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최연소 참가자 (1)
자세히 살펴보니 동구가 어리숙한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손목에는 우정의 징표로 나눠 가졌던 팔찌까지 찬 모습이었다.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 참 좁구나. 저 맹한 녀석이 여기에 있다니.”
“동구 아저씨도 창술대회에 나가려나 봐.”
하남의 동가장이 창술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둘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마침 잘된 일이었다. 동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주변의 이목을 줄일 수 있을 테니.
“그런 듯하구나. 어서 가서 이쪽으로 불러오너라.”
“으응! 히히.”
유진산은 손녀가 동구를 불러오는 모습을 느긋이 지켜보았다.
동구와 손녀는 마주치자마자 서로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다.
오랜만에 재회하여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외면은 달라졌어도, 마음은 한결같은 녀석이구만.’
한눈에 봐도 동구의 무공 수준은 부쩍 성장해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절도 있는 걸음걸이.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적어도 내공만큼은 절정의 초입 정도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연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노인네한테 내공을 물려받은 게로군.’
동가장의 가주 동운걸.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여 손주 행세까지 해가며 도와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동구에게 내공을 물려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차후 손주들에게 전해주라고 말이다.
내공 전이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며, 그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소실되기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은 아니다. 그런데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기어코 결단을 내린 것이리라.
“안녕하세요, 어르신!”
동구는 손녀의 손을 잡고 달려오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는 잘 계시더냐.”
“요즘 거의 병상에 누워계시지만, 당장 위급한 정도는 아니랍니다.”
내공을 모두 잃었으니 그럴 수밖에. 가주는 길어도 몇 년 안에 절명할 터였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 너도 창술대회에 나가려고?”
“예……. 혹시라도 우승하면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놈 참. 우리 설이 만큼이나 효자로구만. 헌데 쉽지는 않을 텐데?”
내공만 높다고 모두가 고수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비록 동가장이 무가(武家)였지만, 제대로 된 가전무공(家傳武功)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우승은커녕 다섯 손가락 안에 들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동구도 알고 있는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우선 동가장의 이름은 감출 생각입니다. 성적이 좋으면 그때 밝히려고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괜히 망신만 당하고 끝나면 가문에 폐만 끼칠 수가 있어.”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굳이 사문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참가자격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예. 어쨌든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그런데 어르신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참가하려고 왔지, 이놈아. 예까지 구경하러 왔겠느냐.”
“아아…….”
“그 표정은 뭐야? 설마 노인네가 대회에 나간다고 주책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하하. 그럴 리가요. 다들 최연소 참가자로 알 텐데요.”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접수처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곳이 텅 비어있었다.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면 지금이 좋은 기회일 터.
차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될 수 있는 한 정체를 감추는 것이 유리했다.
“어서 가서 같이 접수하고, 식사나 하러 가자꾸나.”
“예, 어르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창술대회는 접수를 마쳤다고 바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청자가 너무 많기에, 자격이 있는지 간단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기에 셋은 인근 마을의 노점식당에 마주 앉았다.
주문한 음식은 소면 세 그릇.
동구는 재회가 반가운지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설이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못 본 사이 더 예뻐진 것 같네.”
단순히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또 한 번의 환골탈태를 거친 유설은 아이임에도 완전무결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히히. 고마워요, 동구 아저씨. 나는 요즘 할배한테 무공 가르쳐주고 있어요.”
유진산은 흠칫하며 헛기침을 토해냈다.
“흠흠. 얘 말은 신경 쓸 것 없다. 그냥 할애비가 손녀랑 놀아주는 거니. 그나저나 동구 너는 어찌 지냈느냐?”
“저도 온종일 무공만 수련했어요. 이렇게 외출한 것도 처음입니다.”
손아귀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것으로 보아 맹훈련을 해온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창술대회에만 있지는 않을 터.
“그래, 보아하니 아주 열심히 한 것 같구나. 목적은?”
“대회가 끝나는 대로 무림맹에 찾아갈 겁니다.”
“무림맹? 거긴 왜?”
“입단하려고요. 받아줄진 모르겠지만, 우리 동가장도 무림맹의 소속이 되면…….”
유진산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말을 끊었다.
“무림맹은 안 돼!”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날이 훤히 보이거늘 어찌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자신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 어째서…….”
“미련한 녀석아. 강호에 나오려거든 정세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거늘, 어찌 죽을 자리를 스스로 기어들어가?”
“당대의 강호가 정파 천하인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동구가 어찌 알겠는가. 철옹성처럼 굳건했던 정파의 위세가 최근 흔들리고 있음을.
정사전쟁이 격화되면 동가장 따위는 단번에 쓸려나갈 터였다.
“최근에 권황이 당했는데도?”
“예에?”
“섬서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어. 여긴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알 만한 녀석들은 다 알고 있을 게다.”
동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권황이 누구인가.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정파인들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으니까.
“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권황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유진산은 동구의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어떤 놈이 바로 지금 네 옆에서 소면을 먹고 있는 녀석이다.”
유설이 젓가락을 움켜쥔 채 방긋 웃어 보였다.
동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문을 잃었다.
유약하고 귀여운 겉모습에 망각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유설의 정체가 무시무시한 음괴임을.
“설, 설이가 권황을……?”
“맞아. 어쨌거나 네가 무림맹에 입단하면 우리랑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그럼 사파의 편에 서는 것으로 정한 것입니까?”
“음. 섬서의 무림인들은 우리가 사파라 생각하지만, 그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어. 어쨌거나 사파하고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사이인 셈이지.”
동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무림맹의 입단은 접어두겠습니다. 의리 하면 이 동구 아닙니까?”
“음괴한테 맞기 싫은 것은 아니고?”
유진산의 농담에 동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들켰네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 모습에 유설도 깔깔 웃고는 왼팔을 올려서 보여주었다.
과거 동구가 사주었던 알록달록한 우정의 팔찌를.
“푸힛. 걱정하지 마요. 이 징표를 차고 있으면, 아저씨는 언제나 나랑 친구예요.”
“고맙다, 설아. 정말이지? 이건 평생 빼지 않을 거야.”
셋은 객잔에서 하루를 같이 묵은 후 자격시험이 치러지는 곳으로 갔다.
창술대회의 주체자는 지방 관아였다.
과거 전쟁이 한창일 때 백성들의 신체단련을 독려하여 조국 수호를 돕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지역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퇴역한 관원들부터 동네 무술도장의 수련생들. 그리고 정사를 불문한 무림인들까지.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 수많은 도전자가 몰렸다.
“탈락!”
어깨가 축 늘어진 어느 중년인이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참가자들의 자격을 시험하고 있었다.
규정은 대련용 목창을 쥐고 삼 합을 버텨내는 것이다.
물론 유진산이 자격시험에서 떨어질 확률은 존재하지 않았다.
‘많기도 하구만.’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던 유진산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수백여 명의 참가자들.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관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비록 둔황에서 관군들과의 싸움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관계는 없었다.
멀고도 먼 사막 너머 오지의 소식이 이곳까지 소문났을 리는 없을 테니까.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다음이 할배 차례야. 힘내!
먼 곳에서 들려온 유설의 전음이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손녀의 응원에 어깨가 든든해졌다.
유진산은 등 뒤로 한 손을 슬쩍 올려 보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일삼육(一三六)번 참가자 태산입니다.”
심사위원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꼬마야. 아무리 참가자격에 제한이 없다지만, 심사는 공평하게 진행해야 하니 봐줄 수가 없다. 지금껏 너 같은 애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다치고 싶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란 의미였다.
오히려 상대가 가소롭게 느껴지는 것은 유진산이었다. 단지 내색할 수가 없을 뿐.
그는 손에 쥔 목창을 심사위원에게 겨누며 재촉했다.
“시작하시지요.”
“허……. 나는 분명히 경고했으니 후회 말거라.”
한숨을 내쉬던 심사위원이 기어코 공격을 개시해왔다.
쏜살같이 다가오는 창끝은 급소가 아닌 어깨 부근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신을 봐주는 것이리라.
유진산은 상체를 슬쩍 비트는 것만으로 그의 목창을 흘려보냈다.
‘……이걸 이렇게 피했다고?’
찰나의 순간 심사위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 한 번의 동작에서 상대가 보통이 아니란 것을 눈치챈 것이다.
목창을 잡아당긴 그는 재빨리 다음 초식을 전개했다.
이합(二合)부터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반원을 그리며 벼락처럼 쇄도하는 목창은 정확히 허리를 노리고 있었다.
반격을 가할 수도 있었지만, 유진산은 다가오는 목창을 향해 창대를 슬쩍 가져다 댈 뿐이었다.
쾅-!
목창이 부딪힌 충격이 작지 않을 터였지만, 유진산의 자세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당황하는 심사위원의 얼굴이 보였다.
반격을 개시한다면 일격에라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망신을 줄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신에게 일합을 봐주려 했던 그의 심성을 봐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삼합(三合). 이번 공격만 막아내면 자격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유진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사위원의 마지막 일격이 다가왔다.
두 개로 갈라지는 창끝은 어깨와 다리를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술명가의 가주인 유진산에게 있어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초식을 방어하는 그의 동작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콰쾅-!!
짧게 들려온 두 번의 격돌음.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 둘은 서로 한 발씩 물러서며 목창을 회수했다.
“믿을 수가 없구나. 도대체 네 나이에 어찌 이런 움직임이…….”
유진산은 단지 방어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심사위원은 무엇인가를 눈치챘는지 몹시 놀라고 있었다.
“합격인지요?”
“물론이다. 어쩌면 창술대회의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고맙습니다.”
유진산은 목창을 슬며시 내려놓고는 등을 돌렸다.
그때 심사위원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직이 들려왔다.
“무림세가의 아이인 것 같은데, 사문이 어디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유가장이라는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해해주십시오. 지금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심사장에서 멀어져갔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먼 곳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선 동구와 손녀가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휴. 그냥 조용히 있으라니까, 할아버지 창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