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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5화 (155/238)

155화 어디 한번 두고 봐 (1)

유진산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이미 세 번이나 승리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력을 절반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말이다.

손녀와 함께 관중석에 앉은 그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과연 명불허전의 양가장이로구나. 저쪽 조는 저 녀석의 우승이 확실할 게다.”

푸른빛이 감도는 단정한 경장 차림에 준수한 외모까지. 유진산이 지목한 자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시합장에서 여유로운 몸짓으로 상대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화려함이 깃든 창술은 한 마리의 벌이 꽃밭을 노니는 듯했으며, 공격을 가할 때는 독침을 때려 박듯 예리하고 강맹했다.

“으응? 양가장? 양가장은 할배의 원수잖아.”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가 뼈아픈 과거를 들춰낼 줄이야.

단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추억을 남겨주었을 뿐, 원수까지는 아니었다.

“그래. 오래전 이곳에서 저 녀석의 애비에게 호되게 당했지.”

어찌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있겠는가.

부푼 마음을 이끌고 천하제일 창술대회에 참가하였던 그날. 첫판부터 잘못 걸려서 가문을 개망신시켰던 뼈아픈 기억을.

그때 흘렸던 분함의 눈물. 그리고 서러웠던 감정이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저 아저씨도 실력을 숨기고 있어. 이길 수 있지?”

“할아버지만 믿거라. 그날과 오늘은 달라. 그때는 우리 가문의 비전창술을 찾지 못했었으니까.”

“살풍창(殺風槍)?”

“오냐. 우리 가문의 살풍창과 양가 놈들의 이화창(梨花槍) 중 천하제일 창술이 무엇인지 곧 자웅이 가려질 게다.”

“천하제일 창술? 그건 둘 다 아니야.”

살풍창이야말로 유가장의 자존심이었다.

쪼그만 게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의 창술을 무시하다니.

유진산은 내심 야단칠 준비를 하며 물었다.

“그럼 뭔데?”

갑자기 손녀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게다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턱을 치켜드는 것이 아닌가.

“무적설이창법!”

“큭.”

유진산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해냈다.

그렇다고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이미 그 위력을 직접 겪어 봤으니 말이다.

그때 양가장 출신의 무사가 시합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동시에 손녀의 검지가 꼬물꼬물 움직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동구 아저씨 나온다!”

시합장에 들어서는 동구가 멋쩍은 웃음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동작으로 한 손을 올려 보이는 모습에 유진산은 혀를 끌끌 찼다.

“쯧. 이번만큼은 상대를 죽일 각오로 임하라 했거늘…….”

싸움의 기술 중 첫 번째는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보 같은 그의 얼굴은 더 이상 만만해 보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상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삼십육번 참가자로 위장한 창룡대원. 그가 실실 웃으며 등장하고 있었다.

심판의 소개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떡해~ 어떡해~”

유설이 할아버지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다.

훈수를 둔다고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일 뿐.

알면서도 그걸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괜찮다, 아가. 저 녀석도 실패를 겪어봐야 더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도움이 될 게다.”

“으응…….”

상대와 마주 선 동구는 자세를 잡았다.

얼굴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가득했다.

“동구 녀석, 정말 답답하구나. 내가 겁먹지 말라고 그리도 말했거늘.”

전력을 다해도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세에 눌렸으니 결과는 안 봐도 훤했다.

잠시 후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합장을 울렸다.

찌이잉-!!

지금까지 지켜본 삼십육번의 공격방식은 항상 동일했다.

언제나 시작과 동시에 상대를 무자비하게 제압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상대가 언제 공격해올 줄 알고 있다면 방어가 수월할 터. 동구는 유진산의 조언에 따라 일 합에 모든 것을 걸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동구는 상대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마주 돌진했다.

곧이어 빛살처럼 다가오는 목창을 피해 그의 상체가 급격히 눕혀졌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며 일격필살의 기술로 되받아칠 심산이었다.

목창의 끝이 동구의 얼굴을 한 치 위로 스치고 지나쳤다.

이제 남은 것은 반격뿐.

자세를 회전한 그가 창의 손잡이로 일격을 가하려던 그때였다.

찰나였지만 동구는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미친 사람처럼.

그 순간 동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눈앞에서 상대의 신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위치를 이동시키는 고난도의 경신법이다. 공격과 동시에 이형환위를 사용하는 것은 유진산도 흉내 내기 쉽지 않은 수법이었다.

어느 순간 삼십육번은 동구의 측면에서 그의 등짝을 후려치고 있었다.

창대가 부러질 듯 휠 정도로 무지막지한 강격(强擊)이었다.

쩌억-!!!

“크악!!”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한 동구는 볼품없이 쓰러지고야 말았다.

등뼈가 부서진 것 같은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신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몸을 뒤집은 그는 다짜고짜 창대를 가로로 치켜세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삼십육번의 목창이 그의 창대를 힘껏 내리쳤다.

콰앙-!!

공격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장작이라도 패는 것처럼 그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콰앙-! 콰앙-!!

동구는 두 팔에 가해지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큭. 크크큭.”

잠시 후 그의 공격이 멈추었다.

정확히는 본격적으로 일격을 가하기 위해 목창을 회수한 것이리라.

휘리리릭-!

목창을 돌려대던 삼십육번은 그것을 수직으로 세워 내리꽂았다.

“……끄어.”

동구는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는 듯 배를 움켜잡았다.

차원이 다른 고수.

난생처음으로 겪어보는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이보다 더한 절망이 어디에 있을까.

상대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이봐, 정신 차려. 아직 한 방 남았잖아?”

아직 손에 목창은 들려 있었지만, 휘두를 힘조차 없었다.

동구의 시선이 관중석을 향했다.

유진산이 정신없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어서 빨리 항복하라는 신호였다. 옆에서는 유설이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더는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동구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달싹이기 시작했다.

“……항.”

그때였다. 그 순간 동구는 상대의 나직한 전음을 들었다.

- 설마 이대로 항복하려는 건 아니지?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삼십육번이 목창을 잡아당겼다.

고통이 심했지만, 동구는 있는 힘껏 창대를 치켜세웠다.

마치 두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창기를 발출하지만 않았을 뿐, 창대에 서린 내공의 차이는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삼십육번이 서로 맞댄 창대를 상단으로 끌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이대로라면 손가락과 턱이 한 번에 날아갈 터.

동구는 창대를 움켜쥔 오른손을 놓으며, 있는 힘껏 상체를 비틀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목창의 끝이 동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쳤다.

그러나 완벽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투두두둑-!

구슬이 바닥으로 흩뿌려지는 소리였다.

팔목에 걸려 있던 옥구슬 팔찌가 끊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침착을 유지하던 동구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는 구슬을 하나라도 잃어버릴 수 없다는 듯 다급히 손을 내뻗었다.

“내…… 내 우정 팔찌…….”

누구나 귀중히 여기는 물건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동구에게는 이 옥구슬 팔찌야말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그가 구슬 몇 개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삼십육번이 휘두른 목창이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빠각-!!!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목창이 부러지고야 말았다.

동구의 코에서 핏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정신을 잃었는지 온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상황에서 손에 쥔 구슬을 놓치지 않은 게 용할 따름이었다.

그때 시합의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 이번 승리자는 삼십육번 참가자입니다!”

결과에 만족스럽다는 듯 그는 입꼬리를 더욱 말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였다.

돌연 웃고 있던 삼십육번의 얼굴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그는 다급히 뒤로 몇 걸음을 움직였다.

그 순간 그가 있던 자리로 작은 인영 하나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거리는 여자아이였다.

시합장에 난입한 유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동구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음…… 음괴?”

삼십육번으로 위장한 창룡대원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을 더 물러섰다.

분노에 사무친 음괴와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 그곳에 서린 위압감에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듯했다.

“……각오해.”

“어디 한번 두고 봐.”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유설은 동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허공을 질주하며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경공술에 관중들은 놀란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저게 사람이야, 귀신이야?”

강호에서 허공을 자유롭게 질주할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음괴의 정체를 눈치챈 극소수의 무림인들만 얼굴이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오늘의 시합을 끝으로 각 조에서 네 명의 우승자가 결정되었다.

준결승전과 결승전은 다음 날에 이어서 진행된다.

인근 마을의 연화객잔.

참가자와 그들의 일행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장소였다. 삼 층 구조로 만들어진 대형 객잔이었기에 몹시 아늑했다.

유진산과 손녀는 넓은 객실의 목재 침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다소 심각해 보였다. 눈앞에 얼굴과 상체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동구가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저 때문에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어르신.”

“너는 억울하지도 않느냐. 그렇게 맞고도 웃음이 나와?”

반죽음이 된 상태에서도 히죽거리는 그의 얼굴이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유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씩씩거리고 있을 뿐.

“저는 괜찮아요. 그나저나 어르신이 걱정입니다.”

“내가 왜?”

“내일 결승에서 그놈과 붙을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싸울지는 생각해두셨어요?”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아마도 도망쳤을 게다. 우리 설이에게 찍혔으니까.”

앵두같이 작고 붉은 유설의 입술이 처음으로 달싹였다.

“아니야. 지금 여기에 있어.”

유진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음괴에게 죽더라도 나만 처치하면 된다고 판단한 것인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훈련받은 놈들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은근슬쩍 손녀에게 물었다.

“그놈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던데……. 얼마나 강한 것 같아?”

“아주 많이. 아직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어. 할배도 내일 동구 아저씨처럼 두들겨 맞을 거야.”

“아니, 이 녀석이?”

유설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한마디를 쏘아붙일까 고민하던 유진산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때 잔뜩 심술이 난 유설을 동구가 다독여주었다.

“아저씨는 괜찮아. 봐봐. 팔다리도 잘 움직이잖아. 하룻밤만 지나면 나을걸?”

“그래도 용서할 수 없어요. 우리 우정 팔찌가 날아갔잖아요.”

“팔찌는 내일 또 사줄게. 아저씨 돈 많아.”

유설은 팔짱을 낀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도 나름대로 생각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손녀를 뒤로한 채 유진산은 동구와 함께 잡담을 이어갔다.

강호에 관한 일부터 세상 사는 얘기까지.

유설은 객실의 구석에서 창밖만을 바라봤다. 조용히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이 보였다.

날이 어둑해지면서 동구가 잠이 들었을 때쯤이었다.

돌연 유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가, 어디 가?”

“금방 올게.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래, 그러다 보면 기분이 좀 풀릴 게다. 대신 늦었으니까 멀리 가지 말고 바로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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