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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49화 (149/238)

149화 그분은 사파의 자존심이오 (2)

손녀가 돕자 수련 속도가 열 배는 빨라진 듯했다.

그때 등 뒤에서 유설이 할아버지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어때? 효과가 있어?”

유진산은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디 효과뿐이겠는가. 손녀의 내공이 자신의 혈도로 스며들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듯했다.

게다가 단전에서 넘쳐나는 힘은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얼마만큼?”

손녀가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었지만 대꾸할 수가 없었다.

초절정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은 운기 중에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면 혈도의 흐름이 자유로운 손녀는 운기 중에 무공까지도 펼칠 수 있는 경지였다.

“왜 답을 안 해?”

알면서 왜 자꾸 물어본다는 말인가. 유진산은 고개를 천천히 여러 번 끄덕였다.

유설은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를 계속 도왔다.

수련은 무려 두 시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사이 얻은 성과는 어마어마했다. 자신이 혼자서 열흘을 고생한 정도와 맞먹을 정도로.

다시 눈을 뜬 유진산의 얼굴엔 기쁨이 서려 있었다.

“수고했다. 우리 설이 덕분에 나도 곧 절세고수가 되겠구나.”

유설이 방긋 웃으며 연잎에 싸인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배고프지? 이거 먹어, 할배.”

그러고 보니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었다.

끈을 풀고 연잎을 벗겨내자 노릇하게 구워진 닭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규화계로구나. 이런 귀한 걸 어디서 구했어?”

규화계(叫化鷄)는 연잎으로 감싼 영계를 진흙 속에서 은은히 굽는 요리였다. 이곳에서는 먼 절강성의 요리법이었기에 섬서에서는 구경도 힘들 만큼 귀했다.

“할배 주려고 시장에서 얻어왔어. 어서 먹어봐. 맛있어.”

손녀의 마음이 기특하여 가슴이 뭉클해졌다.

성의를 봐서라도 바로 먹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냉큼 다리 하나를 뜯어서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맛이 아주 기가 막히는구나. 설이도 어서 먹어봐.”

“아니야, 나는 이미 먹었어.”

손녀가 턱을 괴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자신의 핏줄이거늘.

“이걸 먹어보는 게 아마 수십 년 만인 것 같구나. 이렇게 맛있었다니.”

고소한 닭 껍질과 부드러운 육질. 거기에 짭조름한 소금이 더해지니 더는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참 먹고 있을 때 손녀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내가 도와주니 어땠어? 몸이 금강불괴에 더 가까워졌어?”

“응. 조금만 더 있으면 검기에도 버티겠구나.”

“오오~ 정말? 그럼 다시 시험해볼까?”

유진산은 입안에 든 음식을 뿜어낼 뻔했다.

불과 얼마 전에 손녀의 주먹에 맞고 저승의 문턱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때의 일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아니다. 훗날 대성을 이룬 후에 다시 시험해보자꾸나.”

“응. 내가 매일 와서 도와줄게.”

설이가 이런 식으로 도와준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팔성, 아니 구성의 화후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듯했다.

“아이고. 역시 우리 손녀뿐이 없구나.”

“히히. 근데 할배. 그거 들었어?”

“무엇을?”

“내가 시장에서 들었는데, 하남에서 천하제일 창술대회가 열린대.”

중원 제일의 창술가를 뽑는 무술대회로 십 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있었다.

대단한 상금이 걸리지는 않지만, 우승만 한다면 창잡이로서 최고의 명예를 거머쥐게 된다.

유진산의 기억으로 마지막에 승리한 자는 산동악가에서 나왔다.

“벌써 때가 그리되었구나. 근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더냐.”

식솔들의 원수를 갚아주기에도 갈 길이 멀거늘. 한가하게 창술대회나 나갈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손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전에 얘기해준 거 기억나? 할배도 젊었을 때 창술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다고 했잖아.”

“음……. 그랬지. 네가 세 살쯤 얘기해줬나? 용케도 그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그 순간 유설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 산동악가의 셋째 아들한테 두들겨 맞고 분해서 울었다며?”

“……내, 내가 언제?”

“거짓말 마. 나는 다 기억나.”

유진산은 당황했다.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선음지체의 체질 때문일까? 당시 손녀가 알아듣지 못할 줄 알고 혼자 푸념했던 말이었거늘,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력이었다.

“그건 아파서 운 게 아니다. 단지 우리 가문의…….”

유설이 할아버지의 무릎에 양손을 슬쩍 올렸다.

“할배도 한번 나가봐. 어렸을 때 소원이 창술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며.”

이것은 손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했던 혼잣말이었다. 이것까지도 들었을 줄이야.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유진산은 말끝을 흐렸지만,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가슴 어딘가에 여한이 응어리져있던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포기했던 꿈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때 다시 한번 손녀가 설득을 이어갔다.

“옛날에는 우리 가문이 천하제일 창술가였다고 했잖아.”

“그랬지. 살풍창의 비급이 실전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이제 되찾아 오자. 할배는 할 수 있어.”

명색이 창술가의 가주였다.

가문이 천하제일 창술가의 명예를 거머쥐는 것만큼 더한 영광이 없었다.

유진산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렸다.

그는 손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지만, 그것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 유가장이 내 대(代)에서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이대로라면 죽어서도 조상님들을 뵐 낯이 없겠지. 그래……. 나도 죽기 전에 가문을 위해 뭔가 하나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심을 굳힌 유진산은 팔을 높이 올려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설이가 이렇게나 컸구나. 가문을 다 생각하고.”

“이제 할배랑 나밖에 안 남았잖아.”

“아니다. 우리 집안이 비록 유가(劉家)를 대표했지만, 아직도 많은 친척들이 남아있지 않느냐. 이번 기회에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정말?”

유진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술대회에는 참가자격에 제한이 따로 없다. 실력만 있다면.

그렇기에 우선은 익명으로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훗날 은원이 모두 정리되면, 그때 자신이 유가장의 가주임을 만천하에 밝힐 생각이었다.

“그래. 별로 내키진 않지만, 우리 손녀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어쩔 수 없지.”

유진산은 내심 기뻤지만, 마지못해 참가하는 시늉을 했다. 손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할아버지의 속내를 모를 유설이 아니었다.

“히힛. 좋았어! 그럼 내일부터 내가 창술 수련도 도와줄게.”

이튿날 아침.

뒷짐을 진 유진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패도문을 배회하고 있었다.

장원 뒤편에 별도로 존재하는 밀폐된 수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과거에 백규가 손녀의 전용 수련장으로 만들어준 장소이기도 했다.

모처럼 입에선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그때 맞은편에서 낯이 익은 인물이 아는 체를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얼마 전 실력을 인정받아 패도문의 대주가 된 홍균이었다.

문파 내에서는 나름대로 실력도 괜찮고, 예의가 바른 녀석이었다.

유진산은 환하게 웃으며 한 손을 올려 보였다.

“음. 그래. 홍균이로구나.”

“예, 어르신.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춤을 다 추시고.”

“……춤이라니?”

“방금 제가 어깨를 들썩이는 걸 봤어요.”

“이 녀석이? 내가 언제?”

유진산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딱밤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까치발을 들었음에도 키가 작아서 시늉에 그칠 뿐이었다.

그 모습이 웃겼던 것일까? 홍균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거리를 벌렸다.

“풉. 저는 진법훈련 지도가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얀 녀석.”

혀를 끌끌 차던 유진산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좋은 일이 있지. 노부가 곧 천하제일 창술대회에 나간단 말이다.’

굳이 이 사실을 소문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애들이 늦은 나이에 주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 창술대회의 개최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당장은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시기적으로도 무리가 없었다.

이 순간 유진산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피가 끓어올랐던 적이 언제인가. 젊었을 시절 강호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와 같은 흥분이 느껴졌다.

‘우리 설이가 이제 철이 들었구나. 이렇게나 효심이 지극하고 생각이 깊다니.’

손녀도 어느덧 열 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직은 아이였지만, 이따금 보이는 의젓함은 뿌듯함을 자아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몸을 풀고 있는 유설이 보였다.

무아지경에 빠져 창술을 펼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유진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자동으로 피어올랐다.

“우리 손녀 대단하다! 장판파(長坂坡)를 질주하는 상산의 조자룡 같구나!”

할아버지의 칭찬을 받았기 때문일까? 갑자기 유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리리릭-!!

용화창(龍花槍)이 지날 때마다 꽃잎이 만개하여 허공에 수를 놓고 있었다.

시선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움.

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무서움은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하나하나가 기(氣)로써 만들어진 무자비한 죽음의 꽃이었으니까.

곧이어 시연이 끝나자 유설이 용화창을 바닥에 ‘푹’ 꽂았다.

“어땠어? 나 멋있어?”

“그럼! 마치 소싯적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유설은 배꼽을 잡고 ‘큭큭’ 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구석에서 두 개의 죽봉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하나를 휙 던져주었다.

“푸히히. 빨리 올라와, 할배.”

“오냐. 오랜만에 한번 놀아볼까?”

죽봉을 낚아챈 유진산은 손녀를 향해 다짜고짜 쏘아져 나갔다.

타탓-!

이윽고 그의 창끝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유가살풍창 칠 초식 일광극섬(一光極閃). 극강의 빠르기를 지닌 찌르기 기술이었다.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유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한 발을 옆으로 슬쩍 움직였을 뿐.

손녀의 가슴 앞으로 죽봉의 끝이 밀고 나아갔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낸 것이다.

유진산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재빨리 몸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죽봉이 손녀의 뒷목을 가격하려 했다.

회룡살참(回龍殺斬). 사방의 적을 동시에 베어버릴 때 사용하는 살풍창의 기술이었다.

회심의 연계기였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숙이며 공격을 흘려보내는 유설은 여유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때. 유진산은 자신의 허리춤에 무엇인가가 닿아있는 것을 느꼈다.

툭-!

“허리가 비었네.”

손녀가 움켜쥔 죽봉의 끝이 허리를 툭툭 치고 있었다.

“요 녀석!”

미간을 좁힌 유진산은 살풍창의 기술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애꿎은 허공만 가를 뿐. 그 어떠한 것도 먹혀들지 않았다.

파앙-! 파앙-!!

“자신이 바람이라 생각하고, 초식에 생명을 불어넣어봐.”

쪼그만 게 가르치려 들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엄연히 절세의 무위를 지닌 아이였다.

유진산은 손녀가 시키는 대로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팡-! 파팡-!!

조금 나아지는 듯도 했지만, 여전히 손녀의 옷깃도 스칠 수가 없었다.

그에 따라 유진산도 점점 오기가 생겨났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야?”

지금껏 유설은 단 한 번도 반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답답함이 더해져 갈 무렵이었다.

“할배, 내가 기술 하나 보여줄까?”

손녀가 아는 창술을 모두 꿰차고 있는 유진산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른 무공을 배웠을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설마 직접 만든 기술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서 보여주거라. 뭔데?”

그 순간 회피만 이어가던 손녀가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창을 잡아당기며 공격 자세를 취한 것이다.

“필살기(必殺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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