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분은 사파의 자존심이오 (1)
유설이 상대에게 출수하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었다.
적들이 먼저 공격해오거나 할아버지의 지시가 있을 때뿐이었다.
아기 때부터 교육을 받은 영향이었을까? 이것만큼은 단 한 번도 어겨본 일이 없었다.
“그놈들은 그냥 놔두고, 어서 이쪽으로 와.”
“알았어.”
이미 무력화된 적들에게까지 손녀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유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할아버지의 등 뒤로 이동했다.
“……농락 말고 어서 죽여라.”
사파의 고수들에게 포위당한 두 명의 창룡대원은 이미 살기를 포기한 듯했다.
백규가 쌍도를 움켜쥔 채 다가갔다.
“얘기하지 않아도 마침 그럴 생각이었다.”
명색이 사파의 성지인 호현의 제일 고수였다. 눈앞의 두 명 정도는 혼자서도 쉽게 요리할 수 있을 터.
그런데도 사방을 에워싼 고수들이 동시에 간격을 좁혀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리라.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이 그들을 만류했다.
“죽이지는 말고 제압만 해주시오.”
양괴의 의중은 알 수가 없었지만, 거절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룡대원들의 제압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사방에서 화경의 고수들이 내지르는 발길질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쩌억-! 콱-! 퍼퍽-!!
풀썩-!
두 명의 창룡대원이 쓰러지는 데에는 불과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숨은 붙어있었지만, 몸이 축 늘어져 움직임이 없었다. 기절한 것이리라.
이것을 끝으로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자, 누군가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 나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일어난 듯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을 뿜어냈다.
“크큭!”
“하하하!”
정파에 비교하여 압도적으로 열세인 사파가 이토록 호쾌하게 반격에 성공한 것은 최초였다.
이들이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히 좋을 수밖에.
“내 평생 이렇게 통쾌했던 적은 처음이오.”
“오늘 일은 평생 못 잊을 거요. 권황이 자빠지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이게 모두 음괴 대협 덕분입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오. 개세영웅(蓋世英雄)이 사파에서 나왔으니, 이게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곳곳에서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유설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소리 없이 웃어댔다.
그때 유진산이 소매로 코피를 닦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늘 음양쌍괴가 힘을 보태주었으니, 사도련에서도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사도련의 부련주인 맹지호가 포권하며 말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리다.”
“우린 창룡대에게 갚아줄 게 좀 있소. 허나 워낙 음지에 숨어 있는 놈들이라 색출하기가 쉽지 않더이다.”
맹지호가 기절해 있는 창룡대원들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맞소. 놈들은 점조직 같이 움직이기에 정보를 얻는 데 한계가 있지요. 심문해봐야 입도 열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오?”
유진산은 미리 생각해놓은 것이 있다는 듯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사도련의 백사문(白蛇門)이 최면술에 능통한 것으로 알고 있소.”
맹지호가 그의 의중을 이해했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러한 방법이라면 입을 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한번 시도해보겠으니 맡겨만 주시지요.”
“고맙소. 확인되는 정보가 있다면 무엇이든 놓치지 말고 전해주시오.”
“창룡대는 우리 사도련에게도 잠재적으로 가장 큰 위협입니다. 음양쌍괴 대협들께서 발 벗고 나서주시니, 오히려 우리가 더 고맙지요.”
이번 사건으로 손녀의 무위가 어느 정도 드러났으니, 적들도 방비를 강화할 터.
더욱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기 전에 최대한 색출하여 정리할 작정이었다.
용건을 마친 유진산은 주위를 쓱 둘러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우리 스님은 어디로 갔소?”
어디에서도 미친 파계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손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죽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유설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뒤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쫓아갔어. 도망치는 사람들 잡으러 간다고.”
“혼자?”
“응. 내가 그냥 돌아가자고 했는데, 싫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때 귀살문의 양균이 설명을 덧붙였다.
“극도로 흥분하여 이성을 잃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꼭 야차 같았기에 저희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혜의 정신상태는 예측이 쉽지가 않았다.
어느 정도 진정되면 다시 패도문으로 돌아올 터. 지금으로선 그냥 놔두는 것인 상책이었다.
“우리도 이만 철수하지요. 호현의 방비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으니.”
“예,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 *
금양사에서 벌어진 일전은 강호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권황 마광철의 사망. 그 소문은 무림인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사도련은 이번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호현에서 대대적인 축제를 열었다. 사파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사파의 성지인 이곳은 지금 각지에서 몰려든 무림인들로 뜨거운 열기가 한창이었다.
축제는 닷새째 이어지고 있었다. 시장 어디를 가더라도 사파의 무림인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정녕 그 말이 사실이었소? 권황이 음괴 대협께 개박살이 났다고?”
길거리의 노점 앞에 네 명의 무림인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의 얼굴엔 흥분과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맞소. 내 우리 문주님께 직접 들었으니 틀림없소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뭔지 아시오?”
“빨리 좀 말해보오, 금형. 궁금해 죽겠소이다.”
금운철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곤륜무제가 음괴 대협을 알아보고는 싸우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다고 하오.”
그 순간 모두가 동시에 배꼽을 잡았다.
“푸하하핫! 그게 정말이오?”
“하하핫! 천하의 곤륜무제가 도망을 쳤다니요.”
“하하. 정말이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소이다.”
그동안 정파의 위세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하던 사파무림이었다.
이들의 기쁨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나저나 다들 들었소? 음괴 대협도 지금 호현에 머무르고 있다던데.”
“그, 그게 정말이오?”
“지금 어디에 있소? 위치만 알면 당장에 달려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때 금운철이라 불린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다들 알다시피 음괴 대협은 우리 사파의 자존심이지요. 그리고 난 그분을 직접 만난 적이 있소이다. 객잔의 옆자리에서 같이 밥도 먹고, 양괴 대협과 얘기도 해봤소.”
모두가 금운철을 부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오……. 정말 부럽소, 금형.”
“나도 음괴 대협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소.”
“정말 소문대로 야리야리한 모습이었소?”
금운철이 왼쪽 손을 탁상 위에 ‘턱’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반로환동하여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선인(仙人)과도 같은 정기가 느껴졌소. 두 눈엔 항우의 기개가 서려 있었는데 눈빛이 마치…….”
그때였다.
돌연 금운철의 왼쪽 옆구리 사이로 작은 얼굴이 참새처럼 삐죽 빠져 나왔다.
“나 여기 있어요.”
유설과 눈을 마주친 그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가 버렸다.
“……헙!”
넘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금운철이 앉은 의자가 마치 귀신들린 것처럼 ‘붕’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모두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설, 설마.”
“음, 음……괴……?”
유설의 정체를 알게 된 그들은 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거리의 사파인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음괴 대협께서 오셨다!”
“정, 정말?”
“어디야!? 어디!!”
사방에서 벌떼처럼 몰려드는 사파인들의 모습에 유설은 당황했다.
그저 장난을 한 번 쳤을 뿐이거늘, 이렇게나 일이 커질 줄이야.
이들에게 둘러싸인다면 몹시 피곤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시장에 나온 목적은 할아버지에게 줄 간식을 사려는 것일 뿐. 저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다.
“나 지금 빨리 가봐야 해요! 다음에 또 봬요!”
재빨리 인사를 마친 유설은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준비동작조차 없이 십 장 이상을 날아오르는 모습은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다.
곧이어 유설은 허공에서 발을 구르며 순식간에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경공술에 모두가 고개를 치켜든 채 탄성을 자아냈다.
“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세상에나…….”
축제가 한창인 가운데 유진산은 패도문 내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다.
사파에서 음양쌍괴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든 말든 그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식솔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놈들의 배후를 모두 찾아내, 은원의 고리를 끊는 것뿐이었다.
“형님. 기쁜 날인데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둡소?”
패도문의 화원에서 같이 산책하고 있는 백규였다.
이곳에서도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고, 문도들과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오직 유진산의 얼굴에만 깊은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신경 쓰지 마시게. 단지 좀 찜찜해서 그런 것뿐이니.”
“다 잘 풀리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오?”
“언제가 되었든 이번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파의 보복이 이어질 것이네.”
백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맹주 년의 속이 아주 부글부글 끓어오르겠지요.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 얼씬도 못 할 거요. 이번에 입은 피해가 적지 않을 테니.”
유진산은 소리 없이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되었으면 좋겠군. 하여간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법이니, 방심하지 마시게.”
이러한 평화가 얼마나 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정파의 전력은 사파에서 넘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막강했으니까.
“지금껏 형님 말대로 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으니 그리 하겠소. 당분간 탐망과 방비를 강화하고, 련주께도 당부를 드리리다.”
“그렇게 하겠다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또 수련하러 가시는 거요?”
“앞으로는 더욱 강한 놈들이 나타날 텐데, 어찌 게으를 수 있겠는가.”
백규는 멀어져 가는 유진산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수련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만 하시오.”
“그리하지.”
거처로 돌아온 유진산은 즉시 가부좌를 틀었다.
기공수련을 통해 금강불괴신공의 화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창룡대원들과의 싸움에서 조금 효과를 보긴 했지만, 아직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최소한 팔성(八成)까지는 올려둬야 한다.’
그래야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될 것만 같았다.
육성에서 칠성으로 한 단계를 올리는데 걸린 기간은 보름. 그것도 모든 일을 제쳐두고 수련에만 몰두한 결과였다.
팔성까지는 곱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이어가야 했다.
“후웁.”
단전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따스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며 기벽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두껍게. 그리고 더욱 단단하게.
수백 겹, 수천 겹, 그리고 수만 겹의 기벽을 쌓아 장기를 보호하고, 근육과 피부를 강화해야 한다.
수련을 이어갈수록 효과는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릿했다.
인고의 시간 동안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진산의 자세와 의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수련이 계속되고 있을 찰나였다.
‘……헉?’
돌연 유진산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갑자기 단전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파도처럼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정순하고 응축된 기(氣)의 흐름.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가공할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부처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어, 할배. 내가 도와줄게.”
등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음성은 분명 손녀의 목소리였다.