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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3화 (153/238)

153화 최연소 참가자 (2)

자격심사가 끝나고부터 나흘 뒤. 드디어 천하제일 창술대회가 개막되었다.

지방관아에서 주관하는 지역의 문화였기에, 주민들부터 다양한 인파가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구파일방을 포함한 거대세력에선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승승장구하는 자들은 대부분 명문세가 출신이었다.

유진산은 아직 차례가 많이 남았기에, 손녀와 함께 관중석의 구석에 앉아있었다.

“할배는 누가 이길 것 같아?”

“음. 나는 왼쪽을 선택하겠다.”

대회장에서 두 명의 청년이 창을 맞대고 있었다.

실력에 큰 차이는 없어 보였지만, 오른쪽에 있는 자의 자세가 좀 더 안정되어 보였다.

그런데도 왼쪽에 있는 자를 선택하다니. 유설이 재빨리 검지를 내뻗었다.

“그럼 나는 오른쪽!”

“오냐. 다시 바꾸기 없기다.”

대회의 참가자 중 가장 약해 보이는 자들이었다.

하수들의 싸움일수록 결과는 예측이 어려운 법이다. 승률이 더 높은 쪽은 가려낼 수 있지만, 작은 변수에도 언제든 승패가 바뀌기 때문이다.

규칙은 대련용 목창이 상대의 몸에 세 번이 닿으면 승리하는 것이다. 또는 둘 중 한 명이 항복을 선언하거나.

조손은 눈빛을 빛내며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역시나 손녀에게 간택 받은 창잡이가 시작부터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삼합이 지나기도 전에 두 점을 따낸 것이다.

“히히.”

이미 유설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니까.”

“과연 그러얼까~?”

“끝까지 두고 보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제 끝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산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마치 자신이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아앗?”

웃고 있던 유설의 입꼬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결정타를 날리려던 창잡이의 보법이 꼬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력을 자만하여 무리하게 초식을 이어간 영향이었다.

비록 작은 실수였지만, 그것을 놓칠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있던 자가 처음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인 맹공이었다.

유진산은 한 손을 들어 그를 응원했다.

“옳거니! 바로 그거다!”

반면 유설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돼!”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세에 몰린 그가 발이 꼬이며 넘어졌으니까.

쓰러진 상태에서 순식간에 세 번의 공격을 허용한 그는 안타깝게 패배하고야 말았다.

유진산은 울상을 짓는 손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어서 대거라. 네가 하자고 하지 않았느냐.”

“……히잉.”

중지를 활시위처럼 잡아당긴 그는 있는 힘껏 놓았다.

따악-!

“아얏!”

이마를 움켜쥔 유설의 눈가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현경의 신체를 가진 손녀가 이 정도로 고통을 느낄 리는 없지 않은가.

단지 억울했기 때문이리라.

“한 판 더해!”

유진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노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제 그만해야겠구나.”

“그걸 몰라서 묻느냐. 네 눈빛을 보니 까딱하면 할애비를 골로 보내겠구나.”

손녀가 분하다는 듯 씩씩댔지만 어쩌겠는가. 유진산은 이 위험한 놀이를 다시는 할 생각이 없었다.

“할배 너무해!”

“그러게 내가 얘기하지 않았더냐. 내기는 함부로 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고.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거라.”

유설은 서럽다는 듯이 눈물을 훔쳤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리라.

“……흐잉.”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자신이 심했다는 것을 느끼곤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이어서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이제 동구 차례잖아. 어서 우리가 응원해줘야지.”

“……동구 아저씨?”

“그래, 저기 나오는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합이었다.

사회를 이어가던 심판이 둘을 소개했다.

“자, 여러분! 드디어 기다리던 천무군의 장교 출신이 나오셨습니다!”

천무군(天武軍). 전쟁이 발발하면 최전방에서 활약하는 전설적인 부대로 관군의 자존심이었다.

나라 전체에 명성이 자자했기에 백성들로부터도 인기가 대단했다.

그곳의 퇴역 장교라면 보통 수준이 아닐 터. 곳곳에서 응원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뜨거운 열기가 관중석을 지배했다.

안대로 가려진 한쪽 눈. 그리고 뺨에서 턱밑까지 이어진 칼자국까지. 얼굴 곳곳에는 전장에서 얻은 상처가 가득했다.

“대단한 자로구나. 저렇게 감정이 메마른 눈빛은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유설이 두 눈에 힘을 주며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내 눈빛은 어때?”

유진산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한 번도 상대를 죽여보지 않은 유설이 그를 흉내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자와 비교하면 설이 너는 토끼 눈에 불과해. 아마도 저 관원에게 살해당한 자들이 최소한 수백 명은 될 게다.”

“그럼 나쁜 사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게지. 살인은 나쁜 짓이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을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게다.”

유진산이 설명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그때 낯익은 인물의 등장과 함께 심판의 소개가 이어졌다.

“이번 참가자는…… 음…… 자신을 시골무사 동구라고만 밝혔습니다. 사문을 말씀하진 않았으나, 실력만큼은 대단한 분이오니 모두 뜨겁게 맞아주십시오!”

목창을 움켜쥔 동구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만인 앞에 서는 것이 처음이었으니 쑥스러울 수밖에.

그는 망신을 우려하여 자신이 동가장의 출신임을 아직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밝힌다고 해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에 따라 관중들의 호응 또한 조금도 없었다.

“우우우!”

“우우우우!”

응원은커녕 야유를 쏟아내다니.

천무군 출신의 퇴역 장교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유진산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거참 너무들 하는구나. 아무리 매력이 없는 녀석이라지만, 같이 응원 좀 해주지.”

그는 잠시 옆을 돌아보았다. 손녀가 아무런 대꾸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설은 단지 화가 난다는 듯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아무래도 단전에서부터 기(氣)를 끌어올리고 있는 듯했다.

역시나 불길했던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우르르릉-!

난데없이 하늘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디선가 거센 사자후가 뿜어져 나와 관중들의 야유를 단번에 잠재워 버렸다.

【동구 아저씨 힘내요!!!】

관중석을 뒤흔드는 천둥 같은 굉음.

화들짝 놀란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헉!”

“뭐, 뭐여?”

“어디서 들려온 소리야?”

“도대체 누가?”

그 누구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내공이 입신지경에 이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전설의 육합전성(六合傳聲)이었으니까.

유진산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반면 유설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가. 여기선 무공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으응? 누가 무공을?”

발뺌하는 손녀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그럼 할아버지가 했을까? 최대한 정체를 숨겨야 해. 그러지 않으면 피곤한 일이 생길 테니.”

“우리가 음양쌍괴인 거? 이미 다 알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때 유설의 검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시합장의 구석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회색 경장을 차려입은 중년인은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마치 인심 좋은 사람처럼.

웃는 입 모양이 조금 어색한 것 말고는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팔에는 참가번호를 뜻하는 삼십육(三十六)이라 적힌 띠가 둘려져 있었다.

“저 녀석은 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어.”

“뭐가?”

“참가자격을 심사할 때 봤던 삼십육번은 다른 아저씨였다구.”

그 많던 자들의 인상착의를 모두 외웠다는 말인가? 유진산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기억력이었다.

허나 손녀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구나.”

“내 말이 맞지? 아까부터 할배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라. 내가 다 봤어.”

이미 동구의 시합이 개시되고 있었지만, 응원하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두 눈을 빛내어 그자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체외의 모든 기(氣)가 완벽히 갈무리되어 경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고수는 이곳의 모든 참가자를 통틀어 다섯을 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무엇인가에 짓이겨진 목의 흉터 자국이 무척 수상해 보였다. 만약 창룡대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면 같은 부위였을 테니.

게다가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것을 보니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리라. 문신을 지운 흔적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구나.’

하지만 창룡대원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들이 한가하게 창술대회에 나올 확률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 유진산의 뇌리에 무엇인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놈들이 음괴를 포기하고, 양괴를 잡는 것에 집중한다는 백규의 경고였다.

‘시합에서 나를 죽이려는 목적인가?’

승리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 만나게 될 터.

창룡대의 입장에선 유설을 피해 자신을 잡을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그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했다.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아무리 하남이라도 무예를 겨루는 대회에서 정체를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단지 이렇게나 빨리 노출되었다는 것이 의외였을 뿐이다.

첫 번째 시합을 치르기도 전에 행적을 파악해내다니. 놈들의 정보망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자기 손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할배 이제 큰일 났다.”

“큰일은 누가 큰일이라는 말이냐? 할애비가 저런 녀석 하나 상대하지 못할 것 같아?”

“힘들 텐데~ 내가 지금 가서 잡아 올까?”

창룡대원으로 의심되는 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손녀가 나선다면 당장에 가서 때려잡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창술대회는 포기해야 할 터.

평생의 여한으로 남았던 일을 이렇게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한 명의 무인(武人)으로서. 그리고 창술명가의 가주로서 당당히 맞서 싸워 명예를 쟁취하고 싶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말이다.

“그냥 놔두거라. 어서 동구나 응원하자꾸나.”

“나는 분명히 얘기했어.”

손녀가 경고를 보내왔지만, 겁먹을 유진산이 아니었다. 더는 예전처럼 늙고 힘없는 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시합이 한창이었다.

삼십육번에게서 관심을 거둔 둘은 동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아 보였다.

벌써 두 점이나 뒤지고 있었다.

“동구 녀석, 쉽지 않겠는데?”

“응. 조금 전에 나왔던 아저씨들보다 훨씬 강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정예부대의 퇴역장교였다.

내공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일류의 수준이었으며, 동구는 절정의 초입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공이 높은 자가 언제나 더 강한 것은 아니다.

동구의 모습은 언제 패배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기교에서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불필요한 동작이 배제된 날카로운 창술. 그리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퇴역장교의 연격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동구가 실전 경험만 좀 풍부했더라도 해볼 만했을 텐데. 쯧. 자신이 가진 강점을 활용할 줄 모르니 안타깝구나.”

관군의 무예는 집단전투에 특화되어 있기에 일대일에서의 싸움은 무림인이 더 유리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경험의 차이가 그 모든 것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유설이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할배, 나는 이번에 동구 아저씨한테 걸게. 한 판 더하자.”

딱밤을 맞고 서럽다고 운 게 바로 조금 전이거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내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자꾸 후회할 짓을 해.”

“후회 안 할 거야.”

“정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응. 그럼 결정한 거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면, 몸으로라도 교훈을 깨닫게 해줄 수밖에.

유진산은 손가락의 마디를 풀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이번엔 울어도 봐주지 않을 게다.”

“응.”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 자신한다는 말인가.

죽었다 깨어나도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는…….

“음?”

갑자기 유진산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수세에 몰리던 동구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돌연 상대의 왼쪽으로 돌며 측면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한쪽 눈이 없는 상대의 약점을 노려 사각지대로 파고들다니? 제법이었다.

게다가 공격의 성질이 강공으로 바뀌었다. 기교를 포기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리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합이 지날수록 초식의 연계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점차 유려하게 변해갔다.

달라진 동구의 공세에 퇴역장교의 자세는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설마 얘가?’

유진산은 재빨리 옆을 돌아보았다.

눈빛을 빛내며 동구를 바라보는 손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설이 너, 동구한테 전음으로 훈수 두고 있는 거지!?”

관중석과 시합장의 거리는 전음이 불가능할 정도로 멀었다. 하지만 현경의 반열에 접어든 손녀라면 얘기가 다를 터.

“가만히 있어 봐, 할배. 지금이 중요해.”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게다가 규정상으로도 반칙이 아니었다. 참가자의 지인이라면 시합장의 근처까지 와서 응원과 훈수를 두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으니까.

‘이거 큰일이로구나.’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유진산의 고개가 슬며시 우측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유설은 손가락의 마디를 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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