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최연소 참가자 (3)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여?”
“저 어벙해 보이는 녀석이 어떻게 이긴 거지?”
“무슨 반칙이라도 쓴 거 아니야?”
관중들은 응원은커녕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모았던 천무군의 퇴역 장교가 허무하게 져서 충격인 모양이었다.
동구도 자신이 이긴 게 얼떨떨한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 감사합니다…….”
어색한 인사와 함께 그는 시합장에서 재빨리 내려왔다.
순박한 그의 얼굴에서 무사의 기개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골 마을의 성실한 농부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참가자 중에 가장 인기가 없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지켜보던 유진산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저렇게 맹한데 이 험난한 무림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동구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관중석으로 돌아온 동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내가 뭘. 우리 설이가 다 했지.”
“근데 이마는 어쩌다가 다치신 겁니까? 금강불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찌 된 영문인지 유진산의 이마가 벌에 쏘인 것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왼손을 휘휘 내저었다.
“함부로 내기를 수락한 자의 최후이니 신경 쓸 것 없어. 아무튼, 고생했다.”
동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다시 한번 읍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유설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설아. 네 덕분에 이겼어.”
“나는 아저씨가 이길 줄 알았어요. 히히.”
“다음번에도 부탁해도 되지?”
“알았어요. 나만 믿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유설의 모습이 든든한지, 동구는 연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유진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저놈 차례로구나.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지켜볼까?”
삼십육번 참가자로 위장한 창룡대원. 그가 시합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인심 좋은 사람처럼 연신 실실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불쾌했다. 웃음 속에 감춰진 시커먼 속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때 시합장의 중앙에서 심판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 참가자는 이곳에서 아주 먼 절강성에서 오신 고수이며, 오백 년을 이어온 도룡창법의 전승자이십니다!”
도룡창법이라니.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유진산조차 처음으로 들어본 창법이었다. 아무래도 그럴듯하게 지어낸 자기소개이리라.
관중들의 야유는 없었지만, 응원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상대가 등장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 여러분들! 백리세가에서 오신 이 미모의 여협이 그를 상대할 것입니다!”
유진산도 백리세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중립 세력 중에서는 위세가 대단한 가문이었으니까.
매처럼 날카로운 눈썹과 또렷한 이목구비. 백옥처럼 흰 피부는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우와아아!!”
백리세가의 여고수는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모아 답례했다.
“백리소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여러분.”
다시 한번 뜨거운 함성이 울려 펴졌다.
그녀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유진산과 유설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키진 않지만, 할아버지는 저 재수 없는 녀석을 선택하마.”
손녀에게 딱밤을 맞은 이마가 지금도 아려왔다.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금강불괴를 뚫고 충격을 줄 줄이야.
결과가 확실한 이상 복수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실력이 대단해 보이는 후기지수였지만, 저 정도로 창룡대원을 잡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을 터.
직접 겪어보았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유설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듯 확고한 표정으로 잘라 말했다.
“나도.”
“어허? 다시 한번 생각해 보거라, 아가. 우리 둘 다 나쁜 놈을 고를 순 없지 않느냐.”
사근사근 꼬셔보았지만 넘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유설은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대신 다시 우측을 바라보며 은근슬쩍 물었다.
“동구 아저씨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어서 한 명을 골라봐요.”
“음. 그럼 나는 저 여협을 선택하마. 근데 무슨 내기를 하는 건데?”
유진산과 유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그리고 그때 때맞춰 북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쿵-!
“시작하려나 봐, 할배.”
“그래, 그래도 기왕이면 동구가 내기에서 우리를 이겼으면 좋겠구나.”
웬일인지 조손이 손가락의 마디를 풀고 있었다.
어딘가 마음 한편이 불안해진 동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뭐라 물어볼 찰나, 종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다.
찌잉-!
종소리의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삽심육번이 기습적으로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벼락처럼 빠르고 정확한 동작.
그것은 필시 수없이 많은 훈련을 통해 몸에 밴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결코, 후기지수 따위가 피할 수 있는 일격이 아니었다.
푸욱-!
빛살처럼 나아간 목창의 끝이 백리소혜의 복부를 찔렀다.
숨이 턱하고 막혀온 그녀는 상체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끄으…….”
목창은 다시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며 그녀의 목 뒤를 가격했다.
콰앙-!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그녀는 철퍼덕 넘어지고야 말았다.
양손을 부르르 떨며 일어서려 했지만, 이미 다음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등짝을 향해 목창의 끝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콰직-!
바닥에 얼굴을 부딪힌 그녀는 몹시나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수치스러움 앞에서 아픔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관중석에는 응원하기 위해 함께 온 세가의 식구들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을 차마 들어 올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관중석이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는 듯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몇몇은 지금 본 장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비비기도 했다.
그때 팔짱을 끼고 있던 유진산이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무림의 후배가 경험을 쌓겠다고 나온 건데, 좀 봐주면서 할 수도 있거늘…….”
규칙은 단지 목창으로 상대의 몸에 세 번 닿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나 심하게 모욕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웃는 얼굴로 말이다.
자라나는 새싹을 저렇게 마구잡이로 짓밟다니?
유설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얼굴에서 웃음기가 증발해있었다.
“……안 되겠어. 할배가 본때를 보여줘.”
손녀라면 상대가 누구든 그냥 두드려 팰 수 있겠지만, 유진산에겐 말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움직임은 자신도 흉내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최소한 초절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화경에 도달한 인물인지도 몰랐다.
시합에서 계속 승리하다 보면 대전 상대로 만나게 될 터. 그 전에 이길 방법을 고심해봐야 했다. 다른 조였기에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그때 삼십육번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였지만 유진산과 그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저놈이?’
아주 찰나였지만, 웃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미소였다.
“곧 있으면 어르신의 차례입니다. 어서 준비하시지요.”
유진산은 동구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래. 슬슬 이동해야겠지. 그전에 이 불쾌해진 마음부터 우선 좀 풀어야겠다.”
“예? 풀다니요?”
이미 유설의 손바닥이 천천히 동구의 이마로 향하고 있었다.
“어서 대요, 아저씨.”
이 자리에 선 게 몇십 년 만인가.
유진산은 가슴이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 올랐다.
‘두 번 다시는 기회가 없을 줄 알았거늘.’
오래전 처음 창을 잡았던 그 순간부터 남모르게 품어온 평생의 꿈이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야말로 창잡이로서 최고의 명예였으니까.
손녀에게 등을 떠밀려 참가한 것이지만, 그의 기쁨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유가장의 이름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하랴.
한 명의 무인(武人)으로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향후 자신의 정체가 천하에 알려지면 가문의 명예는 저절로 따라올 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두 명은 거리를 벌려 자세를 잡았다.
유진산의 상대는 제법 큰 규모의 무술 도장을 운영하는 사범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삽시간에 끝낼 수도 있었지만, 조금은 이 상황을 즐기고 싶었다.
“꼬마야 힘내!”
“너는 이길 수 있어!”
“아프지 마!!”
최연소 참가자였기 때문일까? 별다른 소개를 안 했음에도 유진산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외침은 유진산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모든 신경은 시합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도저히 믿기질 않는구나. 어린 나이에 그렇게나 자세가 안정되어 있다니.”
“방심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어른스러움을 넘어선 연륜 있는 말투에 중년인이 웃음을 지었다.
“허허. 뭔가 사연이 있는 아이로구나. 자, 그럼 시작해볼까?”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슬며시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탁-! 타탁-!! 타타탁-!!
목창이 뒤엉키는 소리가 이렇게나 경쾌하다니.
둘은 싸우는 것이 아닌 춤을 추는 듯했다.
유진산이 모든 힘을 빼고 상대와 합을 맞춰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투는 반 각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긴장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체구의 차이가 두 배나 되었음에도 막상막하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관중들도 점차 둘의 모습을 편안하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저 꼬마, 제법이잖아!?”
“오오. 버티는데?”
“정말 대단해! 나는 지금부터 저 녀석만 응원하겠어!”
탁-! 투탁-!! 타타탁탁-!!
계속되는 격돌음은 막대기를 박자에 맞춰 두들기는 소리 같았다.
유진산을 공격하고 있는 중년인이 웃으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신이 나는구나!”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가 어떠한 초식을 펼치든 유진산이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으로 놀아주고 있었으니까.
유진산의 얼굴에도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시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오십여 장이 떨어진 관중석의 구석진 곳.
둘의 모습을 먼 곳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는 두 명이 있었다.
“지금 어르신이 봐주고 있는 거 맞지?”
유설은 고개를 돌려 동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뿜어냈다.
그의 이마에 볼록 튀어나온 두 개의 혹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흡사 잘려나간 짐승의 뿔 같았다.
“푸힛. 몰라요. 우리 한 판 더 할래요? 나는 할아버지를 선택할게요.”
동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꼬시지 마. 이제 다시는 안 할 거니깐.”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유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힝.”
“근데 설아. 어르신이 지금 저 순간을 즐기시는 것 같지 않아? 마치 간직하려는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유설도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배가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요.”
자신에게 보내던 흐뭇한 미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근심 없이 신나게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웃음. 그런 순수한 미소가 지금 할아버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러게. 아저씨는 저 상대가 부러워. 내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날 꺾어주는 자가 어르신이었으면 좋겠어.”
“근데 그건…… 안 될 것 같지 않아요?”
“어째서?”
“아저씨는 다른 조잖아요.”
유진산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소속된 조에서 우승해야 한다.
그러나 동구가 속한 조에는 그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