기억하는 삽심육번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어딘가 그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실실 웃고 있던 얼굴이 퉁퉁 불어터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웃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왼쪽 발은 다쳤는지, 서 있는 자세가 좀 불편해 보였다.

“……뭐, 뭐야?”

“어디서 저렇게 맞고 온 거야?”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대기하고 있던 유진산이 관중석의 어딘가를 쏘아보았다. 그 자리엔 동구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손녀가 있었다.

‘……설마 쟤가?’

천하의 음괴가 아니라면 그 누가 저자를 아무도 몰래 개 패듯 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유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댈 뿐이었다. 나직이 반문하면서.

손녀의 입 모양을 알아본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시치미를 떼고 발뺌할 줄이야.

상대가 누구이든 적어도 시합장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었다. 그래야 이 대회에 참가한 의미가 있었으니까.

뜻하지 않게 오점이 생겼으니 아쉬움이 뒤따를 수밖에.

유진산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동구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랬어, 설아. 할아버지가 알면 화낼 텐데.”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아니면 누가 저놈을 저렇게 만들 수가 있겠어?”

유설은 늦은 밤까지 객실의 창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십육번으로 위장한 창룡대원이 객잔 밖으로 나서기만을.

공교롭게도 예상은 적중했고, 아무도 없는 곳까지 따라가 그를 묵사발로 만든 것이다.

“아저씨는 분하지도 않아요?”

“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잖아.”

유설의 눈빛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오늘 우리 할배 죽을 뻔했어요. 내가 그냥 놔뒀으면.”

동구도 어젯밤에 들은 바가 있었다.

삽심육번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참가한 못된 놈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가 아는 유진산 또한 자신이 엄두도 내지 못할 강자였다.

도대체 삼십육번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길래 이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다고?”

“맞아요.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늘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유설은 적당히 끝낸 것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나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이리라.

그리고 그의 목적을 알고 있는 동구도 더 이상 유설을 나무라지 않았다.

어찌하여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지켜보면 알게 될 터였으니까.

북이 울리며 두 명이 앞으로 나와 마주 섰다.

관중석에서는 그들을 응원하는 함성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꼬마야, 힘내!”

“이겨야 한다, 양소천! 나는 당신에게 걸었어!!”

“사파의 자존심을 지켜주시오, 대협!!”

태산의 정체가 양괴임을 눈치챈 무림인 중에는 사파 성향의 인물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목청이 찢어질 듯 유진산을 응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둘의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두 명의 참가자는 서로를 탐색하느라 모든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거,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구나.’

양소천을 마주한 유진산의 뇌리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금껏 상대한 다른 참가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과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 기수식.

비록 기(氣)를 내부로 갈무리하여 경지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초절정에 도달한 고수인 듯했다.

그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찌이잉-!!!

격돌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목창을 움켜쥔 둘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탐색전을 계속했다.

틈이 보이지 않으니 서로가 쉽게 선공을 가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때 양소천이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어제 조사를 하다가 당신의 정체가 양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 섬서에서는 아주 유명하다고 말이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혹여 내가 이기더라도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의 의중을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비무의 결과에 따라 음괴가 가문으로 찾아와 해코지라도 할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리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정파인들 사이에서는 음양쌍괴의 악명이 크게 부풀려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최선을 다하게.”

“고맙소.”

최고의 창술명가가 어디인지는 이 자리에서 가려질 터.

내심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보단 양가장을 꺾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었다. 유가장의 가주인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오래 끌 필요는 없겠지.’

유진산은 묵묵히 목창을 쥔 자세를 바꾸었다.

일부러 허점을 보여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옆구리를 향해 양소천의 창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지척까지 쇄도해온 그의 목창은 가히 전광석화 같았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유진산은 침착하게 초식을 전개했다.

유가살풍창 십사 초식 이내반추(理內反錐). 상대의 공격을 빨아들이며 되받아치는 기술이었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목창이 양소천의 창대를 휘감으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나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양소천의 목창이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동시에 그의 손목을 가격하려는 순간이었다.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만, 양소천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그는 창대를 움켜쥔 손을 왼손으로 바꿔 잡았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자신의 창대를 가격했다.

반발력을 이용해 상대를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터엉-!

유진산은 두 걸음을 물러서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기 무섭게 또다시 양소천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번 공격은 뭔가 좀 달랐다.

두 개로 갈라진 창끝이 각도를 틀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창끝은 다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네 개로 갈라졌다.

‘지난번에는 저 초식에 당했지. 하지만 이번엔 어림없다!’

유진산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이미 파훼법을 생각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살풍창 십일 초식 회풍진격(回風進擊). 회오리를 머금은 창끝이 상대의 초식을 차단하기 위해 나아갔다.

양소천은 자신의 공격이 맥없이 차단당한 것에 매우 놀란 듯했다.

그는 창을 회수하며 다음 초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유진산의 동작이 한 발 더 빨랐다.

한줄기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양소천의 어깨에 맞닿아 있었다.

유가살풍창 중 가장 빠른 초식인 일광극섬(一光極閃)이었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어깨를 꿰뚫었으리라. 그러나 유진산이 힘을 조절했기에 양소천은 미약한 부상만을 입었을 뿐이다.

모처럼 잡은 승기를 놓칠 수가 없었다.

양소천이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유진산은 놓아주지 않았다.

“어딜!”

어지럽게 움직이는 두 발은 악착같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가문의 기술인 선풍보법(仙風步法)이었다.

동시에 그의 목창이 전면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무차별적으로 살풍창의 초식을 쏟아내는 그의 연계기에 양소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죽음의 바람이 기괴한 소리를 뿜어내며 시선을 어지럽혀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창술이란 말인가.’

그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화창의 초식을 펼쳐내는 족족 상대에게 파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움직임이 워낙 빨랐기에 관중 중 대다수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오직 무공을 익힌 관원들과 무림인들만 연신 감탄하고 있을 뿐.

“이화창이 초식에서 밀린다고?”

“뭔지 몰라도 정말 엄청나잖아?”

작은 체구로 번갯불처럼 움직이는 유진산의 모습은 흡사 도깨비 같았다.

관중들의 놀람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콰콱-!!

짧게 울린 두 번의 타격음.

그것을 끝으로 유진산과 양소천은 서로 거리를 벌렸다.

드디어 승패가 정해진 것이다.

워낙 순식간에 끝이 났기에, 마지막 합을 제대로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창을 가로로 세운 양소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멋진 창술이었습니다.”

양가장의 제일고수로부터 직접들은 한마디였다.

유진산의 작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드디어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던 여한이 해소된 것이다.

뛸 듯이 기뻤지만, 어찌 그것을 내색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체면을 생각해 최대한 점잖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비를 닮아 그런지 제법 사내다운 친구로구만.”

양소천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의 아버지를 알고 계십니까?”

“왜 모르겠나. 내 인생에 첫 패배를 안겨준 인물인데 말이야.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자네를 이겼겠는가.”

그 순간 양소천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수치스러운 패배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멋진 승부였네.”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은 동시에 포권을 건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관중석에서 열띤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둘 다 정말 최고였어!”

“와아아아아!!”

유진산은 심장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천하제일 창술대회. 이름은 거창하지만, 무림에서 개최하는 무술대회에 비교하면 급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구파일방은 참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도 그에게는 이 대회에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창술대회에서 양가장을 꺾었다는 것은 창술명가의 가주로서 최고의 명예였다.

‘이제야 죽어서 조상님들을 볼 낯이 생겼구나.’

유진산의 고개가 무심코 관중석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관중들의 틈바구니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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